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군식구②
아무튼 그렇게 거룩한 행차를 치른 김해댁의 아들이 맥없이 입시에 나가떨어지는, 일찬씨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열찬씨와 백찬씨를 거쳐 실로 집안에서 최초로 낙방이라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었다.
아무 탈 없이 인물도, 성적도 다 좋아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잘 나가던 아이가 고3이 되어 하루 아침에 자신감을 잃고 반 벙거지가 된 것은 제 아비로부터 물려받은 정신머리, 그러니까 머릿속의 그 깊이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 영혼의 바다에 겹겹이 들어찬 한 없이 어두운 그늘과 불안한 바람 때문이라고 열찬씨가 짐작하듯이 김해댁은 단번에 시가의 혈통을 원망했다. 그러나 아비 일찬씨는 그 반대로 이 모두가 밤낮없이 ‘아이구, 귀하고도 잘 생긴 우리 우현이!’를 입에 달고 사는 어미 김해댁과 하루 종일 ‘아이고, 우리 장손, 우리 우현이가 원질이지!.’를 되뇌는 할머니 명촌댁의 탓이라고 돌렸다.
그렇다고 원망만 해서도 안 되는 일, 일찬씨의 묵인 아래 김해댁은 정신과병원과 수양관, 조용한 암자 등 별별 수단을 다 써봤지만 이제 놀라거나 가위에 눌리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여전히 의욕도 자신감도 활기도 없이 텅 빈 듯 그저 맥없는 눈빛과 초췌한 표정만 여전한 채 다시 대학입시가 눈앞에 닥친 것이었다.
“우현이 오나? 벌써 총각이 다 됐구나.”
반가운 척 맞이는 했으나 열찬씨를 바라보는 영순씨의 눈빛은 사냥꾼의 총구에 목숨을 맡기고 주저앉은 사슴의 눈빛처럼 애잔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가난에 자꾸만 엉뚱한 일, 달랑 숟가락몽둥이 하나도 못 받은 시집에서 희한하게도 차마 회피하지도 못 할 짐이 은근슬쩍 밀려오는 데 기가 찬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쯤 영주의 김해댁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현이가 잘 도착했냐고 묻고 동서 니가 고생이 많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바로 전화가 끊겼다. 뭐라고 말을 더 하면 당장 작은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냐고 소리칠 것 같아 더는 말도 못 붙여본 부부는 쓴웃음을 삼켰고 잠자리에 든 영순씨는 열찬씨의 손등에 끝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두 달을 묵으면서 학원에 다닌 우현이는 이번에는 과감하게 하향지원, 명문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름은 귀에 익은 중간 정도의 서울의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이 왔지만 영주에선 별도의 연락이 없었다. 다시 평온한 세월이 몇 달이나 흐른 후 이번에는 김해의 순찬씨가 신평의 큰누님 갑찬씨까지 데리고 연산동의 집으로 찾아왔다.
가끔 단감이나 김치를 갖다 주러 들리던 집이었지만 결혼 10년 사이에 이사를 다섯 번이나 하여 그 때마다 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 간 집을 물어 용케도 잘 찾아오던 순찬씨는 전부터 골목입구에 있는 구멍가게와 태권도장 이름을 열심히 언니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문맹인 갑찬씨는 골목어귀의 삐뚜름한 전봇대 두 개와 동네 개들이 영역을 표시하느라고 오줌을 싸질러 냄새가 진동하는 그 전봇대에 쓰인 붉은 페인트의 낙서와 뜯겨나간 스티커를 유심히 살피며 쓰다듬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다음에 혼자서도 그 전봇대를 기억해 잘도 집을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대식가인 두 누님을 위해 연산시장에 가서 값은 좀 싸도 양이 많고 먹음직한 양식 넙치와 가오리 회를 보통 사람들이면 5, 6인분이 충분할 만큼 사왔지만 술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쉰이 다 된 자매들은 우물우물 꾸역꾸역 거짓말처럼 깨끗이 접시를 비우고는 매운탕에 말아 밥 한 그릇 씩도 먹어치워 영순씨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했다.
