파란 들판 가득 하얀 눈이 내리 듯 벼이삭이 펴고 참새가 날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나 들판에 하나둘 허수아비가 등장하면서 나락에는 물이 잡히고 그 나락이삭에 다시 노오란 결실의 빛깔이 내려앉으며 가을은 거대한 잔칫상처럼 들판가득 황금빛을 채웠다. 하늘도 높아가고 맑아가며 푸르러갔다.무더위와 태풍이 말갛게 씻어낸 그해 가을의 들녘을 열찬씨 는 늘 혼자서 걸어야 했다. 처남 남근씨가 출항해서 출어도 못 하고 등산과 삼겹살과 시원소주에 빠진 김몽룡씨가 바빠 같이 산행이 안 되는 토요일마다 그는 기장, 철마, 정관, 좌천, 남창, 양산 동

“그럼 송도연안정비로 새로 만든 스탠드 시멘계단이랑 목재 데크가 큰일 아니가?”“예. 다행히 2사장 현장에 임해행정센터를 짓는 바람에 거기서 바로 바다와 백사장을 살피며 비상근무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한반도에는 그렇게 심각한 영향은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알았네. 자네만 믿네.”“예. 잘 알겠습니다.” 돌아 나오면서도(저 놈의 영감탱이! 또 피해가 나면 죄 없는 방재과장 이 이열찬이만 개 잡듯이 잡겠구나. 방재과장이 태풍을 부른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막을 수도 없는데...) 혀를 끌끌 차면서 돌아왔다.

“과장님, 그럼 저는.”고개를 꾸뻑하고 방을 나갔다. 과장이 자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처리할 판에 굳이 계장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모양이었다. 보통의 계장들이라면 상관인 과장이 자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 어떻게든 집에 보내고 자신이 고생하는 것이 불문율인데 말이다.(내 저런 사람을 요직 문화계장에 추천까지 했다니...) 이튿날은 최정길재난관리계장이 근무조라 처음부터 자신이 자고 열찬씨를 어떻게든 보내려고 신경을 쓰는 통에 업무는 신경을 끊고 모처럼 귀가해 샤워를 하고 잘 잤다. 다음날이었다. 직원들이 야식을 먹느라고 분주한 사이

이제 더는 윗사람의 눈치에 연연할 일도 없는 열찬씨는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8월초의 여름휴가를 맞았다. 이제 어느 정도는 외식도 하고 잡비도 쓸 정도로 생활은 좀 나아졌지만 문제는 슬하에 아이들이 없고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할 만큼 만만한 친구도 없고 딱히 가고 싶은 곳이나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는데...” 열찬씨의 뇌리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추억, 예비군훈련장에서 만난 고성 출신의 최규철이란 동갑친구와 그의 친구인 상업은행에 다니던 허재규씨의 세 가족이 하동 쌍계사계곡으로 2박3일 캠핑을

암각화의 기억 석정희 사막 한가운데 바위산에새겨져 그려진 그림 속깃털로 가리워진 여인의 치부깃털 걷어내려한흔적 뚜렷하다무료해서였을까 우상이었을까이리 저리 생각해 보아도사막을 달려 온 끝에본능을 찍어내려바람에 닳은 바위산의젖무덤 아래서의 갈망삭여 풀어낸 생욕 생생하다많은이들 거두지 못한 깃털누구도 벗기지 못할 순결로 남았다. ◇ 석정희 시인 : ▷Skokie Creative Writer Association 영시 등단 ▷‘창조문학’ 시 등단 ▷미주시문학 백일장에서 "장원" ▷재미시협부회장, 편집국장, 미주문협편집국장 역임 ▷수상 :

초생달 김강호 그리움 문턱쯤에고개를내밀고서뒤척이는 나를 보자흠칫 놀라돌아서네눈물을 다 쏟아내고눈썹만 남은내 사랑 초생달 닮은 여인이라면 무척이나 청초하고 가녀릴 듯한데 그 초생달이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았군요. 수줍은 여인의 애틋한 사랑이 이런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초생달은 홀연 서쪽 하늘로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대상에 대해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이미지가 참신하고 선명합니다. ◇ 손증호 시인 : ▷2002년 시조문학 신인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부산시조 작품상,

그러고 보니 이제 마음도 많이 가라앉고 시심도 꽤 다듬어진 것 같았다. 문화관광과장, 세무과장 때까지만 해도 가끔 시를 쓰고 수필을 긁적거릴 여유가 있었는데 그놈의 기획감사실장, 출세의 동아줄인지 지름길인지 죽자 살자 덤볐지만 결국은 상처투성이로 코피가 터져 슬며시 동아줄을 놓고 물러선 그 악몽 같은 세월동안 단 한 줄의 시도, 수필도, 하다 못 해 낙서 한 줄 떠올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글이 되는 것일까? 예술가, 아니 아직 그 까지는 아니더라도 단지 시 한 줄 떠올리는 창작정신도 현실세계

