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13)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⑬
대하소설 「신불산」(213)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⑬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8.08 07:00
  • 업데이트 2022.08.0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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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등말리 별곡(別曲)2⑬

시집을 온 사흘째 밤이던가, 마침내 자리에 든 신랑이 차곡차곡 속옷을 벗길 때 조동댁은 그만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아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 하고 바들바들 떨었는데 이내 남편의 부드러운 손길이 손에서 가슴으로 또 그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려올 때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 부끄러운 초야를 치른 이후로 첫아이, 둘째아이가 생긴 이후로, 아니 조금 과장해 지금까지도 조동댁은 남편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거나 무슨 원망을 하지 못했고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남편이 불편하거나 사내의 체면이 깎이는 일은 하지 못했고 그 어떤 부탁, 또 무언가 원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거절하지 못하고 모조리 다 들어주게 된 것이었다.

그저 남편이 하늘이었고 태산이었고 집안의 임금 가군(家君)이었고 여자가 살아가는 삶 자체이며 여자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다 조동댁이 양갓집의 규수로서 가정교육이 엄하고 부덕(婦德)을 잘 닦아서 만은 아니었다.

밥술이나 뜨는 집이면 굳이 양반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어느 규수나 다 알고 지킬 일이었지만 조동댁의 경우는 좀 달랐다. 당시의 보통 혼기인 열여섯을 훌쩍 넘기고 열아홉이나 되어 맞이한 신랑, 그것도 너무나도 훤하고 잘생긴 신랑과 비로소 합방(合房)을 이룬 밤의 그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의 교접, 그 혼절할 것 같은 황홀함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과년한 처녀로서 한 여자가 한 사내를 만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고 그 기쁨 끝에 아이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어는 보았지만 그 남녀 간의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사람의 애간장을 태우고 온몸을 녹여버리고 목소리와 숨길마저 자지러지게 하는 것임을 그녀는 남편과의 첫 교접에서 절절이 느꼈고 그 진진한 기쁨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처음 친정의 동방(洞房)에서도 시집을 온 이틀간에도 어쩐 셈인지 신랑은 소문처럼 아내의 몸을 탐하지 않고 슬쩍슬쩍 피해가는 것만 같아 가뜩이나 박색이란 자의식에 빠진 조동댁의 애를 태우고 죽고 싶은 절망감을 안겼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차마 남편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는 못 하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서 숨소리를 죽이며 남편의 거동을 살폈는데 아직 막걸리의 술기운이 약간 남은 남편이 나지막하지만 달콤한 목소리로 ‘당신 자는가? 이리 돌아 누워봐.’ 부르는 목소리에 혼절할 것 같았고 그리고는 눈앞에 새 천지가 펼쳐진 것이었다.

세상에 남자라는 것이 이렇게 여자를 정신없이 달뜨게 하고 미치게 하는 구나, 그래서 집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평생을 눈물로 보내는 여자도 있고 거칠고 막된 남편에게 저녁마다 눈텡이가 밤텡이가 되도록 얻어맞고도 찍소리 없이 남편의 아침상을 차리는 농사꾼의 여편네가 있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남들이 자신을 억척스럽다거나 심술궂다거나 귓불을 타고 흐르는 주근깨가 심청궂다고 해도 아무 대적도 않았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일하든 그저 남편 하나면 되었다. 아무리 고되어도 또 자식문제로 골치가 아파도 어쩌다 가끔 잠자리에서 ‘당신 요새 고생 많제?’ 한마디면 되었다.

그 한마디로 모든 피로도 씻기고 게으른 남편에 대한 원망도 녹아내렸다. 그저 모처럼 안아주는 부드러운 손길과 달콤한 숨결과 함께...

그런 조동댁은 시집오기 전 어머니가 들려준 내훈, 몇 가지의 당부 중에 한 가지인 <여자는 남자를 먹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 내어야한다, 돈이 없으면 머리채라도 잘라 팔고 재료가 지푸라기뿐이라면 하루 종일 다듬어서라도 남자 입에 넘어가게 보드랍게 다듬어야 한다.>는 말을 철칙으로 여겼다.

