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14)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⑭
대하소설 「신불산」(214) 제3부 열찬, 또 하나의 방랑자 - 제11장 등말리 별곡(別曲)2⑭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8.09 06:50
  • 업데이트 2022.08.09 1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등말리 별곡(別曲)2⑭

음력설이야 어차피 겨울방학중이라 설음식이 바닥나고도 한참이나 더 등말리에 머물 수 있었지만 이튿날부터 바로 등교를 해야 하는 추석이야말로 학생이 된 가을이의 고민거리였다.

그 사이에 일본인 할머니는 설사병을 못 이기고 눈을 감아 선 영감 옆에 묻혔고 영양부족으로 젊은 나이에 벌써 걸음을 잘 못 걸어 시집에도 오지 못 하는 제 어미를 떼어놓고 큰집에 오가는 가을이는 휘적휘적 천천히 걷는 아버지를 저만큼 떼어놓고 걷다 가파른 가달고개나 광대고개에 이르면

“아부지, 되 죽겠나? 내가 궁디 밀어주까!”

빤히 올려다보며 길을 재촉하고 등말리 치도에 이르면

“오빠! 수진이오빠!”

소리쳤다. 학교 때문에 추석 이튿날 제 집으로 돌아가면 주말에 반드시 혼자서 그 먼 산길을 걸어 등말리로 돌아갔다.

마저 먹지 못하고 장독간의 싸리채반, 산데미에 널어놓은 정구지찌짐과 호박떡과 콩고물, 팥고물이 들어간 두 종류 송편과 문어다리가 맘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실컷 먹고 떠들며 수진이를 따라다니던 가을이가 일요일 오후 제집으로 돌아갈 때면 조동댁은 남은 찌짐이나 송편을 함지에 담아주었고 수진이는 산에서 주운 밤이나 홍시가 다 되어가는 빨간 빠물래기 감을 보따리에 싸주었다.

가을이의 내력을 대충 아는 명촌이나 화천사람들은 나이 어린 계집애가 간도 크게 잘도 다닌다고 했지만 가달고개 넘어 자갈이나 수정마을사람들은 안 그래도 자수정(紫水晶)을 캐느라고 산기슭에 크고 작은 동굴의 아가리가 입을 딱 벌린 옥산 아래의 고갯길에 ‘옛날 이약에 나오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야시의 화신 같은 기가 막히게 예쁘고 눈웃음과 목소리가 간드러진 요물이 돌아다닌다.’고도 했고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는 머슴애들은 가달고개에 중학교영어책에 나오는 요정(妖精)이 돌아다닌 다며 그 기가 막히게 예쁜 계집애의 소문이 자꾸만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조금씩 음식을 얻어가던 가을이가 어느 때부터 할머니에게 이것저것 찌짐이나 떡을 달라고 하더니 또 어느 땐가부터 영감 상에 올리려고 남겨둔 조기나 간 고등어를 제 손으로 슬쩍슬쩍 보따리에 넣고 찹쌀이나 팥을 좀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천성이 냉정한 조동댁도 제 속으로 낳은 또생씨를 갖다 주겠거니 못 이기는 척 넣어주거나 없어진 음식도 모른 척 했다. 그런데 더욱 맹랑한 일은 또 언제부턴가 가을이가 빈병에다 익어가는 농주를 용수로 눌러 뜬, 잔치 때 상객들의 상에나 놓는 최상급 웃물이나 막걸리를 넣어 옆구리에 차고 가는 것이었다.

물론 제 아비를 먹이려고 하는 짓이겠지만 이제 제법 여자 티가 나는 열한 살의 계집애가 술병을 차고 다니는 것이 상스럽다는 말이 마을에 돌기도 했고 그 맹랑한 가시나가 가달고개 만디에서 안주보따리를 척 펼쳐놓고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더란 이야기가 자갈이라고 불리는 작하리에 돌기도 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는 추석이 되기 보름전의 토요일 오후에 책보를 맨 체 큰집으로 와서는 할머니 조동댁이 보이지 않는 사이 쌀과 보리쌀을 서너 되씩 퍼 자루에 담고 수진이가 주는 햇밤도 한 되 넘게 이고 그 먼 길을 낑낑거리며 넘어가기도 했다. 이미 양식이 떨어져 가을걷이를 해 나락도조를 받기까지 곱다시 세 식구가 굶고 들어앉은 모양이었다.

 

그런 가을이가 열세 살이 되던 6학년의 겨울방학에 버든의 금찬씨가 등말리로 시집을 갔는데 아무리 한방에서 안겨 잔 오랍동생 사이지만 ‘시누는 요렇게 시누 짓을 해야 제 맛이라며 어느 밤에는 간도 크게 제 오라비와 올케가 자는 신혼방의 한가운데에 떡 버티고 잠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넉살도 좋게 이튿날 할머니보다는 말붙이기가 만만한 금찬씨에게

“새이야, 저 찹쌀 한 되 주면 안 되나? 동부 콩도 울아부지 좋아하는데...”

