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256)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5장 군식구①
대하소설 「신불산」(256)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5장 군식구①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09.22 07:10
  • 업데이트 2022.09.22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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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식구①

인감증명서를 떼러 가끔 동사무소에 들리면서 인사를 튼 고향선배가 아주 싼 전세로 방 둘에 부엌과 연탄창고가 딸린 집을 주겠다고 제의했는데 자신의 형편으로는 그 싼 전세마저 없다고 해도 그럼 지금의 전세금만 빼주고 나머지는 형편 되면 달라는 지라 열찬씨 내외는 뜻밖에도 꽤 괜찮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다만 두 개의 방 사이가 얇은 합판으로 칸막이를 한 것이라 여닫다가 가끔 넘어지는 수가 있기는 했지만 아이 둘은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좋은 모양이었다.

기왕 이사를 하는 김에 좀 무리는 했지만 부엌찬장도 크고 좋은 걸로 사고 석유곤로와 냄비, 주전자등도 새로 넣고 신발장도 마련을 했다. 그렇게 제법 부자가 된 기분으로 출근을 하고 저녁에 퇴근을 했는데 현관에 낯선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있었다. 아우 백찬이가 제대를 하고 내려온 것이었다.

명촌에서 적금만기를 알기나 한 것처럼 백찬이는 또 방이 두 개가 된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기가 차게 나타난 것이었다.

우선 쉬운 대로 시장에서 닭을 사다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고춧가루를 듬뿍 쳐 넉넉하게 끓인 것이 영순씨도 벌써 닭장수집안의 며느리로 길이 난 것 같았고 닭고기 유전자를 똑 같이 받은 가씨 성(姓)의 어른아이 넷이 맹렬히 닭고기를 뜯고 뼈를 발랐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조카 둘과 같이 잔 백찬이는 아침을 먹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서도 그냥 멀뚱히 앉아있었다. 원래 과묵한 데다 싫고 좋고 내색을 않는 아이라

“그래, 니는 우짤끼고? 인자 제대를 했으니 취직도 하고 장개도 가야할 거 아이가?”

“...”

열찬씨의 말에 고개를 들어 벌쭉 한 번 웃어 보이고 마는 동생에게

“그래, 영주서는 뭐라 카더노? 형님은 별 이야기가 안 하더나?”

“형님은 말이 없고 형수가 영주에는 밥벌이 할 직장도 없고 하니 부산에 가서 작은 형님 밑에서 직장을 알아보라 카더라.”

 

동시에 열찬씨와 영순씨의 얼굴이 소태 씹은 형국이 되었다. 취직시키고 장가보내야 하는 골치 아픈 시동생을 떼어 보낸 그 얄팍한 속이 빤히 보이지만 일단 말은 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영순씨가 시장에 가서 백찬이가 입을 속옷 몇 벌과 베개 하나를 사오고 열찬씨는 그길로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직장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전에 민방위와 병무업무를 본 적이 있어 직장 민방위대장이나 예비군업무당당자들 중에 각별한 사람들이 있어 금방 몇 군데의 추전이 들어왔다.

쉬운 대로 연산동 집에서 버스 다섯 코스인 토곡의 작은 섬유회사에 가기로 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을 했는데 퇴근한 백찬이의 얼굴이 너무 어두웠다. 엔간해서 절대로 제 입으로 먼저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

“와? 무슨 일이 있었나? 예비군중대장이 인사업무까지 본다 카던데 뭐라 안 카더나?”

“처음 인사할 때도 그렇고 작업장에 와서 구내식당에 점심을 먹으러가자면서도 그렇고 형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안심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더라. 일당도 넘보다 조깨 많이 쳐주겠다하면서.”

“그런데 내 표정이 와 그렇노? 꼭 덜 익은 풋감을 씹는 모양으로.”

“그런데 종업원이 대부분 여자들이고 나는 그 여자들 미싱질한 쉐타나 와이샤스나 실을 옮기는 긴데 일도 재미가 없고 먼지도 많이 나고 또...”

