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시인 김광섭(金珖燮 : 1905~1977)이 1968년에 쓴 시 ‘성북동 비둘기’이다. 자연 파괴로 삶의 터전을 잃은 비둘기,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사랑과 평화까지 낳지 못하는 비둘기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과거 평화의 상징이던 비둘기는 지금 도시에선 유해 조수로 바뀐 지 오래다.
우리는 급격히 공업화 도시화되면서 황폐해지는 농촌을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도시화로 야생동물 특히 새들의 생존환경도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대체로 종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투쟁을 벌이며 쇠멸의 길로 가고 있다. 적자생존. 물론 게 중에는 잘 적응하는 종류도 있기는 있다.
도시화된 새들은 점차 멸종위기종이 돼간다. 성북동 비둘기처럼 공사장에서 알을 낳아야 하는 새들의 처참함 상황이 가끔 카메라에 포착돼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한다. 흰목물떼새와 꼬막물떼새 등이 그렇다. 그런데 새 멸종 원인 1위가 ‘고양이의 공격’이고 2위가 ‘도시의 유리벽’이라고 한다. 고양이의 공격으로 미국 캐나다 지역에서만 한 해 25억 마리의 새가 고양이에게 물려 죽는다는 것이다. 미국 뮬런버그대 조류학과 다니엘 클램 교수는 도시에 세워진 유리벽에 부딪혀 50년간 30억 마리의 새가 죽었다고 밝혔다(여섯 번의 대멸종 제2부 침묵의 봄, docuprime.ebs.co.kr).
![부산역 인근 중학교 주변 로프에 앉아 있는 검은이마직박구리(왼쪽)와 개똥지빠귀 [박중록 제공]](/news/photo/202210/19836_27224_2448.png)
반면 도시화와 더불어 어느덧 새들도 도시생활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인가에서 제비나 참새와 같은 새는 쉽게 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새들은 사람을 두려워했다. 새들에게 대도시는 살기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근래에는 대도시의 공원이나 도시 구조물 혹은 인가 주변에 아예 눌러 붙어 사는 도시화된 새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도시새’로는 제비나 참새 외에도 직박구리, 찌르레기, 동박새, 물총새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도시새들을 ‘신앤트롭(Synanthrope)’이라고도 부른다. 일본의 조류학자인 시바타 도시타카(柴田敏隆)가 지은 『새의 행동학(鳥の行動学)』(나쓰메사, 2006)을 보면 신앤트롭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의 ‘신(Syn)’과 인류를 의미하는 ‘앤트롭’의 합성어라고 한다. 인류문명의 좋은 것을 취하는 ‘인류문명 활용형 동물’을 의미하는데 그 전형적인 것이 바로 이들 도시새라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새의 특징은 IQ가 높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뭐든지 잘 먹어 환경에 대한 적응이 빠르고, 무리를 짓고, 번식력이 왕성한 점 등이 공통요소이다.