하면서 한보따리를 챙겨 덕고개를 넘어갔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마에 여드름이 돋아나면서 마을사람들의 탄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예쁜 것은 둘째 치고 아무래도 저 아이의 눈이 사내를 여럿 울리겠다, 아니 한 여남은 명은 팔자를 조지겠다고 지청구를 해댔다.

희고 검은 빛이 너무나 선명한 크고 깊은 눈에 묘한 광채를 내며 번쩍이는 그 눈빛이 너무나 심상찮아 그 어린 눈빛을 들여다보는 사내들의 가슴이 써늘할 정도였던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못 가는 거야 너무나 당연지사, 심심찮게 등말리를 들락거리던 가을이가 어느 때부턴가 보이지 않더니 그해 추석에는 또생씨 혼자 휘적휘적 덕고개를 넘어왔다.

가을이는 왜 안 오느냐니까 대처로 가서 돈도 벌고 야간학교도 다닌다면서 부산으로 떠났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세월이 7, 8년이나 흘러 이제 마지막 남은 밭 500평도 300평이나 떼어 팔고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또생씨가 챙겨 먹이는 판으로 집안은 곤궁하고 벌써 스무 살이 넘어 시집을 가고 남을 나이의 가을이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또생씨가 마지막의 고비에 봉착해 그야말로 집구석이 콩가루 집안이 되고 부엌 아궁이에 거미줄이 앉는 판에 쥐구멍에도 볕이 들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본의 큰 딸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간의 돈이 오더니 마침내 또생씨가 기사회생할 찬스가 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난겨울 대보름이 지나자 말자 편지봉투에 빨갛고 파란 빗금이 쳐진 항공우편 하나가 등말리 백갑생 앞으로 도착했는데 모처럼 돋보기를 찾아 끼고 누군가 주소를 읽어보던 조동백손의 손이 금방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봉투말미에 적힌 이름이 분명히 백선필, 아마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가맣게 잊어버렸던 큰딸 선필이었다. 선필이가 일본에 살아있고 한일국교정상화 덕분으로 곧 찾아온다는 말을 듣자 조동댁의 그 심술이 덕지덕지 흐른다는 메마른 뺨 위로 금방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거친 등말리에서 천치 같은 영감을 모시고 그 많은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여장부가 되었을 뿐이지 어느 부모치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사람이 있으랴?

하물며 한 여자, 한 어미로서 그래도 아직 새색시로 잘 생긴 신랑의 얼굴만 쳐다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리던 시절 제 배속에 처음 자리 잡아 열 달이나 머물며 남편의 재미, 어미가 되는 재미를 가르쳐주며 이어 일곱이나 되는 아우들이 태어나게 어미의 몸을 찢고 나온 문 여리 첫 자식, 살림밑천이라는 바로 그 첫딸이 아니던가? 한참이나 울먹이다 마음을 진정시킨 조동댁은 이어 영감이 들려주는 딸이 겪은 저간의 이야기에 기가 막히고 목이 메여 다시 한 번 꺽꺽거렸다.

열세 살 어린 나이로 부산의 어느 집 식모로 간 뒤, 주인집의 가세가 기울어 잠시 방직공장에 다니다 다시 어찌어찌 일본내지에서 온 헌병장교의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가 방학 중에 부모를 찾아온 열여섯 살짜리 아들에게 그만 겁탈을 당했는데 그게 열다섯 때의 일이라고 했다.

그 어린 나이에 얼굴이 푸석푸석 부어오르고 밥을 잘 먹지 않아 이상하게 여긴 주인마누라의 추궁에 아이를 밴 것이 들통이 나 한 바탕 홍역을 치렀는데 놀라기도 하고 입덧도 심한 데다 너무 못 먹어 마침 아이가 유산되자 사려가 깊은 주인마누라가 일본내지에서도 아주 멀리 떨어진 삿뽀로인가 어디의 먼 친척집의 양딸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너덧이나 낳은 뒤 대동아전쟁이 나고 일본이 패전해 조선이 독립하고 또 6.25로 아주 가망이라고는 없는 나라처럼 보일 때까지는 완전히 일본인행세를 하며 자식들에게 자신이 조선 사람임을 숨기고 살았는데 얼마 전 사십 년을 해로한 일본인 남편이 죽고 마음이 허랑하던 판에 이제 한일회담이 성사되어 곧 양국 간의 왕래가 가능하다는 소식에 늦게나마 연락을 해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아버지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시고 안 계실 것 같아 우선 큰 동생명의로 편지를 보내지만 만약에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살아계신다면 입국이 허용 되는대로 명촌으로 돌아가 늦게라도 효도를 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말미에는 아마 추석까지는 힘들지 몰라도 잘하면 음력설 전에는 고국 땅에 가서 부모님을 뵐지도 모른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모처럼 먹을 갈고 돋보기를 닦아 쓰며 <가아(家兒) 보아라>로 답장을 쓰는 조동박손과 너무 기뻐 펄펄 뛰는 조동댁의 모습을 보고 내막을 알게 된 등말리마을이 왈칵 뒤집혔다. 그리고 곧 일본에서 뭉칫돈이 송금되면 등말리 조동댁은 단숨에 팔자가 확 필 것이라는 소문도 퍼졌다. 그 때는 아직 수진씨가 군대에 있던 시절이라 금찬씨는 그저 그런가 보았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앞으로 다시 엄청난 손이나 치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서상균

