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55)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4장 '등말리별곡3' 타락하는 박수진⑨
대하소설 「신불산」(255)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4장 '등말리별곡3' 타락하는 박수진⑨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9.21 10:39
  • 업데이트 2022.09.21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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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등말리별곡3 타락하는 박수진⑨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 보름, 늦어도 20일 쯤 뒤인 5월초에는 싹이 틀 것으로 예상한 호박이 좀 채로 발아(發芽)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심기 전부터 낙동강유역일원에 겨울가뭄이 심해 부산에 제한급수가 불가피하다고 보도되어 미리 호박구덩이에 물을 주어야하나 마나 의논하다가 설마 비 안 오는 봄이 있으랴, 고개도 험하고 수도도 머니 하늘에 맡겨보자, 이 좋은 사업에 설마 하느님이 물을 안 주랴 하면서 그만 두었는데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조바심이 난 열찬씨가 날마다 산에 올라가 보아도 먼지가 풀폴 나는 오솔길에 바짝 마른 풀잎이 퍼석거릴 뿐 단 한 폭의 호박도 싹이 트지 않았다. 5월 중순 애가 바짝 탄 열찬씨는 일요일 날 식구를 다 데리고 호박밭으로 갔다. 일일이 풀숲과 나뭇잎을 뒤져 배가 반달처럼 동그랗게 쳐진 베짱이와 여치, 아직 덜 자란 초록색의 메뚜기와 회갈색의 송장메뚜기를 잡아 하나하나 두 아이에게 자연학습을 시키고 풀밭에 앉아 영순씨가 준비한 김밥을 먹는데

“당신, 맨날 큰소리 탕탕 치던 사업이 이래가 우짜능교?”

영순씨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인자는 제발 엉뚱한 사업 좀 벌리지 마소. 아이디어대로 다 된다면 성공 안 하고 출세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능교?”

혀를 끌끌 찼다.

 

마침내 5월 하순이 되고 6월이 넘어 현충일이 되어도 비다운 비 한 번 내리지 않았다. 새마을지도자 몇과 그 넓은 산 구석구석 호박구덩이마다 뒤졌지만 싹이 튼 곳은 하나도 없었다. 산을 다 내려와 민가의 울타리와 붙은 구덩이에서

“야, 싹이 났네. 싹!”

누군가가 소리치자

“뭐, 싹이라고?

“싹이 아니라 콩나물이구먼. 완전히 콩나물이로구먼.”

일동이 눈을 반짝이며 내일 새마을식구들을 동원해 물을 주기로 했다. 진작부터 물을 줄 걸, 하늘만 쳐다보았다고 후회를 하면서.

이튿날 의기양양한 열찬씨네가 물뿌리개를 두개나 사서 산으로 행했는데

“어라, 싹이 없어. 싹이!”

먼저 올라간 사람이 아우성이었다. 헐레벌떡 뛰어간 열찬씨가 아무리 구덩이를 살펴도 콩나물대가리 같은 새싹은 보이지 않았다.

“비둘기가 먹었어. 산비둘기가. 밀양촌놈 내가 왜 어릴 적에 그렇게 당한 일을 잊어버린 줄 모르겠네.”

밀양군 상동면 매화리 그야말로 <부엉이 우는 산골>에서 자란 민춘식총무가 꼬챙이로 땅바닥을 긁어 보니 과연 잘려나간 뿌리가 보였다.

“다 텄다. 포똑포똑 올라와도 비둘기가 먹으면 헛일이다. 하기야 그 놈들도 이 가뭄에 오죽 배가 고프겠나.”

