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9)저녁노을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9)저녁노을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1.10.24 18:05
  • 업데이트 2021.10.26 2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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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사진 = 조송원]

노을이 아름다운가, 그것도 아침노을이 아니라 저녁노을이! 인생은 햇빛과 닮았다.

햇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보라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과 자외선까지 품고 있다. 본디 성질(파장)과 조건(공기, 먼지, 수증기 등)이 만나서 산란하는 정도에 따라 햇빛은 하늘을 푸르게도 하고 아침저녁 노을을 붉게도 한다. 푸르든 붉든 햇빛이란 실체는 변함이 없고, 다만 우리 눈이 여러 색깔로 감각할 뿐이다.

성공과 실패는 한 사기꾼의 다른 두 모습이라 했던가. 손흥민은 훌륭한 축구선수다. 성공한 인생일까? ‘지금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른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울지 아닐지. 디에고 마라도나는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의 한 명이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아름답지 못했다. 절제 없는 사생활, 나태한 건강관리로 심장마비와 뇌출혈 동시 발생으로 60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100m를 남보다 0.1초 더 빨리 뛴다는 게 우리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공짜는 아니다. 육체적 재능과 흘린 땀방울에다 행운까지 얻은 덕이다. 행운이라 함은 500년 전에는 올림픽 경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명예와 물질적 보상을 받는다. 그뿐이다. 그 이후의 삶에 ‘빨리 달림’ 능력은 별 도움이 안 된다. 하여 축구에 뛰어난 덕분에, 잘 달린 덕에 한 성공, 그 성공이 저녁노을의 아름다움까지 보장해 주지 않는다. 마라도나가 축구선수가 되지 않고, 배관공이 되었으면, 더 저녁노을이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결국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에는 목적이 없다. 역사는 한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예측할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후事後 깨달음의 오류’란 말을 쓴다. 우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밟아온 길은 한 갈래뿐이다. 그래서 지나온 역사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전개될 운명이었다고 이해한다. 가령 6·25 전쟁은 이러저러한 국내외 사정에 의해 반드시 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곧, 특정시대에 실제로 실현된 사건에 대해 ‘사후 깨달음’을 근거로 그 사건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실현된 사건이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왜 하필 그 사건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른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는지, 해당 역사를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역사의 미래도 알 수 없다. 지나온 길이 한 갈래인 반면, 지금부터 미래로는 무수히 많은 갈래의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역사의 선택에는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인류의 복지가 필연적으로 개선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기독교가 마니교보다 더 나은 선택이었다는 증거도 없다. 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도 없다. 문화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인 척도가 우리에겐 없다. 물론 늘 승자는 자기네 정의가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왜 승자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선택 자체가 결과를 바꾼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다.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측행위 자체가 관측 대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불확정성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는 인간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조송현,『우주관 오디세이』). 곧, 모든 입자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자연주의적 오류’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양자역학까지 들먹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류의 거대 발자취인 역사, 개인의 역사 곧 일생, 그리고 미시세계의 입자들에게까지 공교롭게도 한결같이 작용하는 ‘선택’의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인생은 ‘선택의 누적’이다. 선택의 연속으로 삶 자체가 바뀌고 바뀌어 ‘현재의 나’가 존재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내’가 선택으로 지금의 삶을 일궜다. 더 무엇을 바라랴.

인생의 방향도 반드시 행복 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라는 티켓을 끊고 탄 기차가 불행 쪽으로 갈 수 있다. 잘못 탄 기차가 행복이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다.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선택한 티켓이 실제 어떠한 미래로 향할지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다행인 건 미래나 내일은 영원히 상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냥 오늘만 살 수 있을 뿐이다.

한 번쯤, 혹은 무시로 과거의 선택에 대해 회한을 품는다. ‘그 때 더 나은 선택을 했더라면······.’ 그냥 회한일 뿐이다. 자신을 비하할 필요야 없지만, 과대평가는 하지 말자. 그때 그 선택은 당시의 조건과 판단력으로서는 최선이었다는 걸 상기하자. 지금의 내 모습이 좀 초라하든 화려하든 무슨 상관이랴. 푸른색이든 빨강색이든 다 햇빛이듯, 어느 경우든 소중한 내 인생이다. 어디 높낮이가 있으리오.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작가 / 선임기자, 편집위원 /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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