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84) - 여강(여주)에서 15년 간 은둔생활을 기재 신광한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이야기 (84) - 여강(여주)에서 15년 간 은둔생활을 기재 신광한
  • 조해훈 기자 조해훈 기자
  • 승인 2021.11.21 17:29
  • 업데이트 2021.11.22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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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손자,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으로 파직
여강 원형리서 가난하게 농사지으며 세상단절
55세인 기묘명현 복권 때 대사성 복직 서울 옴

빈 뜰 초목에 꽃이슬이 맺혔는데(空庭艸樹露華團·공정초수로화단)/ 산 빛은 푸르러 더위를 가시게 하네.(山氣蒼然暑氣殘·산기창연서기잔)/ 기재의 이 달이 절로 좋으니(自愛企齋今夜月·자애기재금야월)/ 밝은 빛이 낙봉의 얼굴을 비추는구나.(淸光來照駱峯顔·청광래조락봉안)

조선 중기에 이조판서와 좌찬성 등을 지낸 신광한(申光漢·1484~1555)의 시 「우음(偶吟·우연히 짓다)」으로, 그의 문집인 『企齋集(기재집)』에 수록돼 있다. 좌찬성은 종1품으로 정1품인 3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 다음 직급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부총리 급이었다.

을묘왜란이 일어난 1555년 윤 11월 그가 낙산의 기재에서 세상을 버리기 거의 직전에 쓴 시로 알려져 있다. 북악의 기슭을 북촌, 남산의 기슭을 남촌으로 부른 것처럼 낙산 기슭을 동촌이라 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 김효원(金孝元·1542~1590)이 이곳에 산 때문에 동인(東人)이라는 말이 생겼다.

신광한의 글씨. 출처=여주시청
신광한의 글씨. 출처=여주시청

신광한은 고령 신씨로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손자다. 신광한의 부친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낸 신형(申泂·1449~1487)이다. 신광한이 네 살 때 아버지가 비명으로 갔다. 그러다보니 공부의 입문이 늦었지만, 뛰어난 명석함으로 27세인 1510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좋게만 굴러가는 게 아니다. 젊은 시절 조광조와 친분이 깊었다는 이유로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삼척부사로 쫓겨났다. 이어 두 해 뒤인 1521년에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인해 아예 관직을 박탈당했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 10월 11일 관상감판관 송사련과 그의 처남인 평민 정상이 안처겸의 모친 장례식에 온 인사들의 방명록을 안당 일파의 역모 가담자 명단이라고 거짓 고변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0여 명의 선비들이 처형되는 등 화를 당하고, 많은 선비들이 파직되고 유배를 갔다.

2년 후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다 1524년 정월에 여강(여주)의 원형리(元亨里·오늘날 점동면 원부리 원앙이마을로 추정)로 들어갔다. 이곳은 여주 관아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천민천(天民川)이 흐르는 마을이다. 호도 원형옹(元亨翁)이라 하였다. ‘원형’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하늘의 뜻을 좇아 살면 크게 길(吉)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광한의 문집인 '기재집'.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광한의 문집인 '기재집'.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곳에서 15년 동안 가난하게 농사를 지으며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다. 그가 어렵게 산 이야기를 허균이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써놓았다. 그 내용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충주목사로 있던 박상(朴祥)이 김안국과 신광한이 무척 어렵게 사는 것을 알고 여주목사 이희보에게 쌀 100곡을 빌려다주고 나중에 갚았다. 문신 조사수(趙士秀·1502~1558)도 행장에서 신광한은 방안에 도서를 쌓아두고 가난하게 살망정 터럭 하나라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광한은 원형리의 집 이름을 ‘기재(企齋)’라 이름 짓고 ‘기재기(企齋記)’를 지었다. 이 ‘기재기’에 보면 할아버지 신숙주의 집 이름은 ‘희현당(希賢堂)’이라고 했다. 이 편액은 중국 역사상 첫 명재상으로 꼽히는 은나라의 재상인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고,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 안회(顔回)의 학문을 배운다는 주렴계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렴계는 중국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를 말한다.

신광한은 이 기문에서 ‘기재’의 뜻이 “할아버지를 바란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를 바란다 하였으니 어진 이를 바라는 것이다. 어진이를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바라는 것이요, 성인을 바라는 것은 하늘을 바라는 것”이라고 적었다. 즉 이 말은 할아버지의 부귀공명을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꿈꾸었던 옛 선현을 다시 꿈꾼다는 의미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신광한의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신광한의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37년(중종 32)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선비들인 기묘명현들이 복권된다. 이듬해인 1538년 55세의 신광한도 대사성으로 복직이 되어 서울의 낙산 아래 옛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는 중에 뱃길로 광나루를 지나면서 그 감회를 시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외로운 배로 한 번 광나루를 나와서는(孤舟一出廣陵津·고주일출광릉진)/ 15년이 지나도록 이 몸은 죽지 못하였네.(十五年來未死身·십오년래미사신)/ 나는 정이 있어 알아볼 듯한데(我自有情如識面·아자유정여식면)/ 청산은 옛사람을 능히 기억해줄까.(靑山能記舊時人·청산능기구시인)

그는 대사성으로 복직한 이후 대사간·대사헌·대제학 등의 청요직을 지낸 후 참판을 거쳐 판서에 올랐다. 또한 의정부 좌찬성과 판중추부사 등도 역임하였다.

그는 여강에서 돌아와 낙산 아래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지었다. 이 정사는 동숭동 129번지,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자리 뒤쪽 허물어진 성곽 아래다. 폭천정사 낙성식 때 시를 짓고는 속세에 없는 신선의 땅이라 여겼다. 신광한이 살던 집인 기재는 이후 많은 시인들의 시에 오르내렸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이 신광한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t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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