저녁을 먹고 동생의 안락한 가정과 맛있는 저녁으로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순찬씨가 용건을 꺼내놓았다. 마침 7형제나 되는 시가집의 셋째 그러니까 남편 재근씨의 손위형님의 초상을 치르고 버든의 큰집에 들러 큰어머니를 찾아보고 동네 돌아가는 소문을 듣고 남편과 자식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자신은 신평의 언니와 함께 부산으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누님이 논밭과 가축으로 늘 바쁜 집안일을 하루 늦추고 부산으로 열찬씨를 찾아온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버든에서는 얼마 전에 고무재를 넘어 20리도 더 떨어진 옹티라는 마을에 있는 동산(洞山) 그러니까 동네 산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동산은 산에 붙지 않은 허허벌판인 버든마을에서 소와 사람이 양식을 익혀먹을 화목(火木)을 구하기 위하여 근 백 년 전 호수(戶數)가 조금씩 늘어나던 시절 마을 전체가 추렴을 해서 마련한 산이었다.
공동 산이다 보니 당시의 호주, 그러니까 일제가 전국의 토지조사를 하던 시절의 열세 명 상포계계원의 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산이 너무 멀어 실제로 나무를 하러 가는 일은 거의 없이 그냥 버려져 있었지만 마을에 군의 산림계나 순사들이 산림단속을 나와 아직 마르지 않은 솔가지를 단속하면 옹티의 동산에서 배어온, 주인이 제 산에서 베어온 것이라고 발뺌이나 하던 그런 용도로 쓰인 산이었다.
그 동산이 마을사람들이 차츰 <이 산 저 산 다 자 묵고 아가리만 딱딱 벌리는> 화목 아궁이를 연탄아궁이로 개량하고 소를 먹이지 않자 아무런 관심도 없이 십년도 더 넘게 잊혀 있었는데 마을에 경지정리를 하고 채비지를 팔아먹고 낯선 외지인들에게 과수원부지나 축사부지로 논밭을 거간하며 이미 도시인이 다 된 경지정리조합장을 지낸 둔터어른과 이장 등이 슬며시 그 일부를 팔아먹은 것이 들통이 나 마을이 발칵 뒤집히고 이번에 그 나머지를 팔아 당시 상포계원 후손들이 나눠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버든에 그대로 남아 동산을 파는데 주축이 된 사람들은 견물생심(見物生心) 눈앞의 돈에 눈이 멀어 단 한 푼이라도 더 챙기려고 이미 죽고 후손이 끊긴 사람은 물론 외지로 이사를 간 사람이면 능히 연락이 닿거나 일 년에 한두 번 성묘나 친척집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도 분배대상에서 제외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열찬씨 집안의 경우 할아버지 서촌이손 복성씨의 명의로 최초의 상포계원으로 등록이 되었다가 나중에 큰아들 선출씨가 죽고 상남댁, 명촌댁 열세 남매와 노모를 돌보던 기출씨에게 자연스레 그 명의가 이전되어 있었다고 했다. 모처럼의 큰돈이라 외지에 나간 사람에게 돈을 주느니 마느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미 진장의 기출씨 산소 옆의 집안 밭에 이층 건물과 축사를 키워 소를 키우던 종찬씨로부터 일찬씨에게 연락이 갔다.
