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11)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⑪
대하소설 「신불산」(211)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⑪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8.06 07:15
  • 업데이트 2022.08.0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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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등말리 별곡(別曲)2⑪

어떤 질문에도 묵묵부답이던 또생씨가 이장의 잔소리가 지칠 때쯤 입을 열었다. 개간하다 만 구릉의 땅을 좀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왜 갑자기 돈 쓸 일이 생겼는가 물어보려다 이장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참으로 오래오래 잘도 견딘 것이었다. 선 영감이 죽은 지 3년인데 비록 약간의 저금이 있었더라도 겨우 논 다섯 마지기의 도지 나락 다섯 섬의 수입만으로 세 식구가 3년이나 버틴 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근래 마을에 어렴풋이 떠돌던 또생씨의 처 왜색시가 아이를 배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으로서는 좋다, 싫다할 이유가 없었다. 울고 싶은데 뺨맞은 격이니 망설일 일도 없었다. 당일로 마을의 사랑방역할을 하는 강당입구 가겟집과 동사, 마을에서 밥술이나 뜨는 유지들에게도 소문을 전하고 삼남면사무소와 면사무소 앞의 구멍가게와 하나 뿐인 대폿집에도 들러 소문을 내고 버스가 오자말자 신평으로 향해 철물점을 하면서 부동산 거간을 하는 친구에게도 물건을 내놓았다.

음력설을 며칠 앞둔 날 마침내 신평의 철물점주인을 통해 부산의 어떤 부자에게 땅이 팔렸다. 현재 수산업을 하는데 나중에 목장이나 농장을 하려고 미리 땅을 사려는 구매자는 또생이네 구릉은 물론 인근의 모든 매물을 몽땅 사들이기로 해 가천이장은 또 한 번 목에 때를 벗길 전성시대를 맞았다.

저 먼 함경도 명사십리의 원산에서 태어나 타국인 일본 땅을 전전하다 마침내 늙마에 고국에 돌아와 비록 타향이긴 하지만 푸근하고 넉넉한 신불산의 품에 터를 잡고 땀 흘려 일구던 그 땅에 묻힌 선 영감은 채 5년도 되지 못 해 남의 땅에 묻힌 나그네가 된 셈인데도 또생씨는 장인의 산소에 대하여 별도의 언급도 없었다. 보다 못한 이장이 매매계약서를 쓰며 봉분주변 50평만 따로 떼 내어 팔기로 하고 거래는 성립되었다.

 

계약금을 받은 또생씨가 일본인 장모를 모시고 실로 모처럼 언양장에 가서 아이의 기저귓감과 미역을 사는 이튿날 까지 이장 역시 전날 신평의 과붓집에서 양껏 마신 정종이 다 깨지 않은 알딸딸한 정신으로 앞으로 또생씨가 차근차근 팔아먹을 땅들과 그걸 사들일 부산의 물주와 자신에게 떨어질 구전과 신평의 과수댁을 떠올리며 종일 흐뭇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마침내 죽은 선 영감과 등말리의 조동댁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이가 태어났다. 하필이면 딸이었다. 좀처럼 바깥출입이나 외간과의 접촉도 없던 이 적막한 외딴집에서 간간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또생씨는 여전히 두문불출이었고 한국말이 서툰 장모와 아내도 밖으로 나올 염을 않았다.

아이의 삼칠일이 되는 날 강당이장이 미역을 한 곽 사들고 외딴집을 방문했다. 깜짝 놀란 또생씨가 탁주라도 받으러 가려고 하는데 손사래를 치며 주저앉힌 이장은 이러 저리 집 안팎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본인 장모가 깔끔한 성격인지 집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그 깨끗함 뒤에는 어딘가 궁색하고 쓸쓸한 가난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보통 가정이면 흔히 느낄 수 있는 밥솥에서 올라오는 김이나 김치와 된장찌개냄새에 방구석에 걸레나 빗자루처럼 흔하게 흩어져있기 마련인 먹다만 고구마나 삶은 밤, 하다못해 겨울밤에 움 속에서 꺼내다 먹는 무동가리 하나마저 없었다. 흔히 하는 무시꼬랑대기 하나 없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아이의 이름은 지었냐는 물음에 또생씨는 문득 생각난 듯 이장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하하, 우리 백 서방이 뭘 좀 알기는 알구먼. 아이 작명이야 원래부터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것이 상례인데. 안 그래도 제 외할아버지 되는 선 영감이 저 아이를 못 보고 눈을 감아 많이도 섭섭할 텐데 늙어가며 만났지만 죽마고우 다름없는 내게 작명을 부탁하니 참으로 흥감시럽고도 고맙구만. 그러고 보니 우리 백 서방이 말은 없어도 참으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여.”

