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19) 하동 악양의 정암 이형규 선생님 한옥 방문
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19) 하동 악양의 정암 이형규 선생님 한옥 방문
  • 조해훈 기자 조해훈 기자
  • 승인 2022.09.10 09:00
  • 업데이트 2022.09.12 15: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향인 악양 악양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
60년 전 100년 된 아흔 칸 집 구입해 거주
조씨 고택 방문, 그 집 할아버지와 대화도

추석 이틀 전인 9월 8일 오후에 경남 하동 악양 정서리에 있는 정암(亭巖) 이형규(李衡圭·89) 선생님 한옥을 방문했다.

정암 선생님은 하동향교에서 20여 년간 여러 일을 돕고 계신다. 현재는 향교 감사직을 맡고 계신다. 고향이 악양인 선생님은 평생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악양초등학교 교감으로 정년을 하셨다. 정암이란 호는 우리나라 향교 역사상 드물게 하동향교에서 전교(典校)를 여섯 차례나 지내시고, 성균관장 직무대리를 하셨다가 지난해에 84세로 별세하신 하윤(河允) 정한효(鄭漢孝·1938~2021) 선생님이 지어준 것이다.

필자가 경남 하동 악양의 한옥에 사시는 정암 이형규(왼쪽) 선생님 댁 대청마루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정미아 하동향교 사무국장
필자가 경남 하동 악양의 한옥에 사시는 정암 이형규(왼쪽) 선생님 댁 대청마루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정미아 하동향교 사무국장

이날 정암 선생님의 댁을 방문한 것은 하동향교 정미아(鄭美兒·56) 사무국장님의 도움 덕분이었다. 며칠 전 정 사무국장님의 주선으로 조갑룡(71) 전 부산영재교육원장님과 함께 필자도 정암 선생님 댁을 방문하기로 약속을 해놓았다. 하지만 “마을 할머니들을 면사무소까지 태워가라”는 목압마을 이장님의 지시가 있어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 원장님과 정 사무국장님만 정암 선생님 댁을 방문하셨다. 필자는 다음 기회를 갖기로 했는데 마침 8일 오후에 약속이 된 것이다.

정암 선생님은 몇 달 후면 아흔인데도 정정하시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다 선생님 댁이 큰 한옥으로 소문나 있어 필자는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암 선생님 본채 전경. 사진=정미아 하동향교 사무국장
정암 선생님 본채 전경. 사진=정미아 하동향교 사무국장

실제로 방문하니 예전에 적어도 아흔 칸은 되었을 성 싶었다. 대문을 들어서니 큰 마당 중간에 화단이 조성돼 있고, 좌우로 긴 건물이 있었다. 좌우의 건물들이 이전에는 한옥으로 돼 있었을 터인데 지금은 현대식으로 개조를 해놓았다. 선생님의 자손들이 많아 이들이 오면 쉬고 머물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외동이어서 19세 때 일찍 결혼하시어 슬하에 7남매를 두셨으며, 손자와 증손자까지 보신 상태였다. 원래는 화단 자리에 기와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고 했다.

70대 초반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정하셨다. 선생님은 마당에서 따신 거라며 포도를 내놓으셨다. “혼자 살다보니 집이 영 그렇습니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집이 너무 깔끔해 선생님의 성품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모님은 10년 전 쯤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단아하고 점잖은 모습에다 말씀도 조용하게 하셨다. 본채의 규모가 아주 컸다. 본채의 방마다 다니며 구경을 했다. 천장 대들보에 붓글씨로 ‘龜 開國五百三十四年乙丑三月初一日丁未時 上樑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龍(구 개국오백삼십사년을축삼월초일정미시 상량 응천상지삼광 비인간지오복 용)’이라 적혀 있었다.

대문 들어서면 오른 쪽에 있는 긴 건물. 이 건물 내부에 가족이 사용하던 생활물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사진=조해훈
대문 들어서면 오른 쪽에 있는 황토색의 긴 건물. 이 건물 내부에 가족이 사용하던 생활물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사진=조해훈

즉 을축년인 1926년 음력 삼월 초하루 정미시(오후1~3시)에 대들보를 올렸다는 것이다. ‘삼광(三光)’은 日(일)·月(월)·星(성)을 말하는 바, 오행(五行)의 상호작용 덕으로 인간세상의 다섯 가지 복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오복은 알다시피 壽(수)·부(富)·강령(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이다. 유호덕의 뜻은 덕(德)을 좋아하여 덕을 쌓고 그 덕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고종명은 타고난 천수를 다하여 죽는 것을 말한다.

