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무겁고 피곤하다고?아마 비가 안 왔으면 낙동강변 옆 경작지 길로 쭈욱 부산까지 갔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지요.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날씨는 쨍쨍했는데 막판에 와서 비를 만났습니다. 비만 왔어도 괜찮았지요. 이 드넓은 경작지에서 걷는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리면 꼭 저한테 벼락이 떨어질 것 같아서 간담이 서늘했지요. 그래서 어서 낙동강변 땅을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리고 비가 멎을 때까지, 아니 번개가 멎을 때까지 번개를 피할 공간에서 좀 쉬었다 가야하겠다고 생각해

한강처럼 정비한다고?산으로 뺑뺑 돌아가면서 걷다가, 빨리 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졸렬하게 열차길로 직진으로 걷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한 일을 겪고, 마침내는 더 밑으로 내려와 낙동강 옆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알 수 있듯이, 열차길과 낙동강 사이에는 논밭 등의 경작지가 많지요. 이곳에 달과 별 때문인지, 아니면 멀리서 오는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하지는 않았지요. 그렇게 제가 걷던 밤길을 이렇게 찍었지요.처음 이 땅에 들어설 때, 길이 없으면 어떻게 할지 걱정했지요. 그러나 길이 없을 수

앞만 보고 간다고?삼랑진에서 하루 묵었어야 했는데, 찜질방도 없고 해서, 늦었지만 좀 더 걷기로 했지요. 그때 욕심이 생기더군요.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걸어갈 수 있을까? 이제 목적지에 다 와 가니까 그런 욕심이 더했지요. 산으로 뺑뺑 돌아 걷는 것보다 철로를 따라 직진으로 걸으면 훨씬 더 용이하다 싶었지요. 급기야 철길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그때 새삼 알았습니다. 이 경부선 철로의 교통량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밤인데도 철로가 쉴 틈없이 기차가 빈번하게 다니더군요. 기차가 지나갈 때면 땅에 바짝 엎드렸습니

기술이 더 발달한다고?서울에서 부산까지 열차를 타고 갈 때, 사진 속의 장면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제 다 왔구나!”라고 여겨지니까요. 그런데 저는 걸어가면서 이 장면을 보았지요.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기찻길은 제 발밑에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열차를 타고 수백번 이 열차길을 다녔을 겁니다. 그런데 열차길 옆의 산 위에 이런 길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지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며 기찻길을 보니 감회가 남다릅니다.열차인 기차란 인류사에서 산업화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17세기 이

삼랑진까지 12km라고?하루에 백리 길을 걸어, 지금까지 천리 길을 걸어 오니 이제 걷는 것에 구력이 붙었습니다. 도가 통했다고나 할까요? 이런 안내판이 나오면 얼마나 걸으면 되겠다는 가늠이 대충 됩니다. 우리 조상들이 왜 십리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더군요. 편한 걸음으로 걸으면 4km를 한 시간에 걷게 되니까 십리가 된 게 아닐까요? 삼랑진까지 삼십리인 12km니까 앞으로 슬슬 편하게 걸으면 세 시간 남짓이고, 총총 빠르게 걸으면 두 시간 정도 걸리지요. 십리, 이십리, 삼십리… 이런 대충의 계산을 옛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했을

꿈의 신소재를 만든다고?밀양루에서 푹 쉬고 나와 이렇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시간이 오후 6시를 넘어 이미 이 고풍스러운 유적지의 출입시간이 지날 때라 안에 사람이 없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밀양루 위에서 자연 선풍기 바람을 즐기는 사람이 꽤 많았었지요. 이 밀양루는 논개로 유명한 진주의 촉석루, 그리고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루(樓)였다고 하지요.지금으로부터 650여 년 전 고려말 공민왕 때 처음 만들어진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조선말 헌종 때 다시 지어진 것이라지요. 어이없었던 남대문 화재 때도 여실히

지난 3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 정서로 38-1 소재 정암(亭巖) 이형규(李亨圭·90) 선생님 댁에서 현판식이 열렸다. 현판은 2개였다. 아흔 아홉 칸 집의 본채 건물에 걸린 당호는 ‘은한당(隱閒堂)’이고, 아래채의 차 마시는 공간은 ‘풍엄재(風俺齋)’이다.이 집은 대지 500여 평에 현재 기와 건물로는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 천장의 마룻대(上樑·상량)에 적힌 상량문을 보면 1926년에 지어진 건물로 아래채와 대문 등은 다른 곳으로 팔려나갔다. 원래 이 집의 주인이 건축비로 너무 많은 비용을 들인 탓에 경제적으로 힘들어 본채 외의 다

