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군식구③ - 백찬이 장가
어느 새 정석이가 여덟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일곱 살에 입학시킨 누나 슬비는 벌써 4학년이 되어있었다. 슬비는 조금 예민한 걸 빼면 별 특징이 없는 순한 아이였지만 단지 이름이 <이슬비>로 특별하다는 이유로 아이는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노란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셋이서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짓궂은 아이들에게 자주 놀림을 당하여 울고 오기 일쑤였다. 어미 역시 유치원 때부터 이상한 이름의 아이가 있다고 소문나 다른 엄마들이 모두 얼굴을 아는 <이슬비엄마>로 3년이나 지내온 지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학급의 엄마들 중에 제일 아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억지로 자모회장으로 추천된 것이었다. 짬을 내어 회의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보다도 학급운영과 교사접대에 적잖은 돈이 든다는 것을 익히 들은 그녀는 힘이 달리는 감투를 벗어나느라 꽤나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이름이 평범해서 그런지 정석이의 입학식은 지극히 평범하게 끝나고 말았다.
어느 아이나 다 그렇듯이 그저 조용히 앉아 사람이나 T.V를 통하여 보고들은 것을 잘도 기억하고 정확히 표현하던 이 아이는 이제 꽤 개구쟁이가 되어 있었다. 하루에 백 원씩 주는 용돈을 아침 댓바람에 과자를 사먹고 오후에는 제 누나의 백 원짜리 동전에 눈독을 들이면서 두 살이나 많은 누나를 슬슬 구슬리기가 예사였다. 또 어쩌다 <쌕쌕>이라는 새콤달콤한 오렌지 주스가 한 박스 들어오면 한 자리에서 서너 개를 먹고 학교에서 돌아오자 말자 또 몇 개씩을 먹어 기어이 하루에 바닥을 보는 식탐꾼이 되어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귀엽고 좀은 엉뚱한 아이로 인한 곤욕은 부모인 열찬씨와 영순씨보다는 엉뚱하게도 골목입구 문방구의 동완이 엄마가 치르고 있었다.
열찬씨와 같이 조기축구회에 나가는 정수씨의 페인트가게의 한 구석에 아내인 동완이 엄마가 약간의 문구와 장난감, 값싼 과자 등을 진열하고 잔돈푼을 벌었는데 어쩌다 정석이가 백 원짜리 하나를 들고 와
“아줌마, 안녕하세요?”
하면
“그래 정석이 오나?”
설거지하던 고무장갑을 벗으며 활짝 웃어주지만 웃는다고 다 웃는 게 아니었다.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물건을 고르는 동안 뒤에 서서 기다리는데 이 녀석이 들었다 놓고 들었다 놓고 제 맘에 드는 백 원짜리 물건을 찾느라고 2,30분을 예사로 끄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는 것이었다. 단돈 백 원도 손님은 손님인지라 오지 마랄 수도 없고 나가라고도 못 하고 그렇다고 손님을 가게에 두고 딴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조기축구회에서 가족동반으로 진하해수욕장으로 소풍을 나간 날 영순씨를 잡고 제발 딴 가게로 좀 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살림이 쪼들리든 어미아비의 마음이 늘 허전하고 서글퍼도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아이들은 그 시간만큼 자라났다. 어려서 부터 가난과 고통에 익숙한 덕분인지 열찬씨와 영순씨는 여간한 어려움이나 난간, 속상하는 일이 있어도 이내 툭툭 털어버리고 씩씩하게 잘 헤쳐 나갔다.
그해 추석을 앞두고 열찬씨는 명절 때마다 하던 대로 얼마간의 제사 비를 영주의 큰집으로 송금하고 양정 처가에 줄 처남처제의 봉투를 준비하고 있는다. 며칠 전에 놓은 전화벨이 울려 영순씨가 받는데 영주의 형수 김해댁의 목소리가 열찬씨까지 들려 왔다.
내용인즉 지금 형님이 화가 단단히 났는데 그 이유는 해마다 물가가 오르고 봉급도 오르는데 왜 제사비용 부치는 것은 조금도 오르지 않고 장가가던 그 해와 꼭 같으냐, 그건 필시 돌아가신 아버지는 물론 홀로 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없거나 형님형수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처사라는 것이라며 제사 비를 도로 부산으로 보냈으니 어서 형님한테 사과하고 돈을 좀 더 보태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은 영순씨도 옆에서 들은 열찬씨도 기가 막혀 멍하니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영순씨 보기가 민망했다. 이러다가 눈가에 이슬이 맺힐까 싶어 열찬씨가 미리 선수를 쳤다.