“또?”

“미싱 일을 배워볼 참으로 한번 해 보니 손가락이 짧고 뭉뚱해서 체질이 아인 것 같데요.”

좀체 잘 안 하는 올림말을 하는 것이 많이도 긴장한 모양 같아서

“그래 알았다.”

하고 다른 직장을 찾았다.

 

이번엔 군에서 운전을 한 주특기를 살린 화물차운전이었다. 김해로 옮긴 수영비행장의 드넓은 공터에 부산경남일원에 음료수를 공급하는 음료수하치장이 있었는데 그 사이다차를 운전하는 것이었다. 면허증이 있으니 자격은 문제가 없지만 한 트럭에 수십만 원도 넘는 현금을 만지는 일이라 보증인을 세우는 것이 문제였다. 꽤 많은 금액의 재산세납부실적, 그러니까 부동산이 많은 부자가 연대보증을 앉아야한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에 공무원수입으로는 아무래도 성이 안 차 퇴직금으로 조그맣게 집을 지어 팔기 시작한 김청길주임에게 연락을 하니 아무 걱정마라며 자기처남명의로 납세실적증명서를 떼 왔는데 번듯한 8층 빌딩이었다. 그까짓 사이다차 운전하면서 이렇게 엄청난 빌딩주인이 보증을 서는 것은 조선 천지에 다시없을 거라며 서류를 제출하고 회사에서도 보증하나는 정말 대단하다면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렇게 출퇴근을 한 지 사흘이 지난 나흘째 아침에 출근시간이 되어 가는데 뒷방에서는 일어나는 기색이 없었다.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 방에 들여놓은 영순씨가 눈짓을 하자

“야야, 백찬아!”

칸막이 문을 밀며 열찬씨가 부르자 못 이긴 척 일어나는데

“니 출근 안 할 끼가? ”

“...”

물어도 또 말이 없이 머리만 긁적거렸다.

“와, 또 무슨 일 있나? 말 좀 해 봐라. 제발!”

“...”

“데름요, 말해보소. 우리가 알아야 같이 걱정도 하고 해결을 할 수가 있지.”

두 살 많은 형수까지 끼어들자

“그, 그 기...”

간신히 입을 연 백찬이의 이야기는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또 자신의 처지에는 그렇기도 했다.

 

그 사이다차 운전수란 것은 집하장에서 집게차로 사이다박스를 가득히 싣고 부산시내는 물론 양산, 언 양방향, 울산, 경주방향, 김해, 마산방향등으로 제법 큰 중도매상은 물론 연쇄점과 소매상, 식당에 까지 상자단위로 배달을 하고 현금을 수금하거나 장부에 적어오는 일로 그 까짓 사이다상자를 싣고 내리는 것이야 제대군인의 한창 힘으로 아무것도 아닌데 문제는 거래처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

매일 나드는 중도매상의 주인들은 마치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며 새로운 사람에게 온갖 말을 걸고 관심을 표하고 연쇄점이나 구멍가게 아주머니들도 ‘여기다 놓아 달라, 아이구, 총각이 힘도 좋아 보인다, 내가 우리 여동생에게 중매를 서랴?’ 온갖 말을 걸어오고 좀 짓궂은 연쇄점이나 식당아줌마들은 좁은 가게의 모서리에서 ‘아이구, 총각은 참 힘도 좋고 팔뚝도 굵다, 한번만 만져보자.’ 면서 슬슬 쓰다듬고 일부러 등이나 가슴을 부딪치며 실실 웃기가 예사인데 자신은 도무지 그런 일들을 감당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촌사람들이 보통 ‘이발소에 석 달만 갖다놓으면 평소에 아둔한 사람뿐 아니라 보릿대나 짚단도 말을 한다.’는데 이 사이다배달차 역시 시골이나 도시의 골목구석구석에서 나름대로 발랑 까진 아낙네들이 함부로 말을 걸고 슬쩍슬쩍 찌르면서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쯤이야 안 봐도 텔레비전이요, 툭하면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로 별일도 아니고 크게 문제될 일도 아닌 것이었다.

