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12)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⑫
대하소설 「신불산」(212)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⑫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8.07 07:00
  • 업데이트 2022.08.07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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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등말리 별곡(別曲)2⑫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아이 가을이는 두 손으로 꼭 쥐면 금방 으스러질 것 같은 작은 얼굴에 너무나 초롱초롱 아름다운 눈망울과 양귀비가 울고 갈 흰 피부며 콧날이며 남의 애간장을 다 빼놓을 듯 간지러운 눈웃음으로 다섯 고모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동갑의 고종사촌 자매들과 잘도 어울리며 명절을 넘겼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의 추석이 끝나고 조동댁의 일곱 아들딸이 몰고 온 근 서른 명이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날이었다.

“엄마, 나는 집에 안 가. 난 여게 할매하고 살 끼다.”

어미 품에서 빠져나와 마당귀퉁이로 내빼면서 가을이가 도리질을 했다.

“가자, 가을아. 인자 여게는 고모들이랑 니 사촌 금분이, 옥식이도 다 저거 집에 가고 아무도 없다. 니는 우리 집에 가야된다.”

과묵한 또생씨가 웃음을 띠며 좋게 얼렀지만

“싫어. 나는 안 가!”

냉정하게 뿌리치고 장독간으로 달려간 가을이가 싸리 소쿠리에 담긴 송편하나를 냉큼 집어 들더니 누가 빼앗아갈 것처럼 장독 틈에 몸을 숨기고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른 둘째고모가

“요 맹랑한 놈 좀 봐라. 콩만 한 가시나가 벌써 인물값을 하네. 인물 좋은 여자치고 고분고분한 여자가 없다더니.”

하면서 큰고모를 흘낏 쳐다보자

“엄마, 마 그래하소. 귀찮아도 한 며칠 데꼬 있으면 지가 엄마아빠 보고 싶어서도 갈라 안 카겠능교?”

신중한 큰고모가 조심스레 권하자 밑에 세 고모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모두들 조동댁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내사 마 모리겠다. 피양감사도 지 하기 싫으면 그뿐이라는데 할매 집에 있겠다는 걸 내가 우야겠노?”

조동댁이 시큰둥하게 받자 아비 또생씨가 킁킁 헛기침을 하자 무안할까봐 큰아버지 갑생씨도 일부러 따라 헛기침을 했다.

조동댁도 다섯 딸도 또 아이의 아비가 되는 또생씨도 그 아이가 멀건 죽에 김치동가리밖에는 먹을 것이 없는 적막한 제 집보다는 떡과 밤과 대추가 넉넉하고 여러 사촌들과 어울리는 할머니집을 좋아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헸던 것이었다.

다만 말이 잘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처음부터 겁을 잔뜩 먹고 시가집에만 오면 바들바들 떠는 새가슴이 된 또생씨의 아내는 얼굴이 사색이 되자

“가자!”

마침내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하듯 또생씨가 아내를 채근해 논길을 나섰다.

 

지금부터 명촌 본 마을을 지나 덕고개를 넘고 모래못을 지나 옛날 광대들이 머물렀다거나 강도들이 숨어있어서 이름이 그렇다는 광대고개를 넘어 화천마을을 끼고 한참이나 들길을 걸어가 작천정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옥산으로 길을 잡아 신불산보탕바위가 바라보이는 가달고개를 넘어 자갈동네, 수정동네를 거쳐 중남의 면사무소와 지서를 지나 아이 없는 여자들이 공깃돌을 굴리며 비손을 하는 요상한 바위구멍이 있는 공암(空岩)을 지나 신안 새뜰과 들내의 넓은 들을 가로질러 또 한참 걸어 강당마을에 이르면 다시 금강폭포 쪽으로 한참이나 걸어 또생씨의 외딴집에 닿으려면 가을이어미의 짧은 다리로는 세 시간이 훨씬 넘어야 할 것이었다.

친척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조동댁 내외와 큰아들 갑생씨, 그리고 수진이와 가을이가 남자

“우리 가을이 착하지. 큰아부지가 안아줄게.”

손을 내밀어 가을이를 안아 올린 갑생씨가

“수진야, 알라는 당분간 니가 좀 데꼬 놀아라. 할매한테 과일하고 떡도 한 접시 얻어다 믹이고.”

혀를 껄껄 차더니 이내 연장망태를 울러 매고

“아부지, 어무이, 지 갑니데이.”

하직인사를 하더니 다시 가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는 수진이에게 돈 몇 푼을 꺼내주었다.

“알라 까자나 사 믹이고 잘 데꼬 놀아래이.”

그렇게 어이아비와 떨어진 가을이는

“오빠, 수진이오빠!”

