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51)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4장 '등말리별곡3' 타락하는 박수진⑤
대하소설 「신불산」(251)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4장 '등말리별곡3' 타락하는 박수진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9.17 09:54
  • 업데이트 2022.09.18 2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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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등말리별곡3 타락하는 박수진⑤

부산으로 돌아온 열찬씨는 얼마간의 저축과 새마을금고에 붓고 있던 적금을 담보로 얼마간의 대출을 받아 30만 원의 목돈을 더 만들어 등말리로 가져다주고 흐뭇한 미소를 띠면서 내려왔다. 너무 일찍 시집을 가서 아이들만 오롱조롱 낳고 엄한 시집살이와 술고래 남편에 치어 허리 한 번 못 펴고 고생만 한다 싶어 늘 마음에 걸리던 금찬이누님, 무슨 인연인지는 몰라도 7남매 중에서도 유독 자신과 많이 부대끼며 고생도 많이 하고 정도 많이 들어 시도 때도 없이 늘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던 가난한 누님이 이제 자신이 사준 소로 올가을부터 훨씬 더 넓은 땅을 경작하여 보리와 밀을 거두고 내년부터는 벼농사도 넓혀 다섯 아이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 양식이 넉넉해져 가끔은 아이들에게 떡도 해주고 또 매형을 위하여 고슬고슬한 술밥을 지어 마당 한가운데 멍석을 깔고 하얗게 널어말려 술을 담고도 남아 보릿고개를 모르고 살아갈 뿐 아니라 해마다 생산되는 송아지로 누님과 자신이 모두 살림이 넉넉해져 생질들의 학비를 충당하고 자신도 방 하나, 부엌 하나의 전세에서 방이 둘에다 독립된 부엌과 마루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요즘 유행인 입식부엌에 가스레인지로 밥을 하여 식탁에 의자를 놓고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시종일관 흐뭇한 미소를 띠고 부산에 돌아온 그는 한 달 뒤에 있는 구청의 동(洞)종합감사와 병무청의 특별감사를 준비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한 달 이상이나 명촌에 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그렇지만 지금쯤은 마닥에 커다란 암소가 천천히 여물을 씹고 매형은 바지게 가득 소꼴을 베어오고 누님은 쌀뜨물, 콩깍지, 너무 오래 묵어 사람이 먹기에는 좀 그런 콤콤한 냄새가 나는 된장까지 여물 솥에 넣고 소죽을 끓이고 아이들은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반짝거리는 요롱을 쳐다볼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입이 헤벌레 벌어졌다. 시간이 나는 대로 명촌에 가서 그 대견한 소를 구경하고 오랜만에 매형과 함께 직접 밭갈이도 한 번 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요롱을 서울사람들은 워낭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해줄 작정이었다.

 

바쁜 한 달여가 지나고 모처럼 시간이 나는 일요일에 열찬씨는 종종걸음으로 송대성당을 지나 부리시봇디미를 건너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줄 새파란 인도사과 한 봉지와 매형이 좋아하는 소고기 천렵과 생간, 그리고 됫병 소주 하나도 옆구리에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열녀각을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저녁 답이라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정각 옆의 소나무 그늘에서 조그만 계집애 하나가 뛰어나오자 잇달아 조금큰 사내아이도 뒤를 잇는데 어딘가 낯이 익어 내가 뭐 헛것을 보았나 싶어

“...?”

새삼 눈을 크게 뜨는데

“삼촌, 열찬이삼촌!”

폴짝거리며 뛰어와 안기는 아이가 틀림없는 현주였다.

“현주야, 니가 여게 우째?”

하는 순간

“외삼촌, 아부지하고 엄마가 싸워서 아부지 따라오면 짜장면 사준다 캐서 둘째 새이하고 현주하고 우리 서이만 따라왔다.”

열찬씨와 붕어빵처럼 닮은 일곱 살 성식이였다.

“그래. 아부지는?”

하는 순간

“아부지는 술 채서 잠더.”

이번엔 열한 살 또식이가 나타나

“외삼촌 오싰능교?”

꾸뻑 인사를 하는데 얼굴이 새까마서 그렇지 키가 제 아비 수진씨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 우짜다가 엄마, 아빠가 싸웠노?”

그나마 말귀를 알아들을 둘째에게 물으니

“요새는 외삼촌 소값 때문에 아부지 엄마가 날마다 싸운다. 아부지는 언양장에 소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사자면서 천하태평이고 엄마는 그라다가 장날마다 술만 남천장으로 마시고 소는 사지도 못 한다고 바가지를 긁고.”

“그랬구나.”

하고 열녀각 뒤로 다가가

“자영요!”

한참을 흔들어 깨우자 슬며시 눈을 뜨며

“이, 이기 누고? 내 처남 가열찬이 아이가?”

“맞심더. 자영은 우짤라꼬 이래 눕었능교?”