단지 혼자 가만히 두면 열흘에 세 마디도 하지 않는 과묵한 백찬이의 성질이 문제였다. 아니 너도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자기의사는 전달하고 남과 입을 섞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인생살이가 어디 제 입맛대로 사는 골라먹기냐, 생존경쟁이라는 죽고살기의 싸움터가 아니냐고 다그치려다가 멈칫했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를 갑자기 나타난 성격이 불같은 형수와 별별 재주를 다 부리는 야시 같은 형수와 이명고명을 잘 모르는 찔뚝없는 어머니 명촌댁의 틈바구니에서 의논이 맞지 않아 지붕에 불을 지르고 부모자식이 따로 방을 얻어 사는 난장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 해 2년이나 구워먹으며 늘 혼자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조용조용 웅덩이속의 피라미나 유인해서 잡던 그 힘든 사춘기와 외로움을 생각해서 그만두기로 한 열찬씨는

“할 수 없지. 체질에 안 맞아 속병 드는 것 보다야 낫겠지.”

말을 흐리고 출근을 했다.

 

이젠 더 직장도 알아볼 기분이 아니라 점심시간 때 식당에서 동료들에게 탄식을 하는데

“이런, 눈을 번히 뜬 청맹과니 당달봉사를 봤나? 명색이 공무원 주제에?”

사회담당을 하는 나이든 직원이 요즘은 공부를 잘해 공무원이나 교사를 시험 쳐서 들어가거나 국민학교를 나오자말자 양복, 양장, 양화, 양과 같은 양자가 붙은 기술이나 하다못해 이발, 미용, 요리, 운전 같은 기술을 배워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이 무슨 기술학교나 직업학교에 가서 한 3개월이나 6개월 주로 섬유나 기계에 관한 기술을 배워서 취직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동생은 운전기술이 있는 데다 단지 과묵한 것이 문제라면 혼자 조용히 기계를 조립하거나 수리하고 쇠를 깎는 쪽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성격이라며 구포에 있는 부산직업기술학교라는 곳을 소개해주었다.

 

열찬이의 전화를 받은 영순씨가 두 살 아래의 시동생을 마치 친동생처럼 이끌고 구포로 가더니 저녁에는 다음 주에 입소한다면서 안내서와 입소원서를 들고 돌아왔다. 무슨 과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니 아무래도 운전보다는 혼자 조용히 일하는 기계 쪽이 낫겠다고 했다. 원서를 다 작성하고 보호자날인까지 하고 나니 상당한 액수가 되는 기숙사비와 수업료가 문제가 되었다. 고민 끝에 백찬이를 시켜 영주의 큰집에 전화를 해서 의논을 하라고 하니 형수의 대답은 이외로 간단했다.

“와, 작은 형님은 형님 아이가? 우리는 어무이 모시고 아들 공부시키기도 힘드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산일은 부산에서 알아서 하라 카소!”

주말에 부산직업기술학교에서 휴가를 나온 백찬이는 밀링기술을 배운다고 했다. 밀링이 뭐냐고 물으니까 보통 쇠를 깎는 것을 선반이라고 하는데 그 선반공이 주로 둥근 구멍을 깎는데 비해 밀링은 사각형의 구멍을 뚫는 것이라 했고 문외한인 열찬씨는 그런 줄만 알았다. 그렇게 대충 넘어가는 열찬씨와 달리 영순씨는 학원비, 기숙사 비를 대고 주말에 휴가라도 나오면 아쉬운 대로 통닭이라도 사 먹여 그 한창시절의 영양을 보충해주어야 하고 기숙사에서 갈아입을 속옷이랑 약간의 용돈도 주어야하니 가뜩이나 얄팍한 살림에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 수료와 동시에 밀링공 자격증을 딴 백찬이는 고향 상북면 지화리의 그 때 한창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농공단지에 있는 현대알미늄이란 공장에 취직을 했다.