아무 걱정 마라, 이 일은 내가 처리한다면서 그길로 영주로 편지를 썼는데 형님, 제사도 효도도 다 마음에 있는 건데 지금 우리 형편도 넉넉잖아 늘 힘이 드는데 형님이 제사 비를 돌려주시니 제 마음만 받은 것으로 하고 그 돈으로 한창 크는 아이들 고기도 좀 먹이고 살림에 잘 보태 쓰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세 식구가 언양의 선산도 돌아볼 겸 할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는 언양의 종찬씨, 큰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는 버든의 정찬씨집에 들리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월급날보다 앞 당겨 준 보너스로 어제 처갓집의 봉투를 비롯하여 아이들의 양말과 옷 등의 비용을 쓰고 얼마 남지 않은 돈의 재고를 가늠하기 위해 열찬씨가 호주머니의 돈을 몽땅 꺼내 손바닥에 놓고 세어보기 시작했다. 만 원짜리 세 장에 천 원짜리 몇 장을 손바닥에 놓고 호주머니에서 쩔렁거리는 동전을 꺼낼 때였다. 가는 바람에 만 원짜리 하나가 푸르르 날려 하수구 위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열찬씨가 황급히 주우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새파란 만 원짜리는 그 좁은 하수구구멍으로 쏘옥 빠져버렸다. 깜짝 놀란 열찬씨가 하수구구멍으로 들여다 보니 마침 집집이 제사준비를 하느라 물을 많이 쓰는 바람에 엔간한 도랑물처럼 흘러가는 하수구의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열찬씨가 후다닥 뛰면서 하수구의 구멍구멍을 들여다보며 따라갔지만 처음 몇 번은 얼핏얼핏 보이던 새파란 지폐는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근 100미터가 넘는 길의 백여 개의 구멍을 다 들여다보며 뛰어도 끝내 지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폭이 10미터에 가까운 쌍미천으로 합수한 하수가 하얀 거품까지 품으며 기세 좋게 흐르는 것을 보며 열찬씨가 허망하게 먼 하늘을 바라보는데 영순씨가 혀를 끌끌 차며 다가서더니
“소용없소! 마 가입시더. 세상에 손도, 손도 뭐 그런 손이 다 있노? 당신 손에는 뭐 까시가 붙었는지도 모르겠네. 아이구, 내 팔자야!”
하고 장탄식을 하는데 아이 둘은 아직도 여기저기 하수구구멍을 들여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월급이 겨우 십 몇 만원인 형편에 만 원짜리 한 장이면 마치 구렁이알처럼 그 얼마나 대단한 재산인가! 큰길로 나와 시내버스를 탈 때까지 또 버스 안에서도 네 식구는 말이 없었다. 세상에 죄 없는 아이들만큼 제 어미애비의 기분을 알고 그 기분에 따라 웃고 울고 가슴 졸이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마침내 시외버스에 올라 고속도로변의 시원하게 펼쳐진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황금벌판을 보면서 영순씨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본 정석이가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자
“아빠, 괜찮다. 올 해 추석에는 내 통닭 한 마리 안 묵어도 괜찮다.”
열찬씨를 보며 눈을 찡긋 하더니 큰집이 있는 골목길을 향해 뛰어갔다.
명절에는 어머니가 있는 영주 큰 집으로 다녀오는 백찬이는 어쩌다 가끔 부산의 열찬이네 집을 찾았는데 오랜만에 왔으면서도 무엇을 하러온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도무지 말도 없고 표정도 없고 삼촌이라고 반색하는 조카들에게도 씩 한 번 웃어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하나 뿐인 시동생이 왔다고 소고기를 사다 국을 끓이고 소주까지 한 병 곁들인 영순씨는 하다 못 해 그간 힘들여 기술학교를 보내주어 자격증을 따고 이렇게 직장에 잘 다니는 것이 다 형님, 형수덕분이라는 치사는 안 하더라도 하다못해 조카들이라도 번쩍 들어 올려 많이 컸다고 놀라는 척하거나 나란히 손을 잡고 구멍가게에 가서 사탕 한 봉지 사주는 법도 없었고 들어올 때 무얼 사오는 법은 더더욱 없는 것이 내심 섭섭한 눈치였다.