선생님은 “내가 이 집을 구입해 산지 60년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은 아주 컸으나 제대로 관리가 안 된 상태였지요. 집을 지은 지는 한 100년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평지에 이 정도 규모로 집을 지은 것을 보면 그 무렵 원래 집 주인은 악양에서 아주 큰 부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님은 “집이 너무 낡아 몇 년 전에 1억5천만 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습니다.”라고 밝히셨다.

긴 건물 수납공간 한 칸에 모셔져 있는 정암 선생님의 부모님 사진. 사진=조해훈
긴 건물 수납공간 한 칸에 모셔져 있는 정암 선생님의 부모님 사진. 사진=조해훈

선생님은 대문 들어가면 오른 쪽에 있는 건물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길쭉한 건물인데 다 틔워 하나의 공간으로 개조를 해놓으셨다. 여기에 책상과 컴퓨터가 있고, 손님들과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구 등이 놓여 있었다. 필자의 시선을 끈 것이 있었다. 선생님 댁에서 평생 사용한 각종 생활 도구들이었다. 긴 수납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그것들을 종류별로 구분해 놓으셨다. 이를테면 낡은 빨래판이 몇 개 겹쳐 있는 칸, 선생님의 부모님 사진이 있는 칸, 오래 전에 쓰시던 호롱들을 모아놓으신 칸, 놋그릇들을 모아놓은 칸, 선생님께서 교직 생활 중 받은 각종 상패 및 공로패 등을 모은 칸 등이었다. 한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돼 있었다.

필자 역시 집안의 흔적과 역사를 이렇게 모아놓고 싶었지만 현재 모두 사라지고 없다. 구한말 또는 일제시기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당시 수집해 보관하고 있던 물품들을 그 후손들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민속박물관이나 부산근대역사박물관 등에서 전시하던 것을 관람한 적이 있다.

정암 선생님 집안의 역사와 흔적이 수남공간의 칸마다 담겨져 있다. 사진=조해훈
정암 선생님 집안의 역사와 흔적이 수납공간의 칸마다 담겨져 있다. 사진=조해훈

필자는 선생님께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우리나라에 선생님처럼 한 가족의 역사를 이렇게 다 보관하고 있는 집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다 버려야 될 물건들을 지저분하게 모아놓은 것입니다.”라고 겸손해 하셨다. 선생님은 그 연세에도 직접 운전을 하신다. 하지만 이날은 정 사무국장님의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선생님께서 “인근에 좋은 찻집이 있으니, 가서 커피를 한 잔 대접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해서이다.

찻집에 가면서 선생님은 ‘조씨 고택’을 먼저 안내하셨다. 필자는 오랜만에 정암 선생님 덕분에 조씨 고택에 들렀다. 이 고택은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趙浚·1346~1405)의 직계손인 조재희(趙載禧)가 낙향해 지은 것으로 전한다. 또한 이 집은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최참판 댁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코로나 전에 이 집을 방문한 후 처음이었다.

수납공간의 한 칸에 있는 정암 선생님의 표창패. 사진=조해훈
수납공간의 한 칸에 있는 정암 선생님의 표창패. 사진=조해훈

마침 올해 98세인 할아버지께서 혼자 계셨다. 선생님과 할아버지는 서로 아시는 사이여서 대청마루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셨다. 할아버지는 선생님께 “나보다 아홉 살이나 적으니 까불지 마. 까불면 가만 안둘 거야.”라고 농담을 하시어 모두 웃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저 섬돌 아래서 8년간 보약을 먹었어. 그래서 이렇게 건강한가봐. 아직 아파 병원 한 번 안 가고, 약국 알약 한 번 안 먹었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악양 출신의 여상규 전 의원 형님과 함께 어릴 때 저기 개울 건너 최 접장님께 가 천자문을 배웠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저 아래에 있던 건물이 옥종면의 어느 재실에 팔려갔어.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기둥이 썩어 있더군.”이라고 회한에 찬 어조로 언급하셨다. 두 분이 한참 이야기를 하시다가 헤어졌다.

정암 이형규(왼쪽) 선생님이 자택 인근에 있는 '조씨 고택'에서 그 집 할아버지(98)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해훈
정암 이형규(왼쪽) 선생님이 자택 인근에 있는 '조씨 고택'에서 그 집 할아버지(98)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해훈

그 고택에서 나와 뒤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천문대가 있는 ‘빠하디’라는 큰 카페가 있었다. 여기서 선생님과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