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19) 야생이 돌아왔다
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19) 야생이 돌아왔다
  • 손현숙 손현숙
  • 승인 2021.09.05 11:20
  • 업데이트 2021.09.06 14: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야생이 돌아왔다
                        손현숙

 

유연하고 둥근 저 발바닥의 곡선은 개양귀비의 언덕과 강기슭을 거닐었던 눈부신 저녁의 한 때를 기억한다

배를 밀 듯 딱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는
목소리도 아니고
기척도 없는 달의 궤도처럼,

저 몸짓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에 가둬두었던 조 씨 할아버지의 공작새
먹이를 주는 사이 문을 탈출했다는
소문은 잘못이다 탈출이 아니라 본능이다

처음부터 가팔랐던 제 속의 벼랑,
거스를 수 없는 야생의 방식 앞에 내가 서 있다

중문을 지나 오색의 꼬리를 거느린 채 마당으로 들어오는 조용하고 태연한 저 몸의 권력,

나는 혼자 비상을 꿈꾸며 날개 밑에 공기를 품듯
입 안에 가득 공작새, 이름을 지어 불러본다

누가 저 유장한 말씀 앞을 막아설 수 있을까

난간에 뿌리내린 이름 모르는 식물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을 따라나선다, 나도
공작새처럼

- 2021. 시산맥. 봄호 -

[사진 = 손현숙]
[사진 = 손현숙]

<시작메모>

어디로든 가고 싶은데, 막상 집을 나서면 갈 곳이 없다. 진정 갈 곳이 없는 것인지, 이미 집짐승으로 길들여져서 가지 못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창을 열다가 문득, 한 여인을 만났다. 가만한 입술과 흐트러진 듯 단정한 머리는 감히 다가서기 힘든 용모였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서 비릿한 야생이 느껴졌다. 안전한 우리 안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공작이었다. 파란 대문을 넘어서 짐짓 자기 집인 듯, 야생은 느리고 당당하고 우아해서 거리낌이 없었다. 조 씨 할아버지네 우리에 갇혀 살던 공작새가 탈출했다는 소문이었다. 잡히지 말기를……. 사람의 손아귀 안으로 다시는 들어서지 말기를……. 그 공작이 작년에 이어 올가을에도 탈출을 시도했다. 어디로든 다시는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는 먼 곳으로 날아갔으면… 나도 공작새처럼 ….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