머릿속을 규명하겠다고?밀양에는 영남루가 있습니다. 제가 밀양 박씨라서 재미 삼아 겨울에 이 영남루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이 영남루가 이다지도 삼삼한 줄 몰랐습니다. 앞에 강이 흐르고 전망이 좋은 큰 정자였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여름에 오니 이 영남루가 실속 있는 보물이더군요. 영남루는 그 자체가 자연 선풍기였습니다. 강바람이 솔솔솔… 그 바람에 취해 요 반들거리는 나무 바닥에 누워 잠시 낮잠을 자다 깨니 이렇게 몽롱한 상태가 되었습니다.이런 몽롱한 상태로 저 자신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을 뒤돌아 생각했지요. 사

힘이 세서 건강하다고?제 옆의 분은 대구에서부터 밀양까지 1박2일 동안 저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가마뫼미래마당’이라는 부산의 세미나 모임에서 뵈었는데, 그 때 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갈 계획을 언뜻 말했더니, 대구에 오면 꼭 전화하라고 하셨지요. 같이 걷고 싶으시다며… 대구에 도착한 저는 약속도 지키고 안부차 전화 드렸지요. 마치 어린 소녀처럼 설레는 모습으로 나오시더군요. 저희는 청도역 앞 벤취에서 함께 노숙을 하고, 청도 복숭아도 얻어 먹고, 밀양강에서 물놀이도 하고, 이렇게 밀양에 도착해 점심을 먹으며 헤어지기 전에 기념

불놀이를 즐긴다고?밀양에 들어서기 전에 밀양강이 있더군요. 많은 가족들이 물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있었습니다. 저는 물에 들어가 놀고난 후, 헹군 옷을 입은 채 말리고 있는 중이지요.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만 물 옆이라 그런지, 더군다나 어린 아이들 옆이라 그런지 편안합니다.아마 저는 물놀이를 즐기면서 제 몸 속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었을 듯합니다. 이를 부교감신경에서 나오는 아세틸콜린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나오면 동공이 작아지고 심장박동이 늦춰지고 혈관도 확장되어 혈압이 내려 갑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위험이나 공

이성적으로 생각한다고?경상남도의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저 산만 지나면 제발 이날 묵을 밀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햇볕은 쨍쨍하게 이글거리며 이름 모를 여름꽃들은 무심히도 아름답습니다. 이따금 쌩쌩 달리는 차들이 위협을 합니다. 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을까요?솔직히 말씀드리면, 걷는 철학자라지만 이 판에 뭔 대단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냥 발길 가는 대로 자동적으로 걸을 뿐이지요. 전날 청도역 앞에서 밤늦게 추어탕을 먹고, 곧바로 벤치에서 노숙을 했었기에, 그리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기에 몸도 무겁습니

청도는 늘 맑을 거라고?서울에는 강남구 신사동(新沙洞)이 있고, 은평구 신사동(新寺洞)이 있지요. 발음은 같아도 한자는 다르지요. 그런데 경상도에는 한자마저도 똑같은 지역이 있습니다. 청도(淸道)입니다. 제가 지난 곳은 경남의 밀양시에 속한 청도면이 아니라 경북의 청도군입니다. 예전에 버스 타고 청도군을 가려다 청도면을 간 적이 있지요. 淸道! 참 멋진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서 기품이 흐릅니다. 그런데 제가 걷기 전에 갔었던 청도는 그야말로 환상이었습니다. 쟁반처럼 넙적하게 생긴 청도 반시(盤(柿)가 열리는 가을에 가보세요. 그야말

빨리 가서 좋다고?또다시 걷기 힘든 길이 이어집니다. 표지판을 보니 왼쪽으로 가면 팔조령이고, 직진하면 청도라고 합니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더 가면 터널이 있을 듯합니다. 예전에 터널이 없었을 때에는 필히 팔조령을 넘어 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오면서 이화령을 넘던 게 생각나더군요. 그 때에는 터널이 뜷린 국도가 아니라 이화령을 넘었는데, 이제는 팔조령이 아니라 새로 생긴 국도를 통해 터널을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더 빠르게 청도까지 가겠지요. 터널을 걸어 지나갈 때의 지독한 불쾌감만 조금 감수한다면야 훨씬 좋겠지요.제가

저리로 가면 주리라고?저 평범한 길 안내판을 왜 찍었을까요? 저에게는 특별한 안내판이기 때문이었지요. 제 딸 이름이 ‘주리’라서요. 영어로도 똑같네요. 제 딸이 여고생 때 'Juri'라고 하길래 너무 재미없으니까 'Joolee'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맘에 안 들었는지 아빠 말을 안듣고 기어코 'Juri'라고 하더군요. 아빠 말을 안 들었어도 제 딸 주리는 귀엽고 예쁩니다. 성격이고 모습이고 저를 꼭 빼닮았습니다. 저는 제 딸을 ‘주리’라고 부르기보다 ‘박쭈’라고 장난스럽게 부르는

