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62)‘내로남불’의 뿌리 ⑥유가儒家의 경제정의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62)‘내로남불’의 뿌리 ⑥유가儒家의 경제정의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09.16 19:10
  • 업데이트 2022.09.2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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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동핑지역 무덤에서 발견된 공자(왼쪽 두 번째) 벽화. 2007년 10월에 발견됐으며 2000여 년 전 서한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 미상 / Public domain]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너희는 무슨 수로 벼 300섬을 탈취했고,
사냥도 하지 않으면서
어찌 너의 집에 담비가 걸렸는가?
그대들 군자여! 공밥을 먹지 마소! -시경詩經/위풍魏風/벌단伐檀-

주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필부는 죄가 없지만, 구슬을 품으면 죄가 된다’ -좌전左傳/환공桓公10년(BC 702)

공자(BC 551~479) 당시의 시대상이다. 주나라의 속담에서 보듯, 그 시대는 노예제적 봉건사회였으므로 천민이 귀한 보배를 품는 것만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곧 도에 어긋난다고 생각되었다. 공자는 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공자 자신도 부자가 되기를 원했고, 인민도 부해지기를 바랐다.

공자가 말했다. “만약 부를 얻을 수 있다면, 비록 지위가 낮은 관리인 마부라도 나 역시 사양하지 않겠다. 그러나 (천명天命으로 유사儒士로 태어났으니)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학문을 하겠다.” -논어/술이 11-

번지가 농사기술을 배우기를 청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농사에 대해서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번지는 소인이구나!” -논어/자로 4-

공자가 위나라로 갈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다. 공자가 “사람이 많구나!” 라고 하자,

염유가 물었다. “많아진 다음에는 무엇을 더해야 할까요?” 공자가 답했다.

“그들을 부富하게 해야 한다.” 염유가 “부해진 다음에는 무엇을 더해야 할까요?” 라고 묻자, 공자는 “그들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답했다. -논어/자로 9-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모든 정치는 구성원의 의식주 해결을 제일로 삼았다. 무엇보다 경제를 중시했다. 그러던 것이 춘추시대(BC 770~403)에 등장한 공자는 중의경리重義輕利를 역설했다. 곧 의義를 중시하고, 이利를 경시한 것이다. 공자는 당시의 혼란의 원인을 주의 봉건질서가 무너진 데서 찾았다. 그러므로 치유책은 주의 봉건질서의 회복이다. 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주장하게 된다. 곧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자신을 극복하고, 주나라의 예법, 주례周禮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성품이 귀족적이었다. 그리고 주례에 따라 타고난 신분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정명론正名論을 주창했다. 공자는 사민士民 계급이므로 그에게 당연한 직분은 학문이다. 농사에 대해서는 늙은 농부만도 못하다는 말은 자기 직분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번지를 소인이라고 한 것은 신분에 따른 직분을 모른다고 힐난한 것이다.

주례에는 지배계층으로 왕·공경公·제후·경대부卿大夫 등 귀족계급과 피지배계층으로는 서인(庶人. 몰락귀족)·사민四民(士農工商)·천민·노예가 있었다. 이들 신분은 엄격히 차별되고 세습되었다. 주목할 점은 귀족계급을 보좌하는 하대부下大夫·상사上士·중사中士·하사下士 등 사관士官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관의 직은 몰락귀족인 서인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앞자리인 사민士民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 당시에 신분계급은 세습되었다. 사민四民(사농공상)의 직분이 문란해지지 않고 세습되도록 거주지역을 한정했다. 특히 제나라 관자(관중)는 신분질서가 어지러워지자 사농공상의 분업을 강제하기 위해, ‘사민의 분업과 정거定居 정책’을 엄격히 실시하여 자기 직분 외에 다른 직업을 겸직할 수 없도록 거주지역을 제한했다.

환공이 물었다. “민民이 각자 자신의 직업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관자가 답했다. “사농공상의 사민四民이 섞여 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섞여 살면 말이 어지러워지고 직업이 바뀝니다.”

