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장님, 종현입니다. 많이 섭섭지요? 우리 초가집 멤버 독수리 오형제가 위로하려고 갔는데 퇴근하고 없데요. 거기 어뎁니까? 연산동이라고요. 잘 알겠습니다. 우리 독수리 5형제는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입니다. 실장님, 힘내세요. 충성!”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는 마실 기분도 아니라“니는 좀 더 놀고 올래. 내 술값은 미리 다 주께.”열찬씨가 가방을 찾자“아, 아입니더.”김주찬씨가 황급히 일어나 열찬씨를 부축하고 밖으로 나오자 판신씨가 부른 대리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 앞까지 따라온 주찬씨를 엘리베이터를 앞에서 억지로 돌려보내고

"형님아, 가자! 비 묻어온다."로구로 박사장이 말을 하기 바쁘게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갑자기 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면서 울면서 번쩍 번갯불이 밀양 천황산 방향에서 가지산방향으로 하늘을 찢어놓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신불재대피소로 뛰어 내려가면서 (아, 아버지, 아, 신불산.)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리는 열찬씨의 얼굴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7월 1일 조직개편을 앞둔 대대적 인사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금요일오후가 되자 퇴근시간에 맞추어 인사명령을 발표할지 아니면 다음 월요일로 넘

6월의 마지막 일요일 마침내 연산로터리산악회의 멤버는 신불산을 오르기로 했다. 신평에서 내려 가천의 꼬장산을 지나 건민목장 옆길로 신불재까지 오르는 것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찬물샘에서 약수를 한 바가지씩 마시고 "우리 오뎅하나씩 묵으까? 산에서 묵는 오뎅맛이 얼마나 기가 찬다고?" 열찬씨의 제의로 말은 신불재대피소지만 중년의 골수등산가 하나가 사철 기거하며 오뎅과 라면을 팔아 생활비를 조달하며 자유로운 영혼의 보금자리, 나지막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어이쿠!" 열찬씨가 이마를

하지夏至의 망원경 박미서 흰둥지 구름, 홀로 비 온 후촛불 망원경을별의 거울처럼 보여주네.그대의 바람이 저며드는 평행의 5도, 긴호흡의 화음들, 가지런히 품은가슴꼴무늬에 커져가면유전자 변형을 거친 듯한독소짓을 하는 두 개의 형체물러나 없고, 속빈 꼭두각시들도 굴러 사라지고 없네.하늘의 쪽배 내어주며확장된 지성의 촛점은부드러운 촛불 같이내일이 애틋한 통로에 들고무언가가 축복의 순간으로보살피고 있는,삼 분 전에 뿌린 만다라빛바싹 당겨 보네.그와 똑같은어제 본 파랑 나비들!◇박미서 시인은 ▷2019년 현대시선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

행복처방약(幸福處方藥) 지성찬 사랑은 아름다운 색(色)의 향기 나르면서얼룩진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지요사랑은 즐겁게 사는 행복(幸福)의 약(藥)이지요가슴이 터질 듯이 사랑은 뜨거워요눈에 뵈지 않아도 빛나는 보석이지요사랑은 만병(萬病)을 고치는 신기한 약(藥)이지요사랑은 나눌수록 점점 더 자라지요필요한 사람에게 값없이 주다 보면그 사랑 다시 살아서 내게 돌아오지요. 사랑이 무엇일까요? 지성찬 시인은 ‘사랑은 즐겁게 사는 행복(幸福)의 약(藥)’이라며 ‘나눌수록 점점 더 자라’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값없이 주다 보면’ ‘그 사랑 다시 살

비오는 밤 깨어 일어나 석정희 비오는 밤 깨어 일어나낙숫물 소리에 가슴 적시네구름이던 한 방울 한 방울흩어져 내려 또 물로 만나강으로 바다로 모여가는데길 떠나 강 건넌이 소식 없고불어난 강물 거리를 넓혀더 멀리 떼어 놓아 애만 타네어둠을 가고 있을 까빗속을 걷고 있을까떠난 사람 잊어야 할까깨어 기다려야 할까추스리는 마음에후두득 후드득 창을 때리는빗소리 가슴 때리네 ◇ 석정희 시인은▷Skokie Creative Writer Association 영시 등단▷‘창조문학’ 시 등단▷수상 : 한국농촌문학 특별대상, 대한민국문학대상, 독도문화

거수경례를 붙이며 돌아섰다. 사무실에 들어갈 마음도 나지 않아 길을 건너 자갈치시장으로 향해 무심코 위판 장에 들어가니 그날도 커다란 개복치 한 마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너부러져 있었다. 오만 감정이 다 북받친 열찬씨가 수첩을 열어 이제 별로 쓸 일도 없는 기회감사실장이 찍힌 자신의 명함을 꺼내 비뚤비뚤 시 한 편을 써나가기 시작했다.개복치를 보면서 그냥 호젓이 살고 싶어도세상이 고요를 허락치 않고느긋이 유유자적 잠이 들어도물물이 풍파가 안식을 깨네. 내 뉘랑 먹이를 다투거나헤엄이나 자맥질 맵시마저도단 한 번 뽐내거나 다툰 일 없어동