선필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딸은 장남 갑생씨보다도 두 살이나 많아 그해에 벌써 쉰한 살이나 되는데 열서너 살 때 대처로 돈 벌러 나간 것이 3년, 5년, 십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조동댁은 이미 객지 어디에선가 굶어죽든가 아니면 일본인에게 잡혀 대신따이라고 부르는 정신대나 만주의 아편쟁이한테라도 팔려간 모양이라며 이미 죽은 자식이니 다시는 들먹이지 말자고 영감과 단단히 약속을 하고 나머지 일곱 아들딸에게도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못하게 단단히 오금을 박았던, 말하자면 이미 버린 자식 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딸이 살아서 나타난다니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가뜩이나 가슴이 벌렁거리는 조동댁에 석 달이 못 가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들었으니 답장을 받은 큰 딸이 조선의 조카뻘, 손자뻘 되는 아이들에게 주라며 연필과 공책 수십 다스를 보내면서 약간의 송금까지 해온 것이었다.

우리 돈으로 겨우 송아지나 한 마리 살 돈이었지만 보릿고개의 농촌으로서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당장 조동백손의 상차림이 달라졌다. 하다 못 해 간 고등어라도 생선이 떨어지지 않고 상에 올라가고 농주를 자주 담아 웃물도 넉넉히 마셨다. 한일협상의 세부합의가 늦어지면서 그해에는 귀국을 못 한다는 소식이 왔지만 늙마에 생각조차 않던 큰딸로부터 엄청난 호사를 누리며 얼굴빛이 더욱 발갛게 익어가던 조동백손은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자던 잠결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날 가을달이 하도 밝은 데다 풀벌레마저 서글프게 울어 문득 일본에 던져진 큰딸이 생각나 손부 금찬씨 몰래 할멈에게 밤늦게 술상을 봐오게 하여 그야말로 음풍농월(吟風弄月) 달빛아래서 야심하게 마신 것이 탈이 난 모양이었다.

조동댁이 슬피 울었지만 이미 팔순이 넘은 나이에 친손자, 외손자에 증손자까지 근 백 명이 가까운 호상인데다 먹고 죽은 귀신은 화색도 좋다고 마지막 밤까지 기분 좋게 한 잔을 하고 죽었으니 그만하면 팔자 중에서도 상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 떨어진 양반꼭다리로 그저 인물 하나 훤한 덕으로 못 나고 드센 조동댁에게 팔리다시피 장가들어 한 평생 숨소리 한 번 크게 못 내고 치마폭에 숨어살다 죽어간 맥없는 인생이라고 돌아서서 흉을 보는 명촌 본 마을의 한학이나 한다는 노인들도 있었고 억지로 편해도 제 몸 하나 편하게 살다 가면 더 이상 상팔자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조동백손의 죽음이 큰딸을 찾게 된 경사의 뒤끝인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면 궂은일은 절대로 단번에 거치지 않는다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이 벌어졌으니 아버지초상을 치르고 이제 다시 공사판이 있는 운문재너머 북대암인가 어디로 떠나려던 장남 갑생씨가 몸이 노곤하다며 자리보전을 하더니 점점 기운을 못 차리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어 코로나 택시를 불러 언양 김태진병원에 갔더니 너무 살이 쪄 뒤룩뒤룩한 의사가 말갛게 벗어진 대머리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너무 늦었다고, 왜 이렇게 간이 돌덩이처럼 굳고 나서야 병원에 왔냐고 책망을 하더니 부산의 큰 병원에 가도 아마 소용이 없을 거라고 집으로 도로 보냈다.

그렇게 되돌아온 갑생씨는 이튿날 새벽에 장남의 손을 꼭 쥐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어머니 조동댁 앞에서 딸깍 숨이 끊어지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관보를 받고 수진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례가 끝난 뒤였고 그 엄청난 변고를 수습하고 귀대한 수진씨가 이듬해 제대를 하고 돌아올 때까지 등말리는 다시 긴 침묵과 우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명절, 혹은 장날에 졸지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데다 며느리를 쫓아낼 정도로 집착하던 어머니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다섯 명의 딸과 사위들이 다시 찾아오면서 등말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비록 두 사람이 죽기는 했지만 우선 집안의 중심인 수진씨가 돌아왔고 넷이나 되는 사내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면서 잠자리를 잡거나 술래잡기를 하고 때로는 먹을 것만 있으면 제가끔 제 몫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고 가끔은 저들끼리 치고받고 울기도 하니 그 절간 같은 집안이 시끌시끌하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했다.

 

〈※ 이 글은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