방재안전과장이 되고 처음으로 일다운 일을 만나서 모처럼 잠깐 의욕에 충만했지만 예고 없는 지진은 결국 아무 예고도 없이 다시는 기척이 없어 하고지비 열찬씨가 더 이상 기획이고 업무보고고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너무 싱겁게 끝났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천지가 뒤죽박죽이 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며 다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니 오전부터 순찰을 명분으로 여기저기 관내를 돌아다니기를 즐겼다. 전처럼 충무동로터리에서 해안시장을 거쳐 자갈치시장을 지나 영도다리까지 돌아 광복로를 건너 용두산공원에 올라

“청장님! 리히터지진계 강도 4.3의 지진입니다. 거제도 동쪽 앞바다가 진앙(震央)지로 발표되었는데 아직 관내에 피해보고는 없었습니다.”“알았다. 내 지금 나가께.”“아닙니다. 경보발령이나 사태발전을 봐서 제가 연락드리지요.” 하고 방금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는 서정미씨에게 “서여사, 인터넷에 지진발생시 행동요령 좀 알아보게.” 하고 비로소 숨을 돌렸다. 이어 직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가 반쯤이나 찼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신해기 총무과장의 전화가 와서“가과장, 수고 많지요? 관내에 큰 피해는 없고요?”“인명피해나 주택붕괴 등 구

승부역 박홍재 골짜기 산길 따라 영동선 외진 동네이따금 잊을까 봐 기적 소리 남기는 곳하늘도 세 평뿐이요 꽃밭도 세평인 역할머니 굽은 등을 빼닮은 철길 위로행여나 녹이 슬까 지나가는 협곡 열차도보꾼 발걸음 소리 막걸리병 줄 섰다아직도 산골 냄새 진득하게 묻어 있는가져온 보따리 속 고랭지 먹거리들도시인 뼛속 독기를 걸쭉하게 뽑아준다- 2022년 세종도서 선정 시조집 《바람의 여백》에서승부역은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길에 있는 하늘도 세 평뿐이요 꽃밭도 세평인 아주 작은 역이다.외진 곳이라 사람도 열차도 드물게 지나간다.전

“그럼 됐어요. 아예 그런 일이 있다고 말도 하지 말고 저들끼리 자연스럽게 소비하게.” 하고는 계장까지 불러 모처럼 도로, 준설을 포함한 스무네 명의 건설인부와 도로관리계 직원들의 회식이나 한 번 하자고 하고 이튿날 업무추진비로 준비를 시키고 열찬씨가 따로 소주 한 상자를 사서 꽃마을입구에 있는 적치물건보관소에 부설된 건설종사원 휴게실에서 삼겹살파티를 열었다. 그렇게 한 달이나 지났을 때였다. 퇴근 후 오랜만에 입항한 사촌처남 남근씨랑 제주도 곰장어집에서 소주 네 병과 밥 한 공기를 볶아 저녁을 먹고“매제, 부산의 대표음식이 뭘까?

다음은 재난지원계장인데 원래 토목직 6급이 와야 하나 아직 충원이 안 되어 어느 부서장도 환영을 안 하는 여자 6급, 바로 세무과 세외수입계장을 함께 지낸 조명순계장이 발령받은 것이었다. 참여정부의 화두인 를 실현하는 재난 관리에 기술성은 물론 업무에 대한 열정이 전혀 없는 또 하나의 자유로운 영혼이 배치되었으니 전도가 암담한 것은 물론 업무전체를 과장인 열찬씨자신이 곱다시 챙겨야할 판이었다. 그런 속도 모르고 “과장님! 또 만났네요. 나는 신설부서고 나발이고 과장님하고 또 만나는 것이 너무나 좋아 미치

“에이. 걱정 접고 술이나 한 잔씩 더 하세. 내 이래도 신설부서보다 더 한 폐지부서, 중구 민방위과가 폐지되어 보직 없이 1주일을 다 안 지냈나?” 하며 술잔을 드는데 휴대폰을 받던 경리계장이 “뭐? 5월 1일자로. 5급부터 기능직까지. 그래 우리 과에서는?” 아마도 인사발령사항이 연락 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장님, 방재안전과장으로 발령났답니다.” 하더니 “축하하요.” 하용주 계장과 악수를 했다. 동장발령이 난 모양이었다. 언양사투리에 라는 말이 있는데 뭐 서울의 표준말로는 이라고 한다나. 아무튼 생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두 지방지에 구덕수목원을 개장한다는 기사가 나기 시작하고 3개의 지상파방송국의 부산뉴스시간에도 부산의 도시화와 신문화를 이끌어온 전통의 시가지 서구의 대신동 꽃마을의 아늑한 숲속에 교육역사관, 민속생활관, 다목적전시관을 갖춘 문화, 예술과 전통의 향기가 가득한 힐링의 공간이 들어선다는 보도와 함께 수목원의 전경과 평면도 교육사료관, 민속생활관의 전시품과 함께 현장을 지휘하는 김영호구청장의 모습이 나오고 서구, 사하구의 케이블방송인 SCN에서도 단 한 명뿐인 아나운서와 PD가 총동원되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대담프