그리고 며느리와 딸들에게 답습시켰는데 뜻밖에도 원래부터 차분하지도 못 하고 거친 데다 솜씨도 없는 큰며느리가 쇠귀에 경 읽기로 배울 염을 내지 않자 ‘이년아 니는 우리 장남 굶기 죽을 일이 있나?’라고 몰아세운 것이 마침내 '본 데 없고 배운 데 없고 눈치 없고 물체 느린 더러분 년'으로 몰아 소박을 놓고 그 아들 수진이 형제마저 더러운 궁가리로 나온 새끼가 되고만 것이었다.

그리고 제 손녀인 가을이마저도 너무 잘 생긴 계집이란 느낌이 왠지 맘에 걸리면서 그 어린 것마저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무단히 거북하고 살갑지 못해 한번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살갑지가 못 했다.

 

잘해야 일주일, 고작 보름이나 넘길까 했던 가을이의 더부살이가 아무런 탈도 없이 하루하루 잘도 넘어가며 어느 듯 아이의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오르며 아침저녁으로 수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그 크고 맑은 눈과 속눈썹과 쌍꺼풀이 가을날 여울에 부서지는 물결처럼 반짝거려 수진이의 마음을 화롯가의 엿가락처럼 녹였다.

그러기를 근 한 달, 이것들은 지 새끼가 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라고 중얼대던 조동댁은 마침내 장에 가는 마을사람들에게 들내사람을 만나면 전하라는 연통을 넣어 아이를 데려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하마 또생씨가 오는가 싶어 아랫마을 지나 덕고개로 흘낏흘낏 살폈지만 도통 제 아이를 찾아갈 맘이 없는지 아니면 뜸을 들이는지 사흘이나 소식이 없더니 나흘째 다음 장날 전날에야 명촌 본 마을에서 등말리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키 큰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뭔가 단단히 나무라고 혼을 내려던 조동댁은

“아부지, 어무이 지 왔심더.”

하고는 마루에 주저앉아 휴우, 한숨을 내쉬는 아들의 깡마르고 지친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추석에 본지 한 달 만에 아들은 눈에 띄도록 수척하고 눈이 풀려있었다.

들리기로는 논 다섯 마지기의 도조로 나락 닷 섬을 받아 네 식구가 먹고 사는데 아직도 근 오백평의 밭이 있건만 하다 못해 무, 배추라도 심을 생각을 않고 그냥 놀린다는 것이었다. 나락 다섯 섬이면 잘해야 쌀 스물 남은 말이 나오는데 반찬도 없는 밥이라면 한 사람이 하루 3홉, 한 달이면 아홉 되, 세 식구만 해도 두말 칠 홉, 일 년에 무려 석 섬이 두 말이 넘게 소요되는데 거기다 어른 한 몫을 더 먹어대는 가을이까지 달렸으니 절반은 죽으로 때워야 할 것이 뻔했다.

그것 말고도 일 년에 한 두 번 그 모자라는 양식을 장에 메고 가서 돈을 사서 성냥이니 비누니 양말을 사야하니 삼시세끼 먹는 죽마저 점점 멀게질 것이 따 논 당상이었다. 아니 양식이 모자라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속에 글까지 든 사람이 어디든 나가서 돈을 벌면 되련만 제 아들인 또생씨가 열손을 제배하고 천정만 바라보고 누웠으니 조선말이 안 통하는 며느리나 안사돈을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농사꾼마을에 게을러도, 게을러도 등말리 백 서방만 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흉을 보았다. 무려 5백 평의 넓디넓은 밭이 있겠다, 거기에 무 배추나 고추는 몰라도 대충 심어놓기만 하면 제철에 소복하게 뿌리가 드는 감자나 고구마만 심어도 대여섯 가마니가 나올 것이 빤한데 가난은 나라님도 못 말리지만 깨알받은 것은 중국황제 아니 미국대통령이 와도 못 말린다고 흉을 보았다.

그도 아니라면 그 묵정밭에 냉이나 민들레, 고들빼기가 지천으로 돋아 온 동네 사람들이 캐다 먹지만 정작 주인네는 한번 나와 보지도 않으니 반찬이라고는 일 년 내내 장에서 사온 소금과 간장, 된장뿐이라며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고 죄 없는 얼라만 불쌍타고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우거진 잡초를 아침저녁 밥을 지을 때 한 아름씩 베어다 쓰는 것은 비록 밥 팔아서 똥 사먹는 격이지만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웃기도 했다.

ⓒ서상균

김치와 장아찌로 밥상을 차리던 조동댁이 아무래도 아쉬운지 닭장에 들어가 갓 낳은 달걀 두 개를 가져와 찜을 찌더니 됫병에 담아 샘터에 담가둔 농주를 꺼내와 상위에 놓고

“얹힐라, 천천히 묵어라!”