소용없는 바께스와 물조리게를 덜렁거리며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계속된 가뭄은 하필이면 부산지방의 50년만의 가뭄, 최악의 가뭄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산기슭전체가 초록색 호박잎으로 가득하기는커녕 기존의 도토리나무마저 움트지 못하고 농촌에는 못자리를 못 해 벼농사를 망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참혹한 가뭄이었다. 열찬씨와 새마을식구들이 망연자실 넋을 놓자 동민들의 눈길과 구청총무과의 눈치가 심상찮았다. 그렇게 무심한 봄날이 가고 거의 하지가 다된 6월 중순 마침내 비가 왔지만 더 이상 호박은 싹트지 않았다. 새마을지도자협의회가 끝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김영호동장이 박구만회장과 귓속말을 나누더니

“새마을지도자여러분, 진인사대천명이라 캤는데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씨를 심어도 하늘이 비를 주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군요. 황하의 이무기도 비를 만나야 용이 되어 승천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 이열찬씨의 아이디어나 열정이 매우 좋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군요. 오늘 이후 우리는 이제 호박사업을 잊고 입 밖에 내지도 말기로 합시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황홀한 꿈에 한번 젖었던 것으로 하고 말입니다.”

하고 입단속을 하고 박구만 회장이

“이열찬씨 수고했습니다.”

잔을 건네며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서상균

그해 가을부터 영순씨가 장촌의 막내누나 집으로 출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장촌의 덕찬씨와 매형 고서방은 마을의 작은 빈집을 사서 수리해 논 서마지기와 약간의 밭을 저금으로 받아 분가해있었고 두 부부가 워낙 부지런하고 야무져 마치 함흥차사(咸興差使)처럼 들어오는 돈은 있어도 나가는 돈은 없다고 정평이 나있었다.

비록 살림은 났지만 이미 큰형님의 몫으로 정해진 아버지의 논밭을 경작하면서 닭을 키우고 임업협동조합의 밤 밭에도 내외가 부지런히 다니면서 일당도 받고 밤도 얻어오니 살림은 해마다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걱정이라면 아이가 신혼시절 미진이라는 딸이 하나 나고는 더 이상 생기지 않는 것이었는데 큰집에 무오라는 아들이 있어 설마 또 생기겠지 하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제 고속도로로 언양-부산간을 직행으로 달리는 버스노선이 생겼지만 집에서 정류소까지, 또 언양에서 장촌까지 버스를 타다보니 편도에도 3시간이 걸리는 먼 길을 영순씨가 부지런히 다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버스를 타고 시원한 들판을 내다보며 달리는 것이 좋았고 그 위에 덕찬씨가 아시 동생의 아내를 너무나 예쁘고 살가워하며 크는 아이들에게 먹이라고 달걀과 홍시, 밤을 비롯해 무엇이든 그득그득 채워주며 매형 고차대씨도 젊고 고운 처남댁이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차대씨가 워낙 야문 사람이라 채소나 과일 같은 소소한 것을 빼고 쌀이라도 한 말 주려면 덕찬씨가 여간 눈치가 보이지 않아 채소나 마른고추 사이에 눈치껏 조금씩 주기도 했다. 그렇게 얻어오는 것만 해도 꽤나 살림에 도움이 되는 판에 젊은 새댁에게 짐이 되는 김장용 고추나 채소를 주기가 뭣해 김장김치와 된장, 간장, 고추장까지 먹을 만큼 주니 어머니가 사는 큰집에서 아무것도 못 얻는 대신에 막내누나가 큰집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그해 가을 밤나무 밭 관리를 아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점수를 딴 고차대씨는 마침내 울산시 산림조합의 임시직으로 발탁되어 조그만 오토바이를 타고 여기저기 흩어진 밤밭과 조림지, 묘목장을 순찰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새 7, 8명의 아줌마를 데리고 조림지의 풀을 뽑는 감독관이 되고 마침내 사방공사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어갔다. 부모님을 비롯한 두 집 농사도 큰 일머리만 차대씨가 처리하면 나머지는 덕찬씨가 알아서 했다.

안 그래도 꾸준히 불어가던 살림이 이젠 불길이 일듯, 물이 끓듯 불어나기 시작해 해마다 장촌뜰은 물론 인근의 도리뜰, 반송뜰에 논밭을 샀다. 집에 있는 양식으로 먹고살기가 넉넉하고 달걀과 잡곡, 밤으로 쏠쏠한 수입이 있는데다 산림조합의 월급이 그대로 모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월급을 타서 식대 겸 잡비로 돈 몇 천원을 호주머니에 넣어도 술밥은 현장에서 인부들과 해결하고 출퇴근은 조합에서 기름을 넣어주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니 교통비도 들 일이 없어 덕찬씨가 빨래를 하느라고 바지호주머니를 뒤지면 매번 넣기는 해도 빼는 일은 없는 천 원짜리들이 모서리가 닳은 채 나오는 판이었다.