신이 나서 방금 수염이라도 쓸어내리듯 노란 솜털 몇 개가 앙상한 턱주가리를 한번 쓸어내리고 한참이나 생각이 잠기더니

“그래 가을이가 좋겠구먼. 박가을. 어이, 아이아비 자네는 어떤가?”

“글쎄요. 그럴 듯한 것 같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하 많은 이름을 두고 왜 낙엽이 지는 가을인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이 사람아, 가을엔 낙엽만 지는 것이 아니라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열매를 따고 추수를 하는 가장 배부른 계절이 아닌가, 땅 파먹고 사는 농촌에서 등 따시고 배부른 것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힐책하듯 바라보자

“글쎄요, 듣고 보니 이장님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여러 말 할 것 없네. 그렇게 하도록 함세.”

“그런데 한문자가 있기나 한가요? 가을이란 한문이 말입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꺼림칙한지 또생씨가 재차 못마땅한 표정을 보이며 한문글자까지 들고 나오자 깜짝 놀라 움찔하던 이장은

“이 사람아, 세상에 한문 없는 글자가 어데 있노? 가자는 흔해빠졌고 을 자는 새 을(乙)자가 있으니 절세가인이 되게 고울 가(佳)자에 새을자로 하세. 집안을 명랑하게 밝혀줄 정도로 늘 재잘거리는 고운 새로 말이야.”

“...”

달다 쓰다 말이 없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하는 모양이었다.

돌아가려고 일어서던 이장이

“참, 기왕 온 김에 아이얼굴이나 보고 갈까? 삼칠이 지났으니 크게 가릴 것도 없고 내가 또 꼬치 밭에 터를 팔아 줄줄이 남동생이나 한 댓 놈 태어나게 축원도 하고.”

안방으로 눈길을 돌리자 일본인 장모가 눈치를 채고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안고오자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이장이

“어허, 이것 참 경사이자 큰일일세. 이제 겨우 세 칠된 아이가 이렇게도 고울 수가 있는가? 이건 천하절색 양귀비나 왕소군, 아니 서시가 울고 갈 정도군. 백 서방자네, 어서 삽짝 앞에 오동나무나 두어 그루 심어야겠네. 나중에 삼이부제 온갖 총각들이 딸 도라고 몰려오면 그 중 한 놈만 사위삼고 나머지는 목이라도 매게 말이야.”

껄껄 웃더니 그 조그만 얼굴에 말간 눈동자며 섬세하게 깜빡거리는 속눈썹과 쌍꺼풀에 오뚝한 콧날과 엄전한 턱과 볼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어다본 뒤에

“이것 참, 이름을 다시 보름달로 만월(滿月)이나 윤월이로 바꿀까? 아니야, 천재박명, 미인박명이라고 하는데, 박서방 이 사람아, 이 아이가 보통 인물이 넘어 곱기야 한이 없겠지만 두루두루 신경 써 가르쳐서 조신하게 키워야 할 것이야.”

입맛을 쭈욱 다시면서 돌아갔다.

그러나 한 다섯 쯤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이장의 축원과 달리 아이가 돌이 지나고 또 돌이 지나 다섯 살이 넘어도 그 외딴 집에 다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만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되어도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어 가을이란 이름마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또생씨는 단 한 번도 논밭을 둘러보거나 곡식을 심을 엄두를 내지 않았으니 말이었다.

ⓒ서상균

이어 가천이장의 그 기나긴 속의 천불이 마침내 꺼지는 날도 어김없이 다가왔다. 아이가 자죽자죽 걸음을 떼기 시작하던 어느 봄 그러니까 선 영감이 죽은 지 삼년반이 지나던 봄에 느닷없이 또생씨가 이장을 찾아왔다. 일구다 만 언덕배기를 좀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이장은 ‘오호라. 바로 이것이구나,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손뼉이라도 칠 듯이 쾌재를 불렀다. 마침내 생활비가 떨어지고 양식이 떨어지면 언젠가는 땅을 팔아먹을 그날을, 자신에게 땅을 팔아달라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었다.