필시 죽이나 먹고 고개가 세 개나 되는 20리가 길을 걸어온 아들이 서글프고 불쌍해 혀를 끌끌 차는데 이미 점심을 먹었지만 아들 상에 놓인 달걀찜을 멀거니 바라보던 영감 조동백손이 할멈의 손에 들린 농주 병을 보고 어험 헛기침을 하며 마루로 나오자 재빨리 부엌에서 밥사발 하나를 들고 와 영감부터 냉큼 한잔 부어 올리며

“손님 덕에 이밥이라고 이 핀부터 한잔 잡수소.”

눈에 광채를 띄자 골똘히 숟가락질을 하던 또생씨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남은 농주 한 잔을 마시고 얼굴이 불콰해진 또생씨가

“가자!”

장독대에 숨은 가을이를 찾아 나오자

“싫어! 나는 안 가! 난 수진이오빠하고 살 끼다!”

가을이 따라가지 않으려고 대롱거리는데

“아부지, 어무이 지 갑니더.”

가을이를 달랑 둘러업은 또생씨가 논길을 휘적휘적 걸어 화천과 명촌에서 산전리 면사무소나 길천리 초등학교로 가는 사광리와 등말리사이의 치도(治道)에 닿았을 때였다.

“오빠! 수진이오빠!”

아비의 등에서 빠져나온 가을이가 종종걸음으로 치도를 뛰는데

“가을아, 가을아!”

저만큼 후리방향에서 숨 가쁘게 달려오는 사내아이 하나가 보였다. 가을이가 숨이 차 달리기를 멈출 때쯤 책보 속 양은도시락의 반찬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을아, 가을아!”

아이부터 안아 올린 수진이가 제품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가을이를 한참이나 다독이고 나서

“잔아부지 오싰능교?”

인사와 함께 호주머니에서 눈깔사탕을 꺼내 가을이의 입에 넣어주더니 다시 돈 몇 장을 꺼내 손에 쥐어주며

“큰아부지가 준 까자 값 남은 기다.”

일부러 큰소리로 말하고

“가을아, 인자 가서 두 달 남짓이면 또 설이다. 그때 또 와서 오빠랑 놀자. 가을이 착하지? 가을이는 오빠 말 잘 듣지?”

얼러서 또생씨에게 업히게 하고 떠나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문득 “후웁” 소리와 함께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도시락을 달그락거리면서 논길을 달려갔다.

 

다음 설에 등말리에 온 가을이는 설과 보름과 이월초하루 영등날이 지나고 수진이의 봄방학이 끝나고 5학년에 올라가는 양력 3월에야 제 집으로 돌아갔다. 한참 클 나이에 먹을 것이 부족한 제 집보다야 삼시세끼 거르지 않고 가끔 비린 것을 먹는 큰집에 머무는 것을 차마 박정하게 끊을 수가 없어 조동댁도, 영감도 타박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덩치는 동갑내기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너무나 적막한 집에 살면서 마을에 나가거나 누가 찾아오거나 친구라고 없이 자라 아무래도 말이 늦고 어둔했다. 그렇지만 눈치하나는 비상하게 빨라 수진이와 조동댁은 물론 먼 산을 보며 혼자 읊조리는 제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표현은 아무래도 서툴렀다. 무엇보다 아는 단어가 적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자란 가을이는 어느 새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될 나이가 된(사실은 언양읍내의 중학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수진이를 따라 골탱이골 밭가에 심은 감나무에도 올라가고 집 뒤 칼치못에서 낚시도 하면서 마치 사내처럼 자라났다.

가끔 논길에서 마주치는 마을사람들은 ‘조동댁 둘째아들 또생이가 오모짱 같은 왜색시를 얻어 인형처럼 예쁜 딸을 낳아 평양감사가 뒤돌아볼 정도라던데 우째 그 이쁜 애가 꼭 사내처럼 자라 나중에 사내 여럿을 말아먹겠다.’ 며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껄껄 혀를 차곤 했다.

 

음력설이야 어차피 겨울방학중이라 설음식이 바닥나고도 한참이나 더 등말리에 머물 수 있었지만 이튿날부터 바로 등교를 해야 하는 추석이야말로 학생이 된 가을이의 고민거리였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