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68) - 함경도 기생 홍랑이 전남 영암 출신 최경창의 묘에 묻힌 이유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68) - 함경도 기생 홍랑이 전남 영암 출신 최경창의 묘에 묻힌 이유
  • 조해훈 조해훈
  • 승인 2021.05.21 14:28
  • 업데이트 2021.05.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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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명 『회은집』, 고죽 최경창·홍랑의 러브스토리 수록
고죽이 북해평사로 함경도 경성 부임해 관기 홍랑 만나
해주최씨 문중, 그녀 절개 기려 고죽 부부묘 아래 묻어
3. 최경창의 시비 뒤에 홍랑의 검은 색 묘비가 보인다.
최경창의 시비 뒤에 홍랑의 검은 색 묘비가 보인다.

숙종 대에 두 차례나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아들인 남학명(南鶴鳴·1654~?)의 시문집인 『회은집(晦隱集)』(5권 2책)의 「잡설(雜說)」 중 ‘사한(詞翰)’에 최치원(崔致遠)·권필(權韠)·최경창(崔慶昌)·이수록(李綏祿)·이세화(李世華)·김만중(金萬重)·오도일(吳道一)·이해(李瀣)·이운근(李雲根) 등이 지은 시문의 내용을 기록한 일종의 시화류(詩話類)가 있다.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시화를 고찰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고죽(孤竹) 최경창(1539~1583) 편에 재미있는 글이 들어있다. 고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백광훈(白光勳·1537~1582)·이달(李達·1539~1618)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중 고죽은 좌장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고죽과 관련한 그 글을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전남 영암 출생으로 1568년 급제한 고죽이 34세 때인 1573년 가을 북해(北海) 평사(評事)로 함경도 경성(鏡城)에 부임했을 때 관기였던 기생 홍랑(洪娘·생몰년 미상)을 만나 사랑했다. 고죽이 이듬해인 1574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영흥(永興)까지 따라가 배웅한 뒤 돌아올 때 함흥(咸興) 70리 밖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날은 어두워지는데 비까지 내리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홍랑은 시조 「묏버들 갈ᄒᆡ 것거」를 지어 고죽에게 보냈다. 시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묏버들 갈ᄒᆡ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ᄃᆡ/ 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그녀의 시를 받은 고죽은 새 종이에 옮겨 쓰고 한시로 번역해 그녀에게 보냈다. 편지는 1576년(선조 9) 홍랑에게 보내졌다. 고죽이 옮긴 한시는 「번방곡(翻方曲)」이란 주제로 다음과 같다. “擇折楊柳寄千里(절양류기여천리)/ 人爲試向庭前種(인위시향정전종)/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4. 최경창의 시비 뒷면에 새겨진 홍랑의 시조.
최경창의 시비 뒷면에 새겨진 홍랑의 시조.

후에 홍랑은 고죽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로 떠나 7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나라의 금지령 탓에 머물 수 없었다. 고죽은 병이 낫자 곧 홍랑을 보내며 시를 지어 주었다.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향기로운 난초를 건네주니/ 이제 하늘 끝 저 멀리로 가면 얼마나 걸릴꼬/ 험관의 옛 노래를 그대여 부르지 마오/이제 청산이 비구름에 어둡네(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莫唱咸關舊詩曲·막창함관구시곡/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고죽은 북해 평사 이후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선조 8)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으나 1576년(선조 9) 영광 군수로 좌천됐다. 그는 이 무렵 벼슬을 그만둔 것으로 짐작된다. 1582년(선조 16) 종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었다. 1583년 발령을 받고 한양으로 향하다 경성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홍랑이 법을 어기며 병문안 간 게 빌미가 돼 고죽이 파면되었다. 당시 고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비화되어 1576년(선조 9) 봄에 사헌부에서 양계(兩界: 평안도·함경도)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죽의 파직을 상소한 것이었다.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이 한양에 와 있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그 무렵 양계에 금(禁)함이 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죽은 탓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고죽은 관직이 면직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파직을 당한 고죽은 이후 복직이 되어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종성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다시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45세에 객사하였다.

1. 남학명의 시문집인 『회은집』.2. 최경창의 문집인 『고죽집』.
최경창의 문집인 『고죽집』(왼쪽)과 남학명의 시문집인 『회은집』

고죽이 죽자 홍랑은 얼굴을 훼손하고 그의 묘소를 지켰다. 또한 임진왜란이 터지자 고죽의 시고(詩稿)를 짊어지고 다녀 전쟁의 불길을 면했다. 홍랑은 고죽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시고(詩稿) 등을 간직하였다가 그의 문중(門中)인 해주 최씨가에 전하였다.

고죽의 문중에서는 홍랑이 죽자 그녀의 절개를 기려 고죽의 묘 아래 묻어 주었다. 고죽의 묘는 부부합장묘로, 경기도 파주군 교하읍 다율리에 있으며, 묘 앞에 홍랑의 묘가 위치해 있다. 그러니까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사랑하는 한 남자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한 그 점을 고죽의 문중에서 높이 산 것이다. 고죽 부부묘와 홍랑 묘 아래에 있는 고죽시비(孤竹詩碑)의 앞면에는 홍랑의 시를 고죽이 번역한 「번방곡」이, 그 뒷면에 홍랑의 시조가 새겨져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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