환공이 물었다. “사농공상의 거주지를 어찌해야 합니까?”

관자가 답했다. “옛 성왕들은 사민士民은 한적한 곳에 살게 하고, 공민公民은 관부에 살고, 상민商民은 시정에 살고, 농민은 전야에 살게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士의 자제는 언제나 사민이 되고, 공工의 자제는 언제나 공민이 되고, 상商의 자제는 언제나 상민이 되고, 농農의 자제나 언제나 농민이 되는 것입니다.” -국어國語/제어齊語-

그러나 사민분업정거정책은 본래 의도와는 달리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폐해는, 유사(儒士.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지식을 파는 일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겸직을 금지함으로써 발생했다. 그들은 굶지 않으려면 의義를 굽혀서라도 귀족들의 가문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본래 취지와는 달리 왕도王道를 지켜야 할 유사들에게 지방 거실巨室(큰 가문의 종실宗室)들의 패도覇道에 동조하도록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공자는 왕도주의를 따르는 ‘군자유君子儒’와, 패도주의를 따르는 ‘소인유小人儒’로 구분하여 노선투쟁을 전개한 것이다.(이 노선투쟁에 대해서는 공자의 ‘소인파 두목 소정묘 법살法殺 사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두 번째 폐해는, 당시 관직은 너무 복잡하게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자기 직분이 아니면 서로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낭비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거실巨室의 대인大人들이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다투어 많은 가신들을 두었으므로 사치를 조장하고 법도를 문란케 했던 것이다.

『논어』「팔일 22」에서 공자가 ‘관사(官事. 관직과 직업)’의 겸직을 금지한 관자를 비난한 것은, ‘사민분업四民分業’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엄격한 시행으로 낭비를 초래한 것을 비난한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은 신분과 직분의 차별을 엄격히 하자는 것이므로, 관자의 ‘분업정책’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소가 물었다. “옛 군자는 벼슬살이를 했는가?”

맹자가 말했다. “벼슬살이를 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공자께서 3개월 동안 섬길 군주가 없으면 안절부절 벼슬자리를 찾아서 다른 고을로 떠나갔으며, 임용될 때 바칠 선물을 반드시 싣고 갔다’고 한다. 공명의(公明儀)의 말에 의하면, ‘옛날 사람들은 3개월 동안 섬길 군주가 없으면 조문을 갔다’고 한다.”

주소가 물었다. “3개월 실직에 굶어 죽는다는 말은 성급한 것 아닌가?”

맹자가 말했다. “사士가 벼슬자리를 잃는 것은 제후가 나라를 잃는 것과 같다. 사士가 벼슬 사는 것은 농부가 농사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맹자/등문공 하-

이처럼 당시 유사儒士들은 무산계급이었으므로 벼슬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공자도 14년간이나 벼슬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나 그는 무도無道한 부귀를 추구하지 않았고, 제자들에게 무도한 나라에서는 벼슬을 버리고 그 나라를 떠나라고 말했다. 도道를 중히 여기고 이利를 가볍게 본 그의 이러한 경리輕利 사상은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키려는 용기와 결단으로 지금까지 기림을 받고 있다.

공자가 말했다.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나타나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비천하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하고 귀하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논어/태백 14-

부귀는 사람마다 바라는 것이지만,
도(周禮)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면 처하지 않는다.
빈천은 사람마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도(周禮)에 의하지 않는 빈천이라도 피하지 않는다. -논어/이인 5-

조송원 작가
조송원 작가

유가의 경제정의를 말한 부분이다. 부귀는 반드시 도道에 의해서만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두 예문은 우리 현대 학자들에게 입이 닳도록 회자되고 칭송 받는다. 과연 그럴까? 과연 공자가 말한 ‘도’란 무엇인가? 봉건사회의 경제정의와 민주평등사회의 경제정의는 같은 것인가? 다음 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묵점 기세춘의 『동양고전산책 1,2』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힙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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