그러나 열찬씨는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세상을 눈뜰 나이에 갑자기 들이닥친 형님네 식구들로 비록 잔정은 없어도 그간 늙은 부모에게 태어나 아버지얼굴도 얼마 못 보고 자랐다고 늘 애인하게 생각하는 어머니 명촌댁의 끔찍한 고임을 받으며 조용히 살다가 하루 아침에 어린 두 조카들에게 모든 관심이 넘어간 데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큰 형님 일찬씨의 눈치를 보고 숨죽이고 살다 중학교를 마치고 2년간을 고등학교도 가지 못 하고 혼자 들이나 갱빈을 돌아다니며 쓸쓸히 보낸 사춘기와 2년 늦게 입학한 농업고등학교의 동기가 된 두 살 적은 중학교후배들과의 어정쩡한 학교생활, 비록 어머니가 있기는 해도 자기의 집처럼 편히 쉬기엔 뭔가 마땅하지 않는 영주의 집과 단 한 사람도 진심으로 자기를 위해주거나 반대로 자신이 스스럼없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는 직장과 객지생활로 하루하루를 섣불리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거나 남보다 먼저 나서는 일이 없이 그저 판세가 돌아가는 분위기나 남의 눈치를 살피며 은인자중 살아온 습관 탓이라는 것을.
백찬이가 돌아간 뒤에 당신 수고했다며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는지 설명을 하며 아내를 달랬다. 다행히 그런 시동생보다 단 두 살이 많은 영순씨는 친정에도 백찬이또래 동생들이 있어서 그런지 쉽게 마음을 풀고 오히려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한 번은 마침 백찬이가 집에 있을 때 김해의 순찬씨가 단감 한 상자를 이고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간 다섯 아이를 공부시키는 동안 남편 김재근씨가 그저 묵묵히 땅을 파고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고 한 번씩 신세타령을 하거나 괜히 삐치기나 하면서 조금씩 늙어가는 동안 눈치가 빠르고 거침이 없으면서도 나름 세상살이에 눈을 뜬 순찬씨는 말만 김해군이지 사실은 심심산골이나 다름없는 이북면의 막바지 산골이자 높다란 국도아래의 그 척박한 언덕배기 밭에 보통 사람은 생각도 못 할 딸기를 심고 단감나무를 심어 원주민들로서는 생각도 못 하는 수입을 올려 살림이 나날이 불어가고 있었다.
딸기나 단감을 파는 일 역시 도매상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몇 상자씩 이고 시외버스,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고 구포나 온천장의 육교아래나 골목입구의 목 좋은 곳에 펼치고 팔았는데 그 거침없는 성격과 짱짱한 목소리로 거의 모든 온갖 행인들을 불러 모아 단 번에 떨이를 하고는 했다.
그렇게 장사를 마치면 품질이 떨어지거나 팔다 남은 딸기나 단감을 열찬씨네 집에 갖다 주고 어린 조카들이 맛있게 먹는 보습을 흐뭇하게 보곤 해서 아이들도 둘째고모를 아예 <딸기고모>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딸기나 과일이 많을 때는 봉고차로 여남은 상자를 싣고 와 열찬씨집 골목에 풀고 영순씨가 가깝게 지내는 동네 이웃들에게 게 절반이상을 팔아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날도 단감을 다 팔고 일부러 남긴 한 상자를 이고 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둘째와 막내의 두 남동생을 한 자리에서 만난 순찬씨는 너무나 신이 나서 단번에 할렐루야를 반복하며 하느님아버지에게 긴긴 감사기도를 드리고 찬송가도 두 곡이나 불렀다. 이어 저녁상이 들어오자 다시 일용할 양식과 귀한 음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데 모처럼 은비늘이 반짝이는 기장에서 난 낚시갈치찌게에 침이 꼴깍꼴깍 흘리던 백찬이가
“아이구 누부야, 아멘이다, 아멘.”
소리치는 바람에 비죽이 웃으며 기도를 마치고
“백찬이 니는 나가 몇 살인데 안주 알라처럼 보채노?”
하더니
“암만 세월이 좋다해도 총각나이 스물아홉이면 적은 기 아이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 아이가 서른!”