한번은 부산에 가져가서 고춧가루를 빻아 양념으로도 쓰고 친정어머니도 나눠주라는 말에 부피는 많아도 무게는 가벼운 마른고추를 얻어왔는데 빛이 너무 곱다고 팔라는 말에 이웃에 팔았는데 영순씨로서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리고 근당 고추 값도 산지에 비해 근 배나 더 쳐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많은 논농사를 짓는 덕찬씨가 한창 벼를 베어 늘어놓은 논바닥의 나락을 걷는 계절이라 노느니 베워보라고 영순씨를 불러 나락걷기를 가르쳤는데 뜻밖에도 쉽게 적응하고 볏단도 매초롬하게 예쁜지라 덕찬씨와 함께 일하던 시어머니인 미진이할머니도 신통방통하다고 웃으면서 도시의 새댁치고는 참 사람이 괜찮다고 살갑게 대했다.

부산으로 돌아오면서 약간의 쌀, 찹쌀, 콩, 팥, 달걀까지 얻어왔지만 영순씨는 어느새 큰 집을 비롯한 마을의 마른고추를 사서 힘겹게 버스에 싣고 오는 일이 잦아졌다. 버스비를 빼고도 상당한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해를 넘기면서 적금의 만기가 다가오고 다시 저축액수도 조금씩 불어나갔다.

이듬해 모내기철이 다가올 때쯤 열찬씨 혼자서 명촌리를 향했다. 벌써 돈을 준지가 한해가 가까운지라 아무리 도시출신이라 해도 영순씨가 소는 잘 크느냐, 송아지 낳을 때는 되어 가는지 물을 것 같아서 미리 가서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놓기 위해서였다.

열녀각을 지나 사개이못을 지나 대밭머리를 돌면서 열찬씨의 가슴이 싸아해지면서 작은 동계(動悸)가 일었다. 지난 가을처럼 미리 내려다보던 매형 수진씨가 대밭이나 뒷산으로 숨어버릴 것만 같아 조바심을 내며 도로를 건너 등말리 논길로 접어드는데

“외삼촌 오시능교?”

어느새 훌쩍 커버린 고등학생 일식이가 동생 또식이, 준식이까지 데리고 마중 나오면서 먼저 인사를 했다.

“그래. 많이들 컸네. 아부지 집에 계시나?”

“예.”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며 들어갈지 열찬씨가 삽짝 앞에서 망설이는데

“동상, 왔나?”

금찬씨가 먼저 인사를 했고

“외삼촌!”

열찬씨를 쏙 빼닮은 성식이와 고명딸 현주도 조르르 달려오는데

“처남, 오는가?”

수진씨도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일어났다. 몸피도 가늘고 얼굴도 더 초췌해진 것 같은데 단지 눈빛하나는 전보다 더 날카롭게 번쩍이는 것 같았다.

“자영, 잘 계싰등교?”

열찬씨가 옆구리에 끼고온 사과봉지와 소주병을 내려놓자 금찬씨는 부엌에 들어가 상을 차리고 위에 두 아이는 양계장에 닭을 사러가는 모양이었다. 열무김치와 곰피나물무침으로 간단히 첫잔을 마시는데 둘이 다 말이 없었다. 서로가 입이 달싹달싹 하면서도 정작은 말문이 잘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내 아이들이 폐계 세 마리를 들고 오자 미리 물을 끓인 금찬씨가 소나무판자에 대로 테를 맨 기명통과 커다란 사구에 물을 붓고 마당가운데서 다섯 아이와 함께 부지런히 닭털을 뽑았다. 그러자 잔을 놓고 마당에 나간 수진씨가 부엌칼로 털이 뽑힌 닭의 배를 가르더니 간과 심장, 똥집을 꺼내 씻고 다듬더니

“처남 니도 소주잔 들고 와서 한 점 무보지?”

생간을 소금에 찍어 먹으면서 불렀다.