태어난 <버든>과는 10리가 좀 넘고 명촌의 금찬씨 집과는 한 20분 부지런히 걸으면 닿은 거리였다. 취직을 한 다음 주말에 부산에 한번 내려온 후 백찬이는 일이 바쁜지 다시는 내려오지 않아 형수 영순씨는 내심 서운한 눈치였고 아이들도 가끔 삼촌을 찾았지만 열찬씨는 개의치 않았다. 바로 고향이니 몇 안 되는 동네친구나 동창생들과 어울리기라도 한다면 그런 다행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서상균

그렇게 한 시름을 돌리고난 겨울방학 때였다.

“작은 아부지!”

일이 바빠 정신없이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열찬씨가 고개를 드니 뜻밖에도 조카 우현이가 서있었다. 제 할아버지를 닮았는지 180cm도 넘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건장한 미소년이었다.

“이이구, 이기 누고? 우리 우현이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난 열찬씨가 조카를 데리고 동사무소를 나와 정문 앞의 슈퍼에서 우유를 한 병 사 먹이며

“그래 니가 여게 다 오다니 무슨 바람이 불었노?”

의아한 눈빛으로 묻는데

“작은 아부지, 내 대신동의 경남학원에 등록하고 오는 길임더. 재수학원으로서는 전국적으로도 알아준다 카대요. 영주는 촌이라서 어데 학원 같은 학원이 없다아잉교?”

하며 어깨에 멘 가방끈을 고쳐 메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의령에서 태어나 언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밀양의 중학교를 거쳐 영주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난겨울 서울의 일류대학에 지원했지만 실패하고 재수 중에 있는 아이였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제 아비의 머리를 닮아서인지 학급은 물론 학년전체에서도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올렸는데 고3이 되면서 갑자기 자다가 가위에 눌려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진땀을 흘리거나 무엇에 놀란 듯 이불속에 머리를 파묻고 벌벌 떨면서 식욕도 잃고 말이 없어졌는데 무엇보다도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 불안해 초점이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놀란 김해댁이 병원에 데리고 가고 점을 보고 굿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성적이 날로 곤두박질쳤지만 대학원서는 서울의 명문대로 넣었다. 우선은 일찬씨가 시험이라면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자신을 닮은 장남을 믿었고 무엇보다도 김해댁이 제 남편과 아들이 머리 하나만큼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월등하다고 철석같이 믿어온 데다 지난해 우현이의 외사촌이 되는 또찬씨의 아들, 그러니까 손위오빠의 아들이 서울대학교를 지원해 가뿐히 붙는 바람에 공부 하나만은 오빠 집을 이길 것이라고 큰소리를 팍팍 친 자손심상 웬만한 대학교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었다.

입학시험을 치러 우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간 김해댁은 대궐 같은 제 오라비의 집을 두고 굳이 상계동 달동네의 연립주택에 사는 사촌 시누이 귀찬씨의 집으로 하룻밤을 자러 갔는데 이미 서울대에 진학한 조카가 있는 오라비집에서 기가 죽느니 대학교는커녕 먹고살기에도 급급한 시누이집에서 잘 생기고 머리 좋은 아들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친정식구가 왔다고 부랴부랴 시장을 봐 귀한 홍어무침과 쇠고기국, 함경도식 냉면까지 성대한 저녁상을 대령했지만 자기 나름으로는 못 배우고 못사는 시집붙이라고 무시하는 마음에 열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저녁에 자러가는 집이 그냥 먼 친척이라고만 이야기를 해 우현이가 단 한 번도 고모, 고모부소리를 않는 바람에 가뜩이나 외로운 고모부 조형록씨의 가슴에 못을 박아 사촌고모 귀찬씨가 언양의 친정식구만 만나면 두고두고 씹으며 분을 삭이고는 했다.

 

아무튼 그렇게 거룩한 행차를 치른 김해댁의 아들이 맥없이 입시에 나가떨어지는, 일찬씨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열찬씨와 백찬씨를 거쳐 실로 집안에서 최초로 낙방이라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