그까짓 골짜기라고?원 세상에!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닐까요? 수성못에서 조금 걸으니 이 계곡이 나왔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깊은 산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고 대도시에, 그것도 차가 다니며, 수십만 명이 사는 바로 옆에 이런 삼삼한 물놀이터가 있다니! 그것도 시원한 다리 밑에! 그야말로 천혜의 피서지이더군요. 물도 제법 맑아 보였지요. 이 동네 사람들은 어디 먼데 놀러 안 가도 되겠구나 싶었지요. 생각 같아서는 저도 저 계곡에 풍덩 들어가 저 얼라들처럼 놀고 싶었지만 그냥 발길을 앞으로 돌렸습니다. 아쉽지만 계곡(溪谷)의 철학을 생각하

객기를 부린다고?왼쪽 놈은 제가 사는 동네 아저씨가 키우던 녀석이고, 오른쪽 놈은 대구 부근을 걷다가 만난 녀석입니다. 이 두 놈은 성격이 너무나도 달랐지요. 왼쪽 놈은 제가 먹을 것도 가져다 주고, 말도 걸며 이마와 턱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지요. 그러나 저를 보면 늘 이런 시큰둥한 모습입니다. 도무지 인사성이 하나도 없는 놈이였지요. 성질은 아주 못돼 술취한 동네 할아버지 코를 물어서 김해의 어느 농장으로 넘겨졌지요. 이 녀석의 팔자가 어떨지? 그런데 오른쪽 놈은 지가 저를 언제 보았다고, 반갑다며 저렇게 좋다고 꼬리를 흔듭니다.

떡볶이만 먹었다고? 우리나라 지명에는 ○산, ○주, ○평 등이 많지요. 이렇게 뻔하지 않은 가장 아름다운 지명은 무엇일까요? 저는 전남의 ‘여수’가 아닐까 합니다. 여수(麗水)! 아름다운 물이란 뜻이지요. 그럼 가장 전원스러운 느낌을 주는 지명은 무엇일까요? 사진 속의 제가 지나고 있는 칠곡이 아닐까 합니다. 칠곡(七谷)! 7개 골짜기라는 뜻이겠지요. 제대로 시골(村)스러워 포근한 느낌을 줄 것 같지 않나요? 그러나 구미를 지나 만난 칠곡은 행정구역상 아직 시(市)는 아닌 군(郡)이지만 시에 가까운 커다란 도시였지요. 7개의 골짜기

징그럽기만 하다고? 위 사진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쥐’ 하면 생각나는 것은 징그러움입니다. 그런데 길을 걷다 만난 이 죽은 새끼 쥐는 징그럽다기보다 가여웠지요. 저에게는 쥐 새끼가 아니라 새끼 쥐로 보여졌지요. 쥐 새끼와 새끼 쥐는 어감상 완전히 다릅니다. 가령 개새끼는 욕이지만 새끼 개는 귀여운 개의 어린 새끼이지요. 로드킬도 아니고 이 가여운 새끼 쥐는 왜 길에서 이렇게 애처롭게 죽어갔을까요? 감긴 눈에서 나오는 저 불쌍한 눈빛을 보세요.쥐는 뱀과 막상막하한 혐오 동물입니다. 그러나 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동

물은 단지 물이라고?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 비행기를 타면 그 무거운 비행기가 뜬다는 것이 참말로 신기합니다. TV, 핸드폰, 컴퓨터, 인터넷도 참 신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조물보다 훨씬 더 신기한 것이 있지요. 바로 물입니다. 비도, 폭포도, 계곡물도, 강도, 바다도 모두 신기합니다. 물은 가장 평범하면서 세상에서 신기하기도 하고, 또한 가장 맛없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기도 합니다. 지극히 목마를 때 시원한 물처럼 맛있는 건 없지요.그런데 물은 신기함과 맛있음을 넘어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기도 합니다. 노자도덕

옆 길로 외도 했다고? 제가 걸었던 길을 네 글자로 요약하면 4ㄱ입니다. 우연하게도 4개의 글자가 모두 ㅏ 모음에 ㄱ 받침으로 끝나네요. 제가 지금까지 여러 번 썼던 단어들이지요. 삭막각박! 삭(索)이란 새끼줄처럼 쓸쓸하다는 뜻이지요. 막(漠)이란 사막처럼 메마르다는 뜻이지요. 각(刻)이란 나무를 깎을 때처럼 매몰차다는 뜻이지요. 박(薄)이란 두껍지 않고 얇아 척박하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쓸쓸하고 메마르고 매몰차며 척박한 행진을 했었지요. 여유를 가지며 이리저리 둘러보는 여행(travel)이라면 그 반대로 즐겁고 촉촉하고 다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