동생, 니 빨리 버든에 좀 내려오너라. 까딱하면 큰 재산이 날아간다며. 그렇게 나타난 일찬씨를 비롯한 외지로 나간 사람들이 격렬히 따져 결국은 후손이 나타난 열두 몫으로 공평히 분배해 집집이 2천 만 원도 넘는 그러니까 상답 대여섯 마지기의 값을 일찬씨가 받아 종찬씨에게 술 한 잔을 사주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누님은 그 인정머리 없고 욕심만 똥끝에 찬 무당의 딸년은 재수도 좋아 지난 가을에 35번국도 확장공사 때오룡골논의 찌꺼라지(자투리)땅 보상으로 또 근 천만 원을 사가서 지금 영주에는 웬만한 2층집이라도 살 돈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롱골논의 찌꺼라지 땅이라는 말에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던 열찬씨가 옳다구나 무릎을 쳤다. 전부 340평이지만 논배미 수가 무려 열다섯에 이르는 천수답이라 한마지기라도 부르기도 그렇고 두 마지기라고 부르기도 그런 오룡골논은 먼 옛날 부산에서 언양과 경주를 거쳐 안동에 이르는 35번 국도를 뚫으면서 땅이 도로 양편으로 분리되었는데 먼저 도로 서쪽의 여상(女商)앞에는 열세 도가리에 240평, 또 도로아래 덕천고개의 언덕바지로 왜정때 송진을 공출 받아 기름을 짜던 구덩이가 움푹움푹 흩어진 아카시아 그늘아래 80평이 있었는데 당시 사춘기의 나이로 아버지 대신 농사를 짓던 열찬씨는 보리를 베는 6월이나 나락을 베는 10월말이면 참으로 기가 차는 꼴을 목도하고 침을 탁탁 뱉곤 했는데 땅이 박해 곡식의 풋수도 시원찮은 그 보리 골이나 벼 골에는 추수 때마다 무슨 얼룩이나 피가 묻은 여자의 팬티나 손수건이 대여섯 개씩, 많게는 여남은 개씩 나왔는데 달은 밝고 개구리 우악스레 울어대는 늦은 봄이나 한가위 무렵 온몸이 후끈 달은 읍내의 처녀총각이나 과부와 홀아비들이 남의 눈을 피해 남천내를 건너고 신작로를 한참 걸어 호젓한 일찬이네 논에서 일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물론 언양에도 구포여관을 비롯한 몇 개의 여관이 있었지만 나그네가 아닌 토박이가 그 좁은 바닥에 낯이 팔려 들어갈 수가 없었으니 자연히 왜정 때의 송진굴과 음울한 아카시아 숲이 있고 뒤 쪽엔 향교에서 내려오는 새빗도랑의 높은 언덕이 있어 우묵하게 파인 으스스한 그늘로 밤이 되면 생각만 해도 무섬기가 도는 덕천고개의 열찬이의 논을 찾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 논 앞에 35번 국도에 잘려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 좁은 한 50평의 기다란 자투리땅이 있고 해마다 한여름 홍수철의 큰물로 자갈과 뻘, 복새로 범벅이 되자 건너 마을 향교사람들이 새 길을 내면서 주인이 없는 줄 알고 그대로 밀어붙이고는 기출씨가 땅값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그대로 버려진 그 땅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주변의 정상적인 농토와 같은 가격으로 보상되어 영주의 일찬씨는 또 한 뭉텅이 보상금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순찬씨는 다시 말머리를 돌려 이번에는 자신이 사는 김해 이북면 명동리의 명동 못 위에 아주 헐한 논 서마지기가 나왔다고 그 지역이 머잖아 공장지대로 개발된다고 소문이 파다하니 일단 사놓기만 하면 큰돈이 된다고 열찬씨가 한 번 보고 사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명촌의 소에 학을 떼인 열찬씨가
“아니, 누님. 내가 무신 돈이 있어 논을 다 사겠능교, 논을?”
자르는데
“와, 동생 니는 명촌에 소 사줄 돈은 있어도 김해에 논 살 돈은 없나?”
하면서 빙긋 웃는데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열찬씨가 황급히 영순씨의 눈치를 살피는데 영순씨는 무릎에 안겨 꾸뻑거리는 아이를 재우느라 고개를 들지도 않았고 큰누님 덕찬씨는 벌써 벽에 기댄 채 가벼운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라이 말이다, 야야!”
은근히 웃으면서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명촌의 소가 잘못 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아
“예, 누님.”