금방 애간장이 녹을 듯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수진이의 품에 안겨 섬세한 쌍꺼풀이 또렷한 눈을 생글거리며

“오빠, 철뱅이, 저 철뱅이!”

마당 가득히 날아가는 잠자리 떼를 가리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진이가 잠자리채를 찾으러 가는 사이 슬그머니 수진이 방에 놓인 송편 하나를 집어 냉큼 삼키다 수진이가 돌아올 때 쓰윽 손가락으로 입가의 노란 콩고물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대빗자루를 들고 나선 수진이가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삽작 가와 거름 밭을 여러 번 “옛다!”소리치며 내리쳤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다 겨우 빨랫줄에 앉은 놈 하나를 맨손으로 잡아 꼬리에 실을 매달아 건네주니

“야야, 오빠 최고! 수진이오빠 최고!”

외치며 졸졸 따라다니더니 햇빛을 받아 발갛게 반짝이는 높다란 감나무의 홍시를 따달라고 졸라 수진이가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주는 족족 먹기도 했다. 그렇게 해가 저물고 저녁을 먹고 나자 같이 자자는 할머니 조동댁을 기어이 뿌리치고 수진이 방에서 잠이 들었다.

그날부터 가을이는 하루 종일 수진이만 따라다니는 딸랑이가 되었고 수진이 역시 극진히 사촌동생을 챙겼다.

ⓒ서상균

어린 가을이야 그 천진난만하고 호기심 많은 나이에 사람소리 듣기가 힘든 워낙 고적한 집에서 늘 배고픈 상태로 지내다 식구 많고 먹을 것이 넉넉한 큰집이 좋았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수진이 역시 위로 나이가 엄청 많은 형이 있기는 하지만 집나간 지가 오래고 아비마저 늘 목수일로 집을 비우는데다 어미마저 할머니에게 쫓겨나간 그 '본 데 없고 배운 데 없고 눈치 없고 물체 느린 년의 더러분 궁가리에서 나온 자식'으로 치부되어 단 한 번 누구랑 어울려 따뜻한 말동무가 되거나 같은 방에 자며 남의 체온이 주는 온기나 몸 냄새나 숨소리가 주는 포근함도 느껴본 적이 없던 판에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깜찍하게 예쁜 여동생이 끔찍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제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다 슬그머니 잠이든 그 아이의 길고 날렵한 속눈썹을 보면서 어떻게 요렇게 예쁜 아이가 있을 수 있나, 내가 후제 요런 예쁜 각시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밤중에 아이가 잠이 깨어 칭얼거리거나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요강을 찾아오고 아침마다 씻기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잘 놀고 있으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수진이가 학교에 가고나면 가을이는 종일 말이 없이 가끔 막걸리나 마시며 불그레한 얼굴로 먼 산이나 바라보며 자신에게 말 한마디를 던지지도 않는 할아버지에게 몇 번 장난을 걸어보다 사람 좋게 빙긋 웃어보이고는 더 이상 반응이 없자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할머니를 따라 다녔지만 그저 무섭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혼자 나뭇잎이나 들꽃을 따거나 흙장난을 하면서 조용히 놀았고 조동댁 역시 별 내색 없이 자기 일에만 열중하면서 가끔씩 아이의 소재만 파악하는데 그쳤다.

그렇지만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그저 예뻐서 서로 껴안다 가시에 찔린다는 판에 세상에 제 새끼, 더욱이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예쁜 가을이를 전혀 귀히 여기거나 안아주는 일이 없는 것은 남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조동댁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이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다 타고난 운명이라 부모를 원망한다고 다시 고쳐질 일도 못 되지만 한 사람,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어 처음 남녀관계를 깨우칠 때 자신이 결코 잘 생기지 못했다는 절망감, 더욱이 누가 보아도 천하의 박색이라고 느끼는 여자의 열패감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엄청난 좌절이 되는 데 조동댁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래서 비록 밥술 깨나 먹으면서 아비가 인근에 상당한 명망이 있는 당당한 양갓집규수로 태어났지만 당시의 혼기인 열여섯을 훨씬 지나 열아홉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는 사이에 그녀의 절망감은 앞집, 뒷집, 옆집, 삼이부제를 비롯하여 길을 가다 만나거나 노리개를 팔러온 방물장수여편네는 물론 밥을 얻으러 온 거지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곱상하거나 사내가 인물이 훤하면 그만 주눅이 들고 질투심이 생기는 엄청난 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게 오래 되다보니 제 남편, 제가 낳은 자식, 심지어 두벌 새끼 손자에 까지 은근히 주눅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 판국에 보다보다 너무 고운 아이가 생기니 내 치마 밑에서 이런 양귀비가 울고 갈 미인이 나왔다는 기쁨보다는 그 콩만 한 아이에게 까지 질투심이랄까 주눅이 들면서 자꾸만 열아홉 새 색시 때의 그 훤하고 잘생긴 조동박손과의 첫날밤에 그 혼절이라도 할 것 같던 가슴의 울렁거림이 상기되며 저절로 얼굴이 붉어져 새삼 그 예쁜 손자를 안아볼 염이 없는 것이었다.