사실 선영감이 양식을 위해 사두었던 논 닷 마지기의 소작료, 그것도 이장자신이 소개해 가을마다 소작인에게 닭 마리에 막걸리나 얻어 마시는 그 다섯 섬 정도의 나락으로는 선영감이 남겨준 예금이 떨어지는 그 순간 양식은 겨우 될지는 몰라도 자잘한 속옷에 성냥, 비누, 석유, 수건에 가끔 먹는 생선까지 사기에 턱없이 부족할 것이었다.

거기에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돈이 곱빼기로 들어갈 것은 너무나 빤한 일, 마침내 또생씨가 땅을 내어놓고 그걸 소개하면 자신에게는 또 다시 상당한 고물이 떨어지고 그 고물로 신평 삼거리, 통도사 절 입구의 살짝곰보주모와 술판을 벌이고 막걸리에 오징어회, 소주와 정종에 마른 문어다리나 귀한 오뎅안주로 좋은 세월을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5년 후 또생씨는 다시 이장을 찾아가 이번에는 밭의 절반을 떼어 팔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제 일흔이 넘어 이장자리를 넘겨주고 택호만 구장댁으로 남은 이장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천천히 신평으로 걸어가 거간꾼 철물상에 땅을 내놓고 얼마 뒤에 매매가 성립되어 또 얼마간의 복비를 챙겨 과붓집에서 거나하게 마시더니 인사불성이 되어 코로나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술병이 들어 자리보전을 하던 이장은 그길로 감기몸살합병증으로 겨우내 시난고난하다가 음력 2월 초하루 영등할미가 내려오던 바람이 드세던 초봄에 맥없이 죽고 말았다.

그렇게 태어난 가을이가 처음 등말리의 할아버지 집에 걸음을 시작하던 돌잡이시절부터 그렇게 손자를 고대하던 조동댁은 영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우선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도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그 많은 재산이 또생이의 몫이 되고 자신에게도 뭔가 팥고물이 떨어지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작은 들내, 큰 들내, 강당마을, 주축마을 할 것 잆이 가천바닥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선말을 모르는 또생씨의 처와 장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조동댁 자신의 배속으로 나와 참으로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그 또생씨가 게으르기가 보통이 아닌 천하제일의 농땡이로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 몸 하나 편하다면 앞집, 옆집, 뒷집, 삼이부제는 물론 조선천지가 다 망해도 그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결국은 한 필지 두 필지 산과 밭이 팔려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벌써 재산이 많이 축이 나고 미구에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어 전답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 언젠가는 집마저 날아가고 네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으리라는 소문이었다.

 

그보다 더욱 조동댁의 마음을 휘저어놓은 것은 바로 그 아이가 기가 막히게 예쁘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동그랗고 눈동자가 커다란 그 아이의 눈은 자칫 겁이 많아 보이는 그런 큰 눈이 아니고 흰자위와 검은자위가 너무나 뚜렷하여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나 깜찍하도록 예쁜 얼굴이었다.

손녀의 얼굴을 보러간 조동댁은 너무나 깜찍하게 예쁜 얼굴을 보고 자신의 치마 밑에서도 이렇게 예쁜 계집이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사실 지금껏 자신이 낳은 여섯 명의 딸이나 그 딸들이 낳은 손녀들이 누구하나 인물 좋다, 절색이다 소리를 들을 만큼 고운 여자가 없었고 겨우 면추(免醜)를 하거나 그저 볼만한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 년의 가시나가 참 삼동 갖게도 곱구나? 후제 사내를 여럿 신세 조지겠구나. 아무튼 애비야, 니는 아아 삼칠 지나면 삽짝 앞에 먼저 오동나무부터 심거라. 후제 총각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면 목이라도 매구로 말이다.”

연신 아이를 들어 올리며 싱글거렸지만 꼭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젖살이 올라 통통한 아이의 몸 덩이만큼 돈이나 금덩이가 생기면서 자신에게도 금방 한 움큼의 금싸라기가 쏟아질 것만 같으면서도 저게 과연 내 새끼가 맞는가, 천재박명, 미인박명이라는데 저 너무도 고와서 오히려 팔자가 세어 무슨 도움이라도 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아이 가을이는 두 손으로 꼭 쥐면 금방 으스러질 것 같은 작은 얼굴에 너무나 초롱초롱 아름다운 눈망울과 양귀비가 울고 갈 흰 피부며 콧날이며 남의 애간장을 다 빼놓을 듯 간지러운 눈웃음으로 다섯 고모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동갑의 고종사촌 자매들과 잘도 어울리며 명절을 넘겼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