제발 영순씨에게 말하지 말라는 애원이 가득한 눈빛으로 열찬씨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에럽기 생각할 것 하나도 없다. 니가 국가공무원 좋은 직장에 댕기니까 새마을금고에 계약금 정도 빌리는 거는 일도 없을 끼다. 일단 계약금 얼마 준비해가지고 이번 주에 김해로 오너라. 같이 둘러보고 맘에 들면 계약하면 되고. 중도금, 잔금도 걱정이 없는 기 지금 영주 니 새이 한테 돈이 꽉 있다 아이가? 두 분이나 보상금 받아 동개 놓은 돈, 밑에서 아야, 아야 하고 찡기서 썩어가는 돈을 좀 빌리도라캐라. 동생 니나 우리 올캐가 너무 살림이나 돈을 넘보거나 경우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 기사 안 들어주겠나? 그것도 안 들어주면 사람도 아니지, 사람도...”
마치 영주의 돈을 빌려 잔금까지 다 치르고 논 서마지기가 다 넘어온 것처럼 손을 탁탁 털며 웃었다. 열찬이가 엉겹결에
“예. 한 번 생각은 해보지요.”
대답하자 아주 흔쾌한 표정으로 자리에 누운 순찬씨는 이튿날 영순씨까지 듣는데서 다음 주에 김해로 땅을 보러 올 것을 단단히 다짐받고 기분 좋게 떠났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아 전전긍긍하던 열찬씨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한참이나 고심을 하다 마침내 영주로 전화를 걸었다. 어무이 잘 계시고 형님도 별고 없지요? 로 시작된 안부가 마침내 본론인 김해 땅이야기와 버든의 동산대금이야기가 나오자
“야, 니 뭐라캤노? 임마, 니 지금 죽을라꼬 환장을 했나? 야 임마!”
외마디소리와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이튿날 오후였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구청의 담당직원이 보고서내용이 맞느니 틀리느니 괜한 시비 같아서 고성이 오고가는 판에 옆자리의 직원이 집에서 전화가 왔다고 옆구리를 찔렀다. 수화기를 받아드니 영순씨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영주에서, 영주 아주바님이...”
를 반복했다.
후다닥 뛰어 집으로 도착하니 영순씨와 정석이가 문간에서 오들오들 떨고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벌건 일찬씨가
“대학 갈 때 소 팔아주고 장개갈 때 빚 내 줬으면 됐지 무슨 돈을 또 준단 말이고? 그래 내가 돈 빌리준다꼬 니가 갚기는 갚을 놈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문 앞에 나동그라진 밥상을 발로 뻥 차버리니 접시와 종발 몇 개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바닥에 이미 몇 개의 사기접시와 술병이 널브러진 것으로 보아 영순씨가 차려다준 술상을 그래도 던져버리고도 분이 안 풀린 모양이었다.
“형님, 형님!”
고함을 지른다면서도 입술만 달달 떨며 열찬씨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영순씨와 정석이를 방안으로 데리고 가 담요를 씌워주고 나오며
“마, 고만 하이소! 논이고 돈이고 내 다시 형님한테 말하면 내 사람새끼가 아이다! 지미. 동냥을 못 주면 쪽박이나 안 깨던지...”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는데
“그래. 니 말 잘 했다! 기왕 깬 쪽박인데 오늘 아주 절단을 내자!”
일찬씨가 부러진 판 다리 하나를 집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또 무엇인가를 깨는지 와장창 소리가 진동을 했다. 방안에선 영순씨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비잉 둘러 선 마을사람 틈에 끼인 김해댁은 일체 말이 없었다. 부엌의 와장창 소리가 이젠 챙그랑, 챙그랑 유리그릇 부서지는 소리로 변할 때쯤
“보소!”
구경꾼 틈에서 사내 하나가 튀어나왔다. 세탁소를 하는 18통장 겸 새마을지도자협의회 민춘식총무였다.
“당신이 이주사형님인지는 몰라도 내가 보니 참 너무 하시네. 내 웬만해선 남의 가정사에 안 끼어들겠지만.”
당장이라도 일찬씨를 잡아챌 듯 다가서고 반장인지 이웃인지 사내 서넛이 더 앞으로 나서자
“보소! 우현이아부지!”
번개같이 일찬씨에게 다가선 김해댁이
“갑시더!”
소리치며 사내들 사이로 길을 뚫더니 순식간에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