이튿날 잠이 깨자“지발하고 언간히 마시소. 그라다가 출근이나 하겠나?”전공과목 콩나물해장국을 끓여온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더니 이직도 울렁거리는 속에 습관적으로 국에 만 밥을 끌어넣는 열찬씨를 보며“그 뒷동산에 딱따구리는 다 무슨 소링교? 밤새도록 잠꼬대처럼 흥얼거리는데 내사 마 듣는 것만 해도 넘새시럽더라. 그 기 챙피한 일이지 무슨 자랑잉교? 지발하고 직장에서 술 묵고 그 노래하지 마이소.”단단히 오금을 걸었다. 실, 과, 동에 빠짐없이 회의실황이 중계되는 월요일 간부회의에서 김형호 구청장이“지난주에는 2년 만에 한 번 있는 큰

나팔꽃 박홍재 노인정 담벼락에 나팔꽃 벽을 타고창문 안 넘겨보며 귀 쫑긋 열어놓고할머니 수다 소리에 방긋방긋 웃는다합죽한 입술 속에 틀니들 신이 났다여기서 들은 얘기 저기선 짜 붙여서웃음꽃 달그락대며 유리 창문 흔든다이장님 마이크에 올리지는 못했지만소문은 소문인지 온 동네 소문 돌아나팔꽃 쑥스러워서 입을 살짝 봉한다- 2022년 세종 도서 선정 시조집 《바람의 여백》에서 노인정은 동네방네 뜬소문의 진원지이다.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 나팔꽃 피듯 피어난다.합죽한 할머니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조금씩 살이 붙어서 커다란 화젯거리

긴장도 풀 겸 토요일 오전을 내쳐 자는데 영순씨가“엔간히 된갑다. 그래 감사는 잘 받았능교?”“뭐, 그럭저럭. 김정효 계장의 덕분이지.”“그래요? 나중 모임 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네.”“참 당신은 오후에 뭐 할 끼고? 대변 바닷가로 바람이나 쐬러 갈까? 물 회나 곰장어로 저녁이나 먹고 오게.”“아임더. 나는 슬비한테 가 봐야지. 벌써 놓을 달이 되어 많이 힘들다 아이가?”“그래라. 나는 맥주나 두어 병 죽이고 내처 잘란다.”“그라든지.” 하고 이튿날 5잡이 모여 등산을 떠나는데 이번엔 집결지가 노포동터미널이 아닌 부산역대합실이

동백 홍일표 동백에는 울컥이라는 짐승이 산다백 년이 지나고다시 천년이 지나눈도 귀도 없이바닥엔 붉은 심장의 조각들허공의 단두대 아래덩어리째 나뒹구는 반역의 대가리들조문객 하나 없는 동백나무 상가에누가 붉은 조등을 내다 걸었나하나둘 불이 꺼지고제 죽음을 스스로 발아래 묻는,비문 하나 남기지 않은 허공의 벼랑 아래열 번 스무 번제 몸을 던져 장사 지내는울컥이라는 짐승동백나무 옆을 지나며 다연발 총소리를 듣는다탕, 탕, 탕 봄이 쓰러져 핏덩이로 뒹군다 늦은 밤 조등 하나 들고 일찍 당도한 미래를 조문하러 가는 저, 저이는 누구신가?홍일표

“그럼 선배 실장님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하자“식당은 어디로? 뭘 자시고 싶지요?”“아무러면 어때요? 그렇지만 굳이 선택하라면 바다에 가까운 만큼 복국이나 생태탕 뭐 이런 시원한 것 말입니다. 청장님 그러고 보니 제가 서구출신으로 생선요리마니아 아닙니까?”하여 복요리로 제법 이름이 난 미도복국으로 결정되어“가실장, 내일 점심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준비를 잘 하게. 우리 구에선 부구청장에 국장 셋이 배석하는 것으로 하고.”분위기 좋게 진행되고 있었다.5. 상처뿐인 영광③이튿날이었다. 총괄주무와 감사보고서를 작성한다고 머

열심히 고기를 굽던 김몽룡씨가 “참, 아까 곤달비 뜯어온 거 어딨노? 신불산산나물은 나물까지 신령스러운지 함 묵어보자.” 하고 은행잎처럼 동그란 이파리의 끝에 톱니처럼 올록볼록한 곤달비에 고기와 막장을 얹어 쌈을 사 먹어보고 “야, 향이 죽인다. 뒷맛이 달콤한 것 같기도 하고. 좌우간 고향자랑은 할 만 하기도 하다.” 평소 매사 비판적이고 칭찬이 인색한 사람이 모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날 열찬씨는 고향자랑의 대가로 통도사터미널 앞 낙지볶음 집에서 낙지와 곱창과 세우가 들어간 낙곱새와 소주를 넉넉히 사야만 했다.제5장