하면서 자신의 큰 아들 상철이보다 겨우 일주일 먼저 난 동생, 어머니명촌댁이 젖이 적이 수시로 드나들며 암죽대신 자신의 젖을 먹여 키운 막내 동생을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아이구, 남동생을 둘이나 만났으니 오늘은 마 여서 자고가야겠다. 늙은 영감탱이가 애 터지게 기다릴 것도 아이고 내가 하루 늦까 간다고 김해천지가 무너질 것도 아이고...”
하마 돌아갈까 조바심을 내던 영순씨의 기대를 저버리고 양말을 벗고 세수를 하러나갔다. 평소에 나이어린 올케라고 끔찍이 위하고 시누이심술을 부리는 일이 일절 없었지만 그 기나긴 기도와 찬송에 질린 영순씨는 오늘 저녁 몇 시에나 잠자리에 들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마침내 세수를 하고 들어온 순찬씨가
“백찬아, 니는 장개 안 갈 끼가? 지금 현대자동차는 월급 많고 좋은 직장이라고 소문이 나서 니가 맘만 무면 시집올 처자들이 샜을 낀데 말이다. 내가 우리 상철이를 보면 그 아는 비록 내 자식이지만 니 조카라 그런지 니보다 덩치도 인물도 못 한 것 같고 직장도 중소기업이라 도무지 처녀도 못 사귀고 중매도 안 들어와 애가 타 죽겠다. 그런데 백찬이 니는 엄마가 계신다 캐도 천치 같은 그 늙은이가 무슨 용맹이 있는 것도 아이고 니 큰 형수 김해댁이가 힘을 써야 되는데 추석에 영주 가이 뭐라 가더나?”
“...”
“암말도 없제?”
“야.”
“그 기 다 꿍꿍이속이 있는 기다. 지가 나서서 장가를 보내면 지가 모든 경비를 대야하기 때문에 모리는 척 하는 기다. 와, 그때 임시조치법으로 아부지의 전답이 다 몽땅 일찬이한테로 넘어가고 버든집 팔리서 난리버꾸통이 났을 때 웃각단 한 마지기 망내이 백찬이 몫으로 남가 논 거 안 있나? 그 다음에 야시같은 너거 형수가 그 논을 다른 논보다 맨 먼저 팔아치우더라 안 카나? 안 그래도 동생들 도라칼까 싶어 차곡차곡 팔던 판에 막내 몫으로 이름 지은 것을 그대로 두고는 잠이 안 왔겠지. 마치 목구멍에 넘어가던 밥을 뱉어 넘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세상에 자식 같은 막내 동생이 어디 넘이가 말이다.”
“...”
“그래서 제대한 백찬이 보고 부산에 가서 취직하라고 내려 보내고는 취직을 하든 장가를 가든 손을 탁탁 털고 앉은 기라. 그런데 니가 대기업인 현대자동차로 옮기고 나니 인자 한시름 놓았다고 홀가분하게 말이다.”
“...”
“그라이 우짜겠노?”
지금까지 백찬이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던 순찬씨가 갑자기 영순씨쪽으로 고쳐 앉으며 똑바로 쳐다보자 영순씨는 그만 가슴이 철렁하는데
“세상에 황소 뿔을 후아도 깨알받은 놈 하고 욕심 많은 놈은 우짤 방법이 없단다. 욕심이 똥끝까지 찬 인간들은 아무리 귀에 못대가리가 앉도록 이야기를 해도 ‘그래 니는 씨부리라, 나는 눈도 깜짝 안 한다.’ 하고 눈만 꿈뻑꿈뻑하며 지 욕심만 채운단다. 그라이 우짜겠노?”
영순씨에게 눈을 꿈뻑했다.
“에에-?”
영순씨가 끔뻑 놀라는데
“사람이 길을 두고 메로 가겠나? 우짜겠노, 옛 말에 큰말이 없으면 작은말이 큰말노릇을 한다고, 소행으로 치면 괘심하지만 영주 큰형님, 형수가 안 하면 부산의 작은형님, 형수가 해야지 우짜겠노? 올케야.”
“예, 아, 예에.”
엉겁결에 대답한 영순씨가 불각 중에 너무나 엄청난 숙제를 떠맡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밤을 샌 순찬씨와 백찬씨가 돌아가고 난 뒤로 영순씨는 동네 아낙들이나 월부화장품을 팔러 드나드는 외판원에게 자연스레 시동생의 중매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