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58) - 중인 신분이었지만 시와 문장이 탁월했던 위항시인 홍세태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58) - 중인 신분이었지만 시와 문장이 탁월했던 위항시인 홍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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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1.27 14:21
  • 업데이트 2020.11.2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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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으로 역관시험에 합격한 위항시인
시문 뛰어나 통신사행 발탁돼 큰 역할

홍세태(1653~1725)는 양반이 아닌 무인 집안에 출생한 중인 신분으로 역과에 합격한 역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통역보다는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문장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나 신분이 중인층이라 제약이 많았다.

홍세태는 1675년(숙종 1) 을묘식년시에 잡과인 역과(譯科)에 응시하여 한학관(漢學官)으로 뽑혀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제수되었으며, 1682년(숙종 8) 통신사 윤지완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임술사행(壬戌使行)에 제술관은 아니었지만 탁월한 문장가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다. 왜인들이 그의 시묵(詩墨)을 얻어 가보처럼 간직하였다. 그는 30제 33수의 사행시를 남겼다.

그가 통신사행에서 문장으로 많은 역할을 하였음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먼저 그의 詩제자인 정래교(1681~1757)는 홍세태의 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홍세태 사후 발간된 그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홍세태 사후 발간된 그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홍세태는)숙종 임술년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 오랑캐들이 종이와 비단을 가지고 와서 시와 글씨를 구걸하여 얻어 갔다. 공이 지나는 곳마다 담 위에 사람들이 걸쳐 서면 공은 말에 기댄 채 휘둘러 글을 썼는데 그 휘몰아치는 것이 마치 비바람 같았다. 그의 글을 얻은 자들은 깊이 감추어서 보배로 삼았는데 심지어는 방에다 공의 모습을 그리는 일까지도 있었다.(「滄浪洪公墓誌銘」)

홍세태와 함께 사행으로 갔던 역관 홍우재의 『동사록(東槎錄)』에도 그와 관련한 기사가 있다.

“서성(書僧) 조삼(朝三)과 진사 성완(成琬), 진사 이담령(李聃齡), 첨정(僉正) 홍세태가 반나절 동안 시를 주고받았다.”(6월28일자 대마도에서의 기록)

“조삼 승(朝三僧)이 또 진사 성완과 시 몇 구를 화답했다. 부행서기(副行書記) 진사 이담령과 부사비장(副使裨將) 첨정 홍세태도 역시 잘 지어주고 받았다.”(7월 7일자 대마도에서의 기록)

홍세태의 친필. 출처=성균관대학교박물관.
홍세태의 친필. 출처=성균관대학교박물관.

성완은 사행의 모든 글을 관장하는 제술관이었다. 성완·이담령·안신휘·홍세태는 그 활약이 두드러져 일본 문인들에 의하여 ‘무릇 사행원 중에서 문한(文翰)에 통한 자는 오로지 이들 넷 뿐으로 이는 조선이 일본을 기만하고 얕보는 처사’(板坂爲篤 : 「東事紀事序」, 和韓唱酬集.)라고 푸념을 하였다.

또한 1764년 갑신사행(甲申使行)의 책임자로 다녀왔던 정사 조엄(1719~1777)이 사행을 마치고 대궐로 들어갔을 때 영조 임금이 당시 제술관 남옥(南玉)의 활약이 무려 82년이나 앞서는 홍세태에 비하여 어떻더냐고 묻기도 했다.

홍세태는 중인인 위항인(委巷人)의 신분이었지만 사대부 문인들도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성대중은 『청성잡기(靑城雜記)』에, “홍세태는 처음 역관에 소속되었을 때, 미천한 신분 때문에 동료들이 그를 배척하자, 관직을 버리고 문장 짓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농암 김창협 등 여러 선비들이 기꺼이 그와 교류하였고, 후세 사람들도 그의 시를 읊기를 시들지 않았다”라 하여, 재주는 있었으나 신분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홍세태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8남 2녀의 자녀 중 8남이 앞서 죽는 불행을 당하였다. 그의 이러한 궁핍과 불행 탓인지 암울한 분위기의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홍세태가 펴낸 위항시인들의 시선집인 『해동유주』 내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홍세태가 펴낸 위항시인들의 시선집인 『해동유주』 내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항인의 시를 모아 위항한시선집인 『해동유주(海東遺珠)』(1972)을 편찬하여 위항인의 자부심을 고양했다.

그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때문에 역대 여러 임금과 최석정·이광좌·김석주 등도 그의 재능을 아꼈다. 그는 승문원의 제술관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동문선(東文選)』 속편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홍세태는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에도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19년(숙종45) 우의정 이광좌의 추천으로 울산감목관(蔚山監牧官)에 임명되었다. 그는 울산 감목관 부임 이후 한시 120여 수를 남겨 울산주변 목장과 바닷가 주민들 생활상 생생히 담고 있다. 18세기 가난하고 고단했던 울산 어민들의 생활상이 울산 목장 감목관 홍세태의 시에 적나라하게 표현돼 있는 것이다. 1723년(경종3) 남양감목관(南陽監牧官)으로 옮겼다. 이듬해 그는 병으로 말미암아 감목관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이 깊어지자 상자 안에 간직한 초고(草稿)를 손수 수정하고 편집하여 책으로 만들고, 또 스스로 서문을 지어서 평생의 자기 뜻을 서술하였다. 홍세태가 1725년(영조1) 1월 15일, 73세로 돌아간 지 6년 뒤에 둘째사위 조창회와 김정우가 경비를 모아서 『유하집(柳下集)』 14권을 간행하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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