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시대9-방직여공들의 생애사】 동일방직 사건 -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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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26 17:30
  • 업데이트 2022.09.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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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부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인천시립박물관]

이번 호에서는 동일방직 사건의 배경과 진행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개괄해 보겠습니다.

1) 한국노동운동사상 최초 여성노조지부장의 선출

동일방직 노조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결성되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에 의해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동일방직노조도 대부분의 타 작업장의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조합원들의 복지후생에 전념하기보다는 국가의 억압적인 노동정책에 순응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됩니다. 군사정권의 등장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견고한 사회통제에 방점을 찍혔던 당시의 사회적 기류에 따라 전반적인 노동운동이 체제 순응적으로 변해갔고 동일방직의 노조도 비슷한 조류 속에 움직이게 됩니다[최장집 1989; 김은미 1987; 임현진 1986; 오글 1990].ⅰ)

동일방직 노조는 1946년 설립 이후 1972년 5월, 주길자가 지부장선거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줄곧 남성중심의 지도체제로 운영되어왔습니다. 1972년 지부장선거 당시, 전체 총 1,383명의 노조원 중에서 1,214명이 여성이었을 정도로 절대다수의 조합원은 여성이었습니다. 작업장노조가 산업노조 산하로 구조 개편되면서 하위조직은 상위조직의 제안에 ‘도장이나 찍어주는’ 존재로 전락하면서 현장의 자율성은 상실되었고ⅱ), 작업장노조의 주역할은 조합원의 복지향상이나 민원해결이 아니라 경영진과 협력하여 생산성향상을 독려하는 것으로 중심이동하게 됩니다. 중간관리자가 노조간부들을 소집해서 노조경영지침을 하달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1972년 첫 여성조합장에 당선된 주길자는 노조원들이 추석떡값을 거부할 권리, 추석떡값대신 상여금 100퍼센트를 요구할 권리, 해고노동자의 복직ⅲ), 유급생리휴가, 한 주 6일 근무, 노동조합의 활동을 알리는 소식지배포와 이런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법적 행동을 할 권리를 주장했고 경영진은 이를 수용하게 됩니다.

2) 여성노조를 향한 경영진의 적대감

주길자의 임기가 만료된 후 이영숙이 차기 조합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영숙은 임금인상, 상여금과 퇴직금의 지급 이외에도 몸수색의 즉각적인 중단ⅳ), 기숙사 생활자들의 식사시간 보장ⅴ), 해고노동자의 복직 등을 추가로 요구하였습니다. 1975년 동일방직노조 연간활동보고서에 의하면 생리휴식, 회사설립일의 공휴일화, 기숙사에 온수 공급, 공장 신용소비조합 설립 등의 안건이 성공적으로 추인, 추진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1985, 36].

이렇게 노조운동이 활기를 띄게 되자 사측의 탄압도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원 여성이라는 조합의 간부 구성으로 인해 협박과 뇌물공여라는 기존의 회유방식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에 사측은 노조를 군대식으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로 상당수의 여성노동자들이 속해있던 도시산업선교회가 배후선동세력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에 노조의 요구는 사측을 향한 ‘불순한’ 이념적 도전으로, 노조원들은 반자본주의 성향을 가진 도시산업선교회의 ‘꼭두각시’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 소속으로 활동하던 동료들을 직속상사에게 밀고하는 제도까지 도입이 되었고, 작업장의 십장들은 직접관리 대상인 노조원들에게 선교단체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지하라는 협박과 명령을 내리는 사례들이 속속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노동조합 내에서도 ‘과연 어떤 안건이 정당한가?’에 관한 논란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측이나 남성 조합원들은 병가 인정이나 몸수색 중단 등은 그다지 중요한 안건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고ⅵ) 이에 여성주도 동일방직노조는 적대적인 고용주와 노조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남성노조원들의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3) 1976년 지부장선거와 노골적인 반노조기류의 생성

1976년, 또 한 번의 선거가 다가오자 노조와 사측은 노골적으로 대립,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조합원들과 사측은 또 다시 여성이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는 일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에 뿌리를 둔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을 이념적으로 불순하게 여기던 사측은 선교회와 관련이 있던 노조간부들과 노조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내야만 한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남성노조원들의 경우, 삼교대를 하던 여성들과는 달리 이교대의 특권과 승진의 기회가 주어진 상태였기에 여성주도 노조운동에 열심일 이유가 상대적으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영숙 지부장의 임기가 끝이 나면서 남성들과 사측의 노조탄압은 더욱더 강경하게 변했습니다. 정례노조회의는 남성들의 불참으로 계속 성회가 되지 않았고, 간부회의는 정족수의 미달로 안건처리가 불가능해지며 노조의 기능자체가 마비되어버렸습니다.

