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의 속내 정상미 매끄러운 걸음은 곡조가 없어서섬세한 보폭으로 감정을 싣는다 발끝은 이내 토라져 흑심을 들킨다 종이의 속내를 알고 가는 걸음은 글씨도 살이 쪄 마음이 짙어진다 아픈 데 꾹꾹 눌러줘 종이를 위로한다 네 살결 애무하며 나를 써 나갈 때 내가 뾰족하면 네가 울지도 몰라날마다 흑심을 버려 나를 깎고 네게 간다오늘 소개드릴 작품은 동음이의어의 맛을 잘 살린, 정상미 시인의 사설시조 「연필의 속내」입니다. ‘음흉하고 부정한 욕심이 많은 마음’이 흑심(黑心)인데 시인은 ‘연필의 속내’를 흑심으로 읽고 있군요. 연필이 종이에게

우선 장남 노경씨는 자기는 달동네에 하꼬방이나 슬레이트 집을 짓고 아내는 양정시장에서 생선을 팔며 아이들 챙기는 일을 노모에게 맡겼는데 큰 딸 태희씨를 제외한 다섯 아들은 도무지 공부에 관심이 없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며 엉뚱한 짓을 하거나 싸움을 벌여 간간히 파출소로 가서 아이들을 찾아오는 일이 생기더니 마침내 한 아이는 행방불명이 되어 몇 년 만에 돌아오는 것을 비롯해 위의 세 아들들이 도무지 공부를 하려들지 않았다. 쌀장사로 꽤 돈을 번 차남도 형편은 비슷했다. 소호에서 낳아 업고 온 큰 딸은 진작 시집을 보내 염색공장

이제 그만 울자 석정희 손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을들풀도 서로 떨어져 있어도목대로 어울려 서 있는 것을우리는 알게 되었다네가 물이라면 나는 구름이고내가 물이 되면 너는 구름 되어그 끈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을세상풍파가 갈라놓은 물과 구름세월이 되어 이어져 온 것을그러니 이제는 그만 울고잡은 손 놓지 말고 가며청산도 감아 흐르고굽어보기도 하며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잡은 손 놓지 말고 한길을 가자 ◇ 석정희 시인▷Skokie Creative Writer Association 영시 등단▷‘창조문학’ 시 등단 ▷미주시문학 백일장에서 "장원

오늘 안내를 맡은 저는 혼주의 사위, 즉 슬비신랑 김도연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내용은 1호차와 동일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오늘의 결혼식참석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를 오가는 강행군이 되겠습니다.또 하객도 관광버스 2대 봉고차 1대를 비롯해서 100명에 가까운 대규모입니다.따라서 승객 한분, 한분의 협조와 질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두 장의 안내문을 읽어보고“참 자세하게 잘 썼네. 말수가 적은 우리 김서방이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요거 보고 읽으면 딱 되겠네. 당신은

다랑쉬오름 박홍재 바람 안개 불 때마다 들릴 듯 보일 듯이얼굴을 가린 채로 다소곳이 앉은 거기여몄던 치맛자락을 펼쳐 보인 저 맵시가르마 반지라운 물빛 띤 초록 항라옴팡진 가슴팍에 품은 하늘 오롯하다봉긋이 한몫한 맵시 설움 감춘 꽃자리몸 낮춘 마음가짐 무던히도 출렁인다제주 땅 깊은 한숨 품어 안은 행간마다해녀들 잘록 허리에 칭칭 감아 감췄다- 2022년 세종도서 선정 시조집『바람의 여백』에서 가을이면 오름마다 억새가 핀다.제주에서 일어나는 사사건건이 오름과 꽃이다.아픔도 아름다움도 다 찾을 수 있는 곳이다.제주 오름이 3

“상미야, 울어도 시집은 가야 된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튼 날을 받았으니 걱정 말고 시집은 오너라. 집안을 일으킨다는 것은 매사에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자연 이루어질 수 있고 아이를 많이 낳는 것도 살다보면 그럭저럭 이루어지는데 그건 오로지 삼신할머니가 복을 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법이니 그 역시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난 너를 단순한 며느리가 아닌 내 둘째 딸로 생각하며 사랑할 것이다.” 했는데 그 둘째 딸이라는 말이 너무 가슴에 닿는다며 그 애가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리더라는 것이었다. 아들 장가보내기자금소요

겨울바다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미지(未知)의 새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그대 생각을 했건만도매운 해풍에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나를 가르치는 건언제나 시간....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남은 날은적지만기도를 끝낸 다음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소서남은 날은 적지만.....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인고(忍苦)의 물이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김남조의 시 〈겨울바다〉를 읽었다. 《김남조 시전집》, 서문당. 1991.김남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한동안 먹먹했다. 김남조

