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327) - 만물이 본래 하나이고 그리고 내 마음에 삿된 망상이 없으니 … 
도무지(道无知)의 채근담 읽기 (327) - 만물이 본래 하나이고 그리고 내 마음에 삿된 망상이 없으니 … 
  • 허섭 허섭
  • 승인 2021.11.23 17:45
  • 업데이트 2021.11.23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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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오창석(吳昌碩 1844~1927) 화훼도(花卉圖) 4폭 (3) (4) 각 250.7+62.4 상해박물관
오창석(吳昌碩, 1844~1927) - 화훼도(花卉圖)(3, 4)

327 - 만물이 본래 하나이고 그리고 내 마음에 삿된 망상이 없으니 … 

마음에 사념 망상이 없는데 무슨 살필 것이 있겠는가.
석가가 말하는‘마음을 본다’함은 거듭 장해를 더할 뿐이다.

만물이 본래 하나인데 어찌 하나가 되기를 기다리겠는가.
장자가 말하는‘만물을 가지런히 한다’함은 스스로 그 같은 것을 쪼갤 뿐이다.

  • 無其心(무기심) : 그 마음이 없음. 여기서 其心은 사념망상(邪念妄想), 삿된 마음이나 망령된 생각을 뜻함.
  • 何有(하유) : 어찌 있으리오.
  • 觀(관) : 관심(觀心), 내 마음의 본성(本性)을 객관적 입장에서 관찰함으로써 사념망상을 없애는 것을 말함.
  • 釋氏(석씨) : 석가모니 부처님.
  • 重增(중증) : 거듭 더함.  여기서 重은 ‘거듭, 더욱’ 의 뜻이다.
  • 障(장) : 장애(障碍)와 방해(妨害), 가로막음.
  • 齊物(제물) : 장자(莊子)의 철학사상으로 현상계는 상대적 세계로 만물이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도(道)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같아 일체(一體)라는 것이다. 상대적 ․ 대립적 세계를 초월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제물론(齊物論)이 장자 사상의 핵심이다.
  • 莊生(장생) : 장자(莊子)를 말함.
  • 剖其同(부기동) : 같은 것을 갈라놓음.  剖는 ‘쪼개다, 나누다’.

* 齊(가지런할 제) 자(字)는 원래 보리(밀) 이삭이 가지런하게 자란 모양에서 나온 상형자(象形字)이다(일설에는 동물들이 떼를 지어 머리만 내어놓고 물을 건너는 모양에서 나온 글자라고도 한다. 그래서 濟가 ‘건널 제’ 자이다.).  齊의 독음(讀音)으로는 〔 ①가지런할 제 ②조화할 제 ③옷자락 자 ④재최(상복) 재 ⑤자를 전(剪) 〕가 있는데, ‘가지런하다’ 에서 ‘조화하다, 요리하다, 조제하다(劑)’의 뜻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재계(齋戒)할 齋(재)’ 와 통용하기에 ‘엄숙하다, 삼가다, 공경하다’ 의 뜻도 있다. 齋는 호(號)나 당호(堂號)에 쓰일 때에는 ‘집 재’ 자로 읽는다.

*『장자』가 말하는 ‘齊物’ 에서 齊는 ‘균일(均一)하다, 평등(平等)하다’ 의 뜻으로 영어로 말하자면 ‘same / equal’ 에 해당할 것이다.

* 이 장의 본문은 끊어 읽음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 釋氏曰 觀心者 重增其障 / 莊生曰 齊物者 自剖其同 > 라 읽으면 그 본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저자가 (석가나 장자를 비판하여) 하는 말이 석가나 장자 자신들이 한 말로 되어 버린다. 

327 오창석(吳昌碩 1844~1927) 화훼도(花卉圖) 4폭 (1) (2) 각 250.7+62.4 상해박물관
오창석(吳昌碩, 1844~1927) - 화훼도(花卉圖)(1, 2)

◈ 이 장에서는 자칭‘오유(吾儒) - 유학의 후예’로 자처하는 필자가 석가와 장자의 논설을 본질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지은이 홍자성의 말은 석가와 장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동어반복(同語反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장을 처음 읽었을 때, 5조 홍인(弘忍 601~674)이 던진 화두에 대해 신수(神秀 606?~706)와 6조 혜능(慧能 638~713)이 각기 달리 답한‘다르고도 또 같은’ 두 게송이 생각났다.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몸은 보리수요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부지런히 털고 닦아
莫使惹塵埃 (막사야진애)  티끌이 묻지 않게 해야 하리   -  신수 대사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맑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어디에 티끌이 묻으리오       -  육조 혜능

언즉시야(言則是也)라 - 말인즉 옳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엔 이미 그 자신이 유불도(儒彿道) 삼교(三敎)에 혼융(混融/渾融)된 한 지식인일 따름이다. 이러한 언설(言說)은 그 자신이 채근담 전권을 통해 가장 존경했던 소강절 선생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한계를 스스로 노정(露呈)하고 있을 뿐이다. 

명대(明代)의 유학자가 우리 조선조(朝鮮朝)의 유학자에 비하면 훨씬 더‘열려있는(開豁的개활적) 사유세계(思惟世界)’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내 개인적 판단으로 필자 홍자성을 우리 조선의 유학자에 견주자면, 평생 출사(出仕)하지 아니하고 초야(草野)의 선비로 생을 마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 아마도 가장 가깝다할 것이나 그 사상적 깊이나 높이에 있어서는 결코 화담 선생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의 지은이 홍자성은 대단한 사상가는 아니며 다만 자신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위해서 세상과 호락호락 쉽사리 타협하지 않았던 꼬장꼬장한 선비일 따름이다.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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