그렇게 멍석에 자리를 깔고 앉아 회간으로 술상을 벌리자 나머지 고기는 금찬씨가 크고 두꺼운 도마 위에 놓고 부엌칼로 해체하여 닭볶음탕을 끌이기 시작했다. 국이 끓자 다시 마루로 옮겨 여덟 식구가 부지런히 닭고기를 뜯느라고 다들 입가가 번질번질한데도 아무도 말 하는 사람이 없이 수저소리만 달그락거렸다. 자갈돌도 목구멍만 넘기면 다 녹인다는 열일곱에서 아홉 살에 이르는 5남매가 이내 국물도 한 방울 없이 다 먹어치우고 각자 제방으로 돌아가자 설거지를 하던 금찬씨가

“보소, 일식이아부지! 기다리던 동상이 왔는데 그 때 우리 둘이 약속한데로 이야기를 좀 해보소!”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수진씨는 입술만 달싹거리다 다시 술잔을 털어 넣을 뿐이었다. 마침내 설거지를 끝낸 금찬씨가 손을 닦으며 마루에 올라와 수진씨 옆에 앉더니

“동상, 봐라. 니캉 내캉 형제들 중에 친하기도 제일 친하고 같이 고생도 많이 했는데 우짜다가 일이 이래 되었는지 기가 차다. 니는 좋은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줄라 켔는데 다 허사가 되었제? 그놈의 술, 너거 자영이 술만 안 마셨으면 지금 마닥자리에 새끼 밴 소가 여물을 씹을 낀데, 마 우짜겠노? 니 탓, 내 탓 할 것도 없이 다 이 못난 누나 탓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너가 자영하고 내가 얼마 전에 대강 의논을 해 놓은 것이 있는데 마침 니가 잘 왔다.”

하면서 남편 수진씨를 바라보는데 수진씨는 고개를 떨구고 말이 없었다.

“보소, 그라면 내가 이야기해보꾜?”

한참이나 기다리던 금찬씨가 말하기로 송아지를 빼서 중소를 만들어 큰 소를 반납하고 이듬해 중소가 낳은 송아지를 자기들이 키우고 큰 소가 된 그 중소까지 반납해서 3년 안에 소를 두 마리로 늘려주기는커녕 당장은 송아지 아니라 소고기 한 근도 반납할 길도 없는 판에 대출까지 받아 보탠 그 어려운 돈, 월급 10만 원이 조금 넘는 처지에 60만 원의 거금을 닦아먹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 부부가 오래오래 연구해서 하나의 해결책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당장은 돈도 소도 없는 마당에 농사꾼이 눈을 돌릴 곳이란 오로지 논밭, 즉 목숨 같은 땅을 넘기는 일 뿐이라 아무리 아깝더라도 집 앞 논 서마지기 중에서 200평 한 마지기를 떼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우선은 등말리의 땅값이 낮아 큰돈은 안 되지만 평당 5천 원씩으로 치면 100만 원이 되는데 묻어두는 셈치고 사놓으면 나중 슬비가 대학을 가거나 시집을 갈 때는 적어도 너덧 배는 오르는 제법 쏠쏠한 재산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더는 방법도 없고 그거라도 줄 때 받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일식이의 대학노트를 찢어 열찬이가 매매계약서를 쓰고 수진씨와 둘이 지장을 찍고 증인으로 그 밑에 다시 금찬씨의 지장을 찍어 한 장씩 나눠가졌다. 그런데 땅값이 소 값보다 높은지라 차액 40만 원을 다시 열찬씨가 내어놓아야 하는 것인데 마치 늪에 빠진 짐승처럼 자꾸만 깊어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일식이의 학비는 물론 당장 일곱 식구가 꽁보리밥 곱삶아먹기도 힘든 것이 빤한 판에 그 돈이라도 보태어 어떻게든 위기를 넘어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마치 겨우 만기가 되어 목돈이 나오는 걸 알고만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지만 하는 수가 없었다. 아내 영순씨가 볼까봐 논문서는 사무실의 책상서랍에 넣어둔 채 열찬씨는 다음 주에 돈 40만 원을 등말리로 가져다주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