사측에서는 ‘당근과 채찍’의 전술로 어용노조를 심기위해 바삐 움직였습니다. 노조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전향자들에게는 뇌물과 향응을 제공했고, 비전향자들을 향한 감시와 통제도 동시에 강화되었습니다. 야간근무 시간동안 깜빡 졸았다는 이유로 노조원을 해고하는 ‘보여주기 식’ 인사전횡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작업장이나 작업내용의 변경을 통한 노조원들의 통제방법도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4) 나체시위와 경찰폭력

1976년 7월 23일, 경찰은 노조회계장부에서 7만 원 상당의 영수증이 불비하다는 사측의 형사고소를 접수하고 당시 지부장이던 이영숙을 횡령의 혐의로 체포하고, 사측은 경영진에 우호적이던 노조원들만을 소집하여 지부장 선거를 개최하게 됩니다. 여성노동자들의 투표권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기숙사 문 밖에서 못을 박아 노조원들의 출입을 폭력적으로 통제해 버립니다. 감금된 여성들의 일부는 공포감에 문을 부수고 탈출하였고, 다른 일부는 4층짜리 기숙사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여성노동자들에 의한 노동파업이 바로 시작됩니다.

노동자들은 회사 정문 앞, 잔디밭에 모여 앉았고 이영숙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동요하게 됩니다. 시위를 분산시키기 위해 사측은 수돗물과 전기 공급을 끊어버리고, 화장실을 폐쇄하였으며, 구내식당의 배식도 멈추도록 지시합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과 친척들의 면회도 허가되지 않아 노동자들은 동일방직 구내에 고립되어 버렸고, 외부에서 차입한 음료수는 경비들이 모두 깨고 폐기해버려서, 노동자들은 7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사흘 동안 단식투쟁을 하게 됩니다. 최초 200명이던 농성자들의 수가 농성 사흘째에는 800명으로 증가합니다.

1976년 7월 25일, 단식농성 사흘 째 되던 날, 완전무장을 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농성의 강제해산을 시도하였고, 자진해산을 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하게 됩니다. 경찰들이 농성장소로 다가오기 시작하자 농성자 중 누군가가 ‘우리가 옷을 벗으면 감히 끌고 가지 못할 거야. 어떻게 우리의 벗은 몸에 손을 대겠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에 농성 중이던 여성노동자들은 한 둘씩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항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진압경찰과 남성노동자들은 반라의 여성들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기 시작하였고, 사흘간의 단식농성으로 심약해진 여성들을 발로 가격하며 경찰차에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공공장소에서 난동을 부린 혐의로 27명의 여성들이 체포되었고, 50명이 충격으로 실신하였으며, 7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고, 14명이 중상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2명의 농성참가 여성은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됩니다.

이상은 동일방직 공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에 관해 서술하였고 다음 호에는 동일방직 여성들의 노동저항이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계속해서 연재하겠습니다.

<주>

ⅰ)당시 한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던 삼성의 경우도 강경한 반노조정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삼성 창업주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운동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유명합니다(조지 오글, 1990, ix). 박정희의 집권기간 동안 첩보기관이던 중앙정보부의 노동운동관련 정보수집과 개입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조지 오글, 19771990).

ⅱ)노동조합은 전국단위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업단위의 섬유산업노조(1981년 결성), 작업장단위의 직장노조(15명 이상 고용)의 위계적 조직으로 구성되었습니다(신광영과 박준식 1989).

ⅲ)사전허가를 받지 않고 건강상의 이유로 이틀간 결근한 노동자가 해고를 당하자 노조는 복직을 요구하였고 이에 동일방직 사측은 이 해고 건을 한 달간의 무급휴가로 변경, 처리하였습니다.

ⅳ)매 교대시간이 끝난 후 공장의 수위들은 노동자들이 실과 천을 몰래 반출하는 일을 막기 위해 몸수색을 실시하였는데 여성들이 다수였던 노동자들의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많은 민원을 발생시켰습니다.

ⅴ)15분이던 기존의 식사시간을 45분으로 늘여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ⅵ)한 심층면담자의 구술에 따르면 남성조합원들이 노조운영에 관해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잡고 늘어지고 타협도 할 줄도 모른다고 공격했지요. 너무 고집불통이라고요. 사측에서 뭔가를 얻어내려면 뭔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여성들은 타협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이 노조에 학을 떼게 된 겁니다. 남성들이 노조와 거리를 두게 되면서 여성들은 더 자기들끼리 뭉치게 되었지요. 결국 여성들은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김미경

◇ 김미경 : ▷현재 부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강사로 일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17년까지 일본 히로시마시립대학에서 정년보장교원으로 봉직했다. ▷여성, 기억, 인권, 평화를 주제로 다수의 연구논문을 출판했으며 재미한국정치연구회장, 국제정치학회인권연구위원장, 한국풀브라이트협회 부회장, 민주평통 일본대의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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