어쩌다 오늘은 큰 맘 먹고 영남알프스에 가자고 노포동에서 고속도로주행 직행버스를 타기라도 하면 그만 열찬씨의 가슴이 철렁했다. 주로 통도사 앞 신평정류소에 내려서 통도환타지아와 절 뒤를 돌아 영축산으로 바로 올라 금강암쪽으로 내려오는 경우는 좀 덜했지만 언양에서 버스를 내려 가지산이나 고헌산에 가려고 시골버스나 택시를 타려고 언양버스터미널에 내릴 때면 그 전에 아이 둘을 데리고 명절날 버스에서 내리며 “나는 너거에게 효도하라, 무엇하라 무슨 가훈이니 훈시니 하는 것은 절대 안 할 끼다. 대신 너거가 후제 다 커서 객지에 나가 살더라

가령, 이런 사랑 박화남​ 울타리 넘어가다울타리가 된 등나무어깨를 뒤틀어서 철조망을 품었다차갑게 얼어있는 네게뼈를 심듯 몸을 연다산등성이 넘어가다발목 잡힌 나무처럼그 자리 몸을 굽혀 너를 안아들었다여기가 어딘지 몰라도멀리 함께 가겠다고 얼마나 이타적 사랑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타리가 되었을까요? 그것도 뾰족하고 차가운 ‘철조망’을 ‘어깨를 뒤틀어서’ 품고, ‘차갑게 얼어있는 네게’ ‘뼈를 심듯 몸을 열’ 수 있을까요? 또 ‘그 자리 몸을 굽혀 너를 안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기가 어딘지 몰라도/ 멀리 함께 가겠다’는 등나

감싸도는 얼굴 석정희 골똘해지는 그리움눈처럼 내려 쌓이네그 순백의 정렬녹아 고드름되어님의 가슴에 투명하게사랑이라 쓰네머언 어디선가종이 울리는듯가슴을 채워 가다그대로 터뜨리고 말면하얗던 눈발하나 하나님의 얼굴이 되어날 감싸고 도네 ◇ 석정희 시인은▷Skokie Creative Writer Association 영시 등단▷‘창조문학’ 시 등단▷수상 : 한국농촌문학 특별대상, 대한민국문학대상, 독도문화제 문학대상, 세계시인대회고려문학 본상, 유관순 문학대상, 글로벌최강문학명인대상, 탐미문학 본상, 대한민국예술문학세계대상, 에피포도 본상,

“그거 소주가?”김 계장이 든 비닐봉지를 보더니 비로소 표정이 누그러졌다. 이어 공항식당에 들어가 먼저 강소주 한잔을 마시고 이어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제조해 건배를 하여 분위기가 상당히 누그러진 뒤 “청장님!” 아주 간단하게 여남은 줄로 압축된 부재중 업무보고서를 올리니 “뭐라 판정보류라?” 열찬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지며 ]“이 실장, 그냥 놀지는 않았군. 고생한 김에 기어이 이 싸움을 이기도록 하게.” 모처럼 얼굴을 펴며 술을 한 잔 부어주었다. 그렇게 잔뜩 고무되어 특별한 갈등도 없이 보름이 흘러 행정심판이 재개

“야, 멋진데요.”“예. 멋지기보다는 중앙정부의 벼슬에 나서 정치개혁에 실패하고 시골의 말단관리로 좌천되어 다시 초야에 묻힐 생각을 하며 독서에 힘쓰던 시절의 이야기지요.”“그래요? 어쩌면 지금 우리 실장님과...” 하다 문득 말을 멈춘 민형사가 “아무튼 실장님 대단합니다. 존경합니다.” 하고 물러가더니 다음부터는 열찬씨를 대하는 것이 여간 공손하고 다정하지 않아 열찬씨의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서구와 자매도시로 중국 요령성 장하시가 있었는데 평소 2, 3년 만에 한번 씩 서로 방문하며 교류를 하는데 마침 약속된 방문시기가 도래하

3봄이 왔다. 고등학교 삼학년 학생들에겐 학교는 하루하루가 대학입시를 향한 일상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사회에 대한 관심도 깊어져가는 나이라 담쟁이가 담을 넘어 덩굴손을 뻗듯 인호는 학교 밖의 세계에도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는 신문을 자주 정독했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주도한 학생 두 명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들의 구속을 다룬 기사는 아주 짤막하게 실렸다. 전국적으로 나비의 개체수가 줄어든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인호는 그런 뉴스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 밖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나비가

마침내 새해가 밝았다. 김영호구청장은 시무식에서“오늘은 단순한 시무식이 아니라 지난해 충무동 새청사로 옮겨온 지 첫돌이 되는 매우 의미심장한 날입니다. 전대미문의 초강력태풍 매미 호를 맞아 우리 공무원은 물론 14만구민이 겪었던 악몽을 딛고 의연히 일어난 지난해의 저력을 바탕으로 올해는 송도연안정비와 해수욕장의 명성회복에 비약적인 발전을 기하고 꽃마을 구덕수목원의 품격 있는 공간조성에도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며 새해의 포부이자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시무식을 마치고 기획감사실로 돌아와 계장들을 원탁으로 불러 티타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