구청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 현장을 확인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바늘구멍만한 틈도 안 생기게 수목원을 챙기자 늘 해바라기처럼 태양 같은 구청장만 바라보는 박용배 계장이 청장이 오고가는 것을 귀신같이 알며 대비를 하며 늘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한 하루가 지나갔다. 거기다 새로 총무국장이 된 하석우 국장도 구청장의 신임을 얻기 위해 과장, 계장 다 젖히고 저 먼저 지시를 받고 보고를 하는 바람에 구덕수목원에 관한한 담당과장 열찬씨는 그저 소 닭 쳐다보는 듯 하는 방관자일 뿐이었다. 이제 구청장도 더 이상 수목원에서 열찬씨를 찾거나 옆에 있

다정한 무관심 김영주 실밥을 뜯기 위해 벼린 칼을 쓰진 않는다적당히 둔감해야 옷감을 피해가듯가끔은보고도 못 본 척무딘 칼이 고맙다‘실밥을 뜯기 위해 벼린 칼을 쓰진 않는다’는군요. 그렇다면 ‘벼린 칼’을 쓰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옷감까지 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칼이 ‘적당히 둔감해야 옷감을 피해’간다고 노래합니다. 부부 사이든 부모 자식 사이든 아니면 친구 사이든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날카롭게 지적하기보다는 서로의 잘못을 ‘보고도 못 본 척’ 넘어갈 줄 알아야 그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된다는 거죠. 요즘 이런저런

기다려지는 꽃 석정희 언제부터 널 기다리게 되었는지 몰라낯선 땅에서 처음 만나 이름도 모르고마음에 들지도 않아 외면했던 널강산이 설흔번 바뀌어마음도 세월을 따라 물들었나철이 바뀌면 먼저 널 기다리게 되는도심 한길을 벗어난 골목길에보라빛으로 무성하게 피어집 앞앞이 서서 어울려꽃잎 사이로 달빛을 쏟아내는 널언제부터 기다리게 되었는지 몰라보라빛으로 길을 내는 자카란다여. ◇ 석정희 시인은▷Skokie Creative Writer Association 영시 등단▷‘창조문학’ 시 등단 ▷미주시문학 백일장에서 "장원" ▷재미시협부회장, 편집국

이번에는 옥상계단의 반대편 아무도 다니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담 밑으로 뒤란을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모퉁이에 커다란 부엌칼이 하나 버려져 녹 쓸어 가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낫과 호미, 부러진 갈퀴의 철사부분, 이미 농촌에서 사라진지 수십 년도 더 된 나락을 훑는 커다란 홀께도 하나 나뒹굴고 마지막엔 농기구를 보관하던 함이 넘어지기라도 한 모양으로 삽과 됑이, 도끼와 대패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하도 아무지고 인색해 짜디짠 왕소금이나 쓰디쓴 약봉지보다도 더 독한 가죽꼴기라고 불리던 키 작은 한 농부의 유품이 이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바람의 대화 박미서 모래알 하나로 진주를 만드는 바다의 벗이 말했다.한 줄 현 위에서 머금다가 부르다가끌어올린 물소리의검은머리물떼새가일주일 내내 울면,물뭍짐승들은 천연의 일상을교란시키고, 뭉그러뜨리는 모리배들 있는 땅을 찾아 달려갑니다.피할 수 없는 꿀벌의 연인들은 토양의 화난 모성을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자신의 날카로운 바람주머니,불가사리 모양으로덩달아 홀쭉해지고요.이미 희생의 불에서 기쁨이 나올 때처럼 옛 물과 흙의 끈끈한 본래 마음뿐인데생각의 길눈 밝은 새가감수성 깊은 바다의 요람을 운무로 떼지어 흔들어댑니다.당신이 이겨내고자

우렁찬 선창에 금찬씨가 합창하고 마지막엔 열찬씨도 가세해 근근이 한 곡이 넘어갔는데“자, 이번에는 503절 입니다.”하고는 기어이날 빛 보다도 더 밝은 천당믿는 맘 가지고 보겠네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우리 주 예비해두셨네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가 만나리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기어이 완주를 하고 주기도문까지 외우고서야 끝이 났는데열찬씨가“누님, 요단강건너서 만나리는 좀 아니지. 그건 장례식 때 부르는 찬송인데 아직 큰누님이 눈이 시퍼렇게 살았는데 말이요?”“마 저 정도 아프면 죽은 기나 똑 같다. 산에 누우나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