![부산 수영구 민락동 2층 가정집 마당에 주인이 내놓은 땅콩을 먹고 있는 직박구리 [박중록 습지와새들의친구 운영위원장]](/news/photo/202210/19836_27223_2255.png)
이 중 대표적인 새가 직박구리이다. 출근길에 집 주변 나무 위에서 ‘찍찍’ 하고 울어대는 새 말이다. 직박구리는 열대 원산의 1속 1종으로 원래라면 천연기념물에 들 정도의 의미 있는 새이지만 너무 수가 많은데다 근래에는 농작물이나 과수원에 피해도 입히고 있어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 예전의 직박구리는 여름철이 되면 마을에서 모습을 감추고 산지에서 번식해 겨울이 되면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좁은 지역에서 계절 이동을 하는 일종의 ‘떠돌이새’였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일년 내내 인가 주변에서 생활하고, 도심의 공원이나 정원의 나무에 집을 짓고 번식하는 도시새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직박구리가 도심에 진출한 것을 1970~80년대로 잡고 있다. 일본 자료를 보면 일본 대도시 특히 도쿄에 매미가 줄어든 이유 중 하나가 직박구리의 번식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주로 산림 주변의 농작물, 특히 겨울 야채인 양배추나 감, 밀감 같은 과일 혹은 단 꿀을 가진 꽃들을 먹던 직박구리가 이제는 매미나 잠자리도 잡아먹는 잡식성 조류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근년에 부산 도심에 아열대지방 새인 검은이마직박구리가 발견되기도 한다. 박중록 습지와새들의 친구 운영위원장은 “지난해 가을 사무실이 있는 부산역 인근 중학교 주변에서 검은이마직박구리 십여 마리를 발견한 이래 요즘도 가끔 만난다”며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관찰되기 시작해 지금은 전국 곳곳에서 관찰되는데 지구의 질서가 깨어지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산의 한 가정집 장독 뚜컹에 담아놓은 물을 마시러 내려온 동박새 [박중록 습지와새들의친구 운영위원장 제공]](/news/photo/202210/19836_27222_2059.png)
도시에 적응한 찌르레기는 원래 ‘농림조’라고 불릴 정도로 익조(益鳥)였는데 도시에 진출한 뒤부터는 해조 취급을 받고 있다. 황조롱이도 도시의 구조물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작은 도시새들을 잡아먹으며 살고 있다. 동박새는 비닐섬유를 재료로 집을 지어 살기도 한다. 깨끗한 계곡에만 사는 것으로 알려진 물총새도 요즘엔 아파트 베란다의 수조까지 덮치는가 하면 일본 도쿄에선 제비가 은행의 자동문 개폐 센서까지 기억해 실내에 새끼를 낳고 먹이를 물고 오가는 모습까지 확인돼 ‘신앤트롭’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물총새라면 흔히 깨끗한 강에서만 서식한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최근에는 도시의 더러운 개천에서도 많이 볼 수 있게 됐다. 어느덧 물총새는 도시화에 적응한 새 중에 하나가 되었다.
『동네에서 만난 새』(이치니치 잇슈 글·그림, 2022)에도 이런 도시새의 사례가 잘 소개돼 있다. 큰부리까마귀는 육류와 같이 기름진 먹이를 좋아하는 잡식성 조류다. 동물 사체도 잘 먹어서 자연계의 청소부 역할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는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뒤져서 먹이를 찾는데 그중에도 기름진 것 고기비계, 감자칩, 마요네즈 등을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흔히 우리가 건망증이 심한 경우 친구끼리 농담으로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까마귀는 머리가 좋은 새이다. 까마귀는 다른 새에게는 볼 수 없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해 먹이행동을 하는 경우도 보인다. 예를 들어 호두나 조개를 높은 곳에서 떨어트리는 행동이 자주 관찰되는데 자동차가 빨간 신호등에 멈출 때 호두를 놓아두고 파란불에 지나가며 바퀴에 호두가 깨지게 만들어 다시 신호등이 바뀌면 날아와 호두를 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둥지를 지을 때 철제 옷걸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가정집에 빨래가 걸려있어도 솜씨 좋게 옷걸이만 벗겨내 가져가 버린다고 한다.

황조롱이는 본래 벼랑처럼 높은 곳에 둥지를 터는데 최근에는 교각에 가로 놓인 철제빔에도 자주 둥지를 트고 도시의 고층빌딩에서 번식하는 황조롱이도 종종 언론에 소개되기도 한다. 박새류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옅은 편이지만 요즘에는 우편함이나 스탠드형 재떨이 같은 데까지도 둥지를 터는 과감함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기사 우리동네 아파트 산책길에서 만나는 비둘기들은 한마디로 겁이 없다. 사람들이 한 발 옆에 지나가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모이를 주서 먹는데 여념이 없다. 어릴 적 같으면 해꼬지 장난질이라도 했을 것 같은데. 정말 강심장이다.
아무튼 새가 살지 못하는 곳엔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도 살 수 없다. 도심의 단독주택에 약간의 마당, 풀꽃이 있는 집이라면 땅콩같은 견과류를 내놓으면 직박구리나 동박새, 박새 등 도시새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 도시에서 새와 인간이 더불어 사는 ‘공존’의 지혜를 익혀야 할 것 같다.
<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