“마, 그래 됐다. 그런데 처남 니는 우째왔노? 혹시 너거 누부가 연통이라도 넣었나?”

“아, 아임더.”

“그라면 처남 니는 인자 이 자영을 우짤끼라 말이고?”

“우짜다니요. 술 깨면 모시고 집으로 가야지요.”

“그런가?”

하더니 다시 눈길이 풀리면서 뒤로 누워 푸우푸우 숨을 내뿜으며 잠이 들었다.

“또식아, 이기 우짠 일고?”

“아침 묵고 나서 엄마아빠가 이말 저말 싸우다가 인자 당신하고 몬 산다, 니도 니캉은 안 산다고 난리가 났다 아잉교?”

“그래서?”

“아부지가, ‘야들아, 인자부터 엄마아빠가 갈라설 낀데 아부지 따라 나갈 사람은 이리 붙어라.’ 카고 옷을 갈아입는데 말임더.”

“그래.”

“새야가 ‘엄마, 울지 마라. 나는 끝까지 엄마하고 살끼다.’ 카고 엄마 품에 파고드니 외식이 글마도 ‘나는 아부지 못 믿는다. 나도 엄마하고 살 끼다.’ 하니까 우리 오남매가 전부 엄마한테 엉겨 붙어 우는데 아부지가...”

“그래 아부지가?”

“여게서 엄마하고 살면 꽁보리밥만 묵는데 아부지 따라가면 짜장면 사준다 캤지요.”

“그래서?”

“맨 처음 현주가 아부지한테 안기고 성식이가 붙고 나도 붙었지요.”

“저런? 그래 너거 점심은 묵었나?”

“아임더. 아부지가 열녀각에 오자말자 누버자는 바람에...”

“그래 배고프겠구나.”

하고 바라보니 아직 어린 현주와 성식이가 정말 배가 고픈건지 아니면 엄마가 보고 싶은 건지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아이 셋을 가슴에 품고 한참이나 먼 하늘을 바라보는데 새파랗게 펼쳐진 이불뜰 논배미 위로 흰새라고 불리는 해오라기 한 마리가 한가롭게 떴다날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 간섭도 방해도 없이 지천인 미꾸라지와 우렁이를 잡아먹으며 한가로이 여유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서상균

“자영요, 일나보소.”

이제 숨소리가 좀 편해진 것 같아 어깨를 흔들어 깨우니

“...”

그냥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들 배고풀긴데 짜장면 믹인다면 믹이야지요.”

“...”

“그래 짜장면 값은 있능교?”

“...”

“그럼 돈도 없이 짜장면 사준다 캤능교?”

“내가 돈 있으면 여게 이래 처자빠졌겠나?”

“...”

기가 차서 한참이나 먼 하늘을 바라보던 열찬씨가

“일나소. 어른이 아아들 하고 약속했으면 지켜야지요.”

하고 현주 손을 잡으며

“가자!”

하고 일어서니 두 꼬마가 따라나서자

“아부지...”

열한 살 또식이가 수진씨를 일으켜 주춤거리며 따라나섰다. 열녀각 밑 천전뜰을 지나 부리시봇디미를 넘어 옹기굴과 송대성당을 지나 서부리를 한참이나 걸어 새로 지은 언양극장과 전매서를 지나 사거리 초생다방옆에 새로 차린 중국집에 들어가나

“어서 오이소.”

반기던 주인여자가 기가 막힌지 이 이상한 손님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는데

“아지매, 다섯이 말캐 짜장면 하나씩 주이소.”

하고 둘러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데

“싫어, 나는 우동꼽배기 묵을 거야.”

여섯 살짜리 현주가 어디서 우동꼽배기 소리를 들었는지 떼를 쓰는 지라.

“그래. 우동꼽배기 하나.”

보나마나 속이 아플 수진씨를 생각해 국물 있는 음식을 시키는데

“외삼촌, 나는 짜장면꼽배기 하면 안 되나?”

열한 살 또식이가 올려봐

“그래. 큰 놈은 짜장면 곱배기.”

하고 한참을 기다려 음식이 나오자 허겁지겁 먹어대는 아이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수진씨가 아닐까 다르랴 과연 숟가락을 들고 우동국물을 서너 번 떠먹더니

“처남, 국물 안주가 좋은데 우리 소주나 배갈 한 병 하면 안 되나?”

세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눈을 말갛게 뜨고 바라봐

“그래. 여기 배갈 하나요.”

하기 무섭게

“그래도 사나가 둘인데 배갈 시키면 야끼만두도 있어야지.”

하는 순간 눈을 내려 깔고 수중에 돈과 메뉴판의 돈을 가늠하던 열찬씨가

“아지매, 군만두 하나.”

하고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삽짝문을 들어서던 열찬씨의 눈이 동글해졌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