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63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망초꽃, 잊어야지 잊어야지
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63 나뭇잎이 푸르른 날에 - 망초꽃, 잊어야지 잊어야지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1.06.07 07:00
  • 업데이트 2021.06.07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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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물결을 이루는 망초 들판 [사진 = 이득수]

한 여름철 들길이나 산기슭을 걷다보면 유난히 눈에 뜨이는 하얀 꽃물결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망초꽃입니다.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에서 달빛 아래 소금을 뿌린 듯이 반짝인다고 표현한 메밀꽃의 청아한 느낌과는 또 다른 매우 싱싱하고 건강한 느낌이지만 한참 바라보면 가슴속에서 서서히 뭔가가 사무치는 애틋한 꽃이기도 합니다.

사진 위의 자잘한 꽃송이가 소금꽃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것을 망초라 하고 아래 크고 또렷한 꽃송이 가운데가 노랗고 테두리가 하얀 꽃을 개망초라고 하며 일명 <계란프라이꽃>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통 꽃이나 잎의 모양이 좋지 못한 것을 앞에 <개>자를 붙이는데 이상하게 망초만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이른 봄 논두렁, 밭두렁에 가장 먼저 한 무더기의 초록색 새순이 돋아 강원도지방의 곤드레나물처럼 매우 크고 왕성하게 자라지만 언양지방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나물을 뜯는 처녀들도 정 뜯을 것이 없으면 부지깽이나물이라고 부르는 저 망초(어릴 때는 망초, 개망초가 구별이 안 됨)를 뜯는데 세력이 왕성한 만큼 잎이 좀 거칠어 그렇지 사람이 먹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살면서 가끔 고향에 오면, 그것도 한 40이 넘어 내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꿈이 어쩌면 점점 멀러지는 것 같은 불안 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변해갈 때쯤 나는 고향의 들길을 걸으면서 저 눈부시게 하얀 순백의 꽃을, 그리고 꽃의 바다를 왜 망초라는 뭔가 아쉽고 어딘가 허전한 이름으로 부르는지 궁금했습니다. 설마 망한다는 망(亡)자는 아닐 테고 더욱이 잃어버리는 망(妄)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잊어버린다는 뜻, <나를 잊지 마세요의 물망초(勿忘草)>를 떠올리다 가슴이 뭉클하며 아마도 그리운 사람을 단한번이라도 만나기를 바라는 희망의 망(望)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년기의 모정과 향수, 사춘기의 황홀한 울렁거림을 겪은 우리는 누구나 가슴속에 아련한 그리움하나를 키우는 숙주(宿主)가 아닐 수 없답니다. 세상에 저 개망초처럼 동그란 얼굴하나를 가슴에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저 끝없이 번져가는 망초의 물결처럼 그리움에 그리움이 새끼를 쳐 아득히 긴 세월을 혼자 애태우지 않는 그런 무심한 사람은 또 어디 있을까요? 한 무명시인의 시를 올립니다.

탐스러운 개망초 [사진 = 이득수]

망초꽃
                  이득수

망초꽃은 노르망디에서 상륙한 연합군이다. 거침없이 진군하여 완강한 나치스를 뚫고 라인강, 볼가강을 지나 툰드라의 눈밭을 넘어 그 음울한 시베리아의 침엽수를 덮쳐가는...

원시의 벌판처럼 초록색 끝없는 내 가슴언덕에 너는 왜 문득 망초처럼 하얗게 밀려왔을까, 순백의 그리움으로 채워진 내 가슴에 너는 왜 머물지도 잡히지도 않고 1년에 한 번씩 불쑥 솟아나는 슬며시 사라지는 지심(地心)의 영혼, 풀이 되어 왔을까, 겨울바람 가득 찬 그리움의 고향은 저 어두운 지층 속 어느 층계 짬일까.

망초꽃 피고지고, 망초꽃 피고지고, 아아, 어느 새 내 머리에 망초꽃이 피었는데

아아, 이제 알겠다. 저 외래의 꽃 하얗게 덮여올 때 왜 사람들이 망초꽃으로 불렀는지, 잊어야지, 잊어야지, 망각의 꽃 망초로...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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