사성과 혼수물목, 혼인요청서를 보내니 그 쪽에서도 멋들어진 붓글씨로 택일을 하여 보내왔다. 정석이 편으로 들으니 바깥사돈 될 이가 열찬씨의 사주단자를 보고 깜짝 놀라 경찰서과장으로 있는 처남과 상의해 서예학원에 가서 써온 것이라고 했다. 5월 초로 잡은 결혼날짜는 마치 남도의 벚꽃이 추풍령을 넘어 서울을 향해 북상하듯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고 한가한 시간의 열찬씨는 이제 한 달만 있으면 그렇게 열망하던 며느리를 본다, 내 인생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하고 나는 조용한 휴식과 고요한 노후를 보내면 된다며 조금씩 다가오는 날짜를 은근히

그런데 어느 날 마침한 아가씨가 있다는 아들의 전화가 왔으니 아니 이게 웬 일이냐, 자는 입에 떡이 떨어진다더니 이게 웬 횡재냐며 묻자 아들은 좌우지간 와보시면 안다면서 다음 토요일 서울로 오시면 인사를 시켜드린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영순씨가 아니었다. 주말이 되기 전에 저녁마다 ‘야야,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꼭 한 가지만-’을 반복하며 알아낸 바로는 상대방이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내커플이며 놀랍게도 아직 스물두 살의 나이어린 처녀라는 것이었다.아니, 전에 사귀던 명문대를 나와 어학연수를 마치고 좋은

달빛 기차 서 금 복 “동네 한 바퀴 돌자.”할아버지 말씀에 동생들은캄캄해서 무섭다고 했어요할아버지-나-동생-아빠-사촌 동생-큰아빠손에 손잡고 출발!“앞 사람 손을 꼭 잡아라.”길옆 개울이 따라오며 말했어요.“뒤사람 손도 꼭 잡아라.”풀벌레 소리도 따라오며 말했어요.동네 한 바퀴 다 돌고할아버지 집에 도착했어요말없이 함께 돌던추석 달빛 기차도 멈췄어요동생들이 손을 탁탁 치며 큰소리쳤어요“하나도 안 무섭네” - 『시와 소금』, 2022년 가을호 “동네 한 바퀴 돌자.” 할아버지는 동네를 한 바퀴 돌자는 제안을 하셨다. 자신이 사는 동

외숙모일행을 만나고 흔쾌한 마음으로 돌아오자 영순씨가 “외숙모님 잘 대접했능교?”“그래. 당신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건데.”“그 기 어데 맘데로 되능교? 영서가 유치원서 오면 씻기고 저녁먹이고 해야지요.”“안 그래도 그래 이야기했다.”“외숙모는 좀 어떻덩교? 남편 돌아가시면 우울증 온다 카던데. 안 그래도 남편 하나만 믿고 일본에서 따라와서 아무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 수십 년씩 우울증을 알았다는 분이...”“그럭저럭 견딘다고 하더라. 아들딸과 가족들이 있으니까. 그 보다 자네 외삼촌 돌아가셨다 카이 섭섭하나? 아니면 속이 시원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석정희 가을 숲은 눈물마저 말라버린슬픔 같이 쓸쓸하다작은 새 한 마리 숨을 자리 없이벗어버린 나무들 사이로찢겨져 비치던 그림자지워져 바람까지 잠들면큰 산도 아득해지는 어둠 속에누군가를 찾는 끝에흔들리며 잘려 나가떨어지던 가지잡으려는 손 머리를 때린다하필이면 가을이었을까꽃 진 자리에 상처로 아문열매를 달고따뜻하던 봄날에 듣던 합주독주로 바뀐 가을 하늘 바탕에붉게 여무는 가을 남기고 간 사람. ◇ 석정희 시인▷Skokie Creative Writer Association 영시 등단▷‘창조문학’ 시 등단 ▷미주시문

가까워지기 하정철 그대 마음 한구석에 풍경 하나 걸어두면바람 부는 날마다 창밖을 내다볼까다시 또 만나는 날엔두 손 덥석 잡을까 내가 바람이 되어 ‘그대 마음 한구석에’ 걸어둔 풍경을 흔들면 풍경을 단 그대는 ‘바람 부는 날마다 창밖을 내다볼까’요? 그립고 그리운 그대여! 우리 ‘다시 또 만나는 날엔/두 손 덥석 잡을’ 수 있을까요? 그대와 ‘가까워지기’를 소망했던 화자의 바람이 ‘바람과 풍경’의 관계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와 닿습니다. ◇ 손증호 시인▷2002년 시조문학 신인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부산시조 작품상, 성파시조

사진을 받아 쥔 열찬씨가 살펴보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햇살이 눈부신 뉴욕의 어떤 묘역에 사람들이 비잉 둘러서고 가운데 꽃으로 뒤덮인 관이 놓여있었다. 그곳의 풍습은 관의 절반은 밖에서 훤히 보이는 유리로 덮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평화롭게 누운 얼굴을 보는 순간 “...!” 열찬씨의 숨이 딱 멎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왜 여기 누웠지? 외삼촌과 내가 그렇게 닮았던가?” 한참 만에 혼잣말을 하는데 “아니 서구청입구에서 현관을 나오는 처남을 멀리서 봐도 금방 알겠더라고요. 장인어른이랑 증명사진이야. 아주.”박 서방이 나섰다.