 

그랬다. 비록 이름만 양반이지 천석꾼이던 증조부 되는 이가 사람이 곧 하늘이고 밥이 곧 사람이라는 후천개벽의 동학도에 심취해 녹두장군이 들고일어난 저 갑오년 동학란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순무사를 내려 보냈을 때 괜히 언양현감 밑에서 온갖 토색질을 다 한 모 아무개 두 아전을 처벌해달라는 소장을 낼 때의 우두머리 소두(疏頭)가 되어 그들의 부정을 낱낱이 고발했지만 이미 민심수습을 명받은 순무사(巡撫使)마저 썩은 시절이라 적폐가 시정되고 포원(抱寃)을 행하기보다는 제 발로 호랑이굴로 들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탄원서의 비리를 규찰하기는커녕 엄히 조사하였지만 ‘내 여럿에게 탐문하고 관계부책을 샅샅이 규찰하였지만 특별한 부정을 발견하지는 못 했다, 사람이 사는 일에 의례히 작은 실수나 하자는 있기 마련이라 앞으로 이런 폐단이 내 엄히 경고하였으니 그리 알라는 두루뭉술한 답변에 벌건 마패를 조목마다 다섯 개나 찍어 소장을 되돌려준 것이 전부였다.

유림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해가 채 가기도 전에 소두를 비롯한 중심인물 셋이 관아에 잡혀간 것이었다. 나중에 시조부가 되는 이는 그 진정의 대표자 소두(疏頭)로 몰려 모진 고문의 여파인 장독으로 죽고 나머지 둘은 그나마 뇌물을 바친 후 초주검이 되어 풀려난 것이었다.

 

그런 집안에 조동댁이 시집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도저히 한 여자로서 귀하거나 곱거나 여자다운 기색은 없고 가는 눈에 찢어진 눈꼬리와 양 볼을 타고 흐르는 심술기가 잔뜩 흐르는 마마자국 때문에 비록 양반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혼담이 없을 것이 명약관화한지라 그 아비가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이미 반상이 무너진 세월이라 단지 남의 노비나 백정이 아닌 평민으로서 그저 몸만 건강한 사내가 내 딸을 데려간다면 그저 한 평생 먹고 살 양도는 가 될 논밭은 물론 그 사네의 직업에 따라 읍내 장터의 목 좋은 자리에 점방이라도 하나 내어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그런데 그 파격적인 조건이 제대로 읍내에 퍼지기 전에 누가 몰락한 의흥백씨네의 장성한 손자가 있다는 귀띔을 하여 혼담은 단 번에 성립되었다. 조동댁의 아버지가 죽은 소두 의흥백씨의 기개를 흠모하던 터라 더는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등말리에 미리 전답을 마련하고 새집을 지은 뒤에 혼사를 치르던 날을 조동댁은 지금도 생각하면 등줄기로 후끈한 기운이 흘러내리는 양 못 견디게 부끄러우면서도 한없이 황홀한 기분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화촉동방에 들어 미처 눈을 못 뜨는 각시에게 슬그머니 족두리를 풀어주던 그 나긋나긋한 손길과 비릿한 듯 향긋한 듯 또 달콤한 듯 그저 황홀하기만 하던 연한 술내가 풍기는 사내의 향기와 울렁거림, 방금 가슴이 터질 것 같아 금방이라도 손은 내밀면 어디선가 여자들끼리만 주고받던 이야기처럼 못 이기는 척 금방 가슴에 쓰러질 텐데 ‘허허, 이것 참!’ 누가 문구멍을 뚫을까봐 유심히 사방을 살피던 새신랑, 낮에 절을 올리며 슬쩍 쳐다볼 때 너무나 뽀얗던 피부와 우뚝한 콧날의 황홀한 신랑은 ‘그 참, 오늘만 날인가? 그만 잡시다.’ 술 냄새마저 향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그만 남의 속도 모르고 돌아누워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신부 집에서 묵는 사흘간은 물론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던 그날까지도 조동댁은 겉으로는 부끄럼을 타는 척하면서 흘끔흘끔 남편을 훔쳐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정말로 훤하고 단정한 인물이었다.

 

시집을 온 사흘째 밤이던가, 마침내 자리에 든 신랑이 차곡차곡 속옷을 벗길 때 조동댁은 그만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아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 하고 바들바들 떨었는데 이내 남편의 부드러운 손길이 손에서 가슴으로 또 그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려올 때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