“이렇게 반가울 일이 있나? 내 이 녀석과 남창에서 같이 자며 토론할 때 나중에 제법 한 가닥 할 줄 알았지. 그런데 그날 이 녀석이 워낙 몸부림을 심하게 쳐서 내가 아주 혼쭐이 났지.”하면서 너무나 흔쾌한 표정을 짓던 일이 생각났다. 아, 그 미완의 혁명가, 마치 동학란의 녹두장군처럼 상북면 명촌리, 눈을 뜨면 그저 새소리나 들릴 뿐이라는 그 산골마을에서 단연 공부 잘 하고 야망이 큰 소년으로 자라 일본으로 밀항까지 감행해 지식인들 사이에 사회주의사상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동경의 유학생이 되고 해방된 조국의 엘리트 공학도로 산업일

외할머니 생각 박홍재 화려한 도시 건물 뒷골목 들어서면허리 굽은 가게들을 허름한 모습에서삐거덕 열어젖히면 잠깐 스쳐 보인다한 그릇 보리밥을 시키고 앉아 보니벽에는 삶의 이력 여기저기 붙어있고어릴 때 오래전 기억 외갓집에 와있다뒤주간 팍팍 끓여 굵은 멸치 몇 개 넣어밥도 아닌 죽도 아닌 희멀건 한 그릇에아직도 최고의 맛은 외할머니 손맛이다 - 2022년 세종도서 선정 시조집 『바람의 여백』에서문득 기시감처럼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특히 명절 전후에는 추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외갓집은 시골이지만, 도시 뒷골목에서 만날 수

이후 지하철에서 시청이나 타구청의 동료를 만나도 “아이구, 국장님. 편지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 편지는 언제 부칩니까?”“우리 이형 글을 읽으면 왜 자꾸 소주한잔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자주 올려주세요.” 해서 매주 월요일에 한 건씩 띄워 각각 3,500건의 조회 수를 넘었다. 그런 하루 “이형, 왜 이번 주에는 편지를 안부치요?” 건축과장으로 있다 사상구로 전출 간 박치근 과장이 전화가 와 “우리 가형 편지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일주일을 기다리는데 요번 주에는 왜 안 부칩니까? 우리 오판수국장님도 목이 빠집

고드름 전선용 고드름을 생각하다가 베드로라고 쓴다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그는외골수,땅을 지향한 죽음고드름 같은 몇 번의 죄가 문신이 되어하늘에 새겨졌기 때문이다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영혼을 위해잡아도 잡히지 않는 박해를 위해고드름도 피땀을 흘린다는 사실물구나무 선 채 죽어간 그가저녁 무렵 소름으로 자라 내 피부에 자랐다거꾸로 매달린다는 것과뒤집어야 바로 보이는 것들시체 같은 겨울,고드름은 흔적 없이 사라질 우리의사자 굴이다전선용 시집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를 읽었다. ‘생명과문학’ 2023.정의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는 동전의 양면처럼

그래서 되도록 전체의 길이를 짧게 하고 쉽고 자연친화적이며 좀은 감성적인 수필 7,8개를 골라 편지글 형태로 문체를 바꾸고 자신의 퇴직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라는 제목으로 자유게시판에 올리기로 했다. 그 첫 번째는 라는 제목으로 여러해살이풀들이 혹한을 이겨내려 마치 장미꽃(Rose>처럼 동그랗게 뭉쳐 가장 낮은 자세로 바짝 엎드려 바람을 피하고 가장 넓은 품으로 햇빛을 흡수하며 새봄을 기다리는 로제타의 기다림과 꿈을 이야기한 것으로 사회적으로는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취업난, 인구감소,

그러나 이젠 그에겐 이 겨울과 봄이 지나가면 이 바닥, 공무원이라는 자리에서 더 이상의 겨울이나 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예감해야만 했다. 물론 생년월일로는 법정 공로연수에 들어가는 이듬해 6월말까지 재직할 수 있지만 구청직원이 갈수 있는 마지막의 보직인 총무국장으로서는 후진들을 생각하여 얼마간의 잔여기간을 남기고 명예퇴직을 하는 것이 관례라 절대로 내년 봄을 기약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갈 데 까지 간 사람, 정상에 이른 사람은 물러서는 일 밖에 남지 않는 법, 후진을 위하여, 조직을 위하여 굳이 누군가가 용퇴를 강요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