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승진 그리고 전출②
그제서야 영순씨가 움찔했다. 열찬씨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술이 적당히 취해 영순씨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달려들 때의 분홍빛 눈동자가 삼각형으로 변하는 것과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화가 날 때의 활활 불타는 삼각형의 눈빛을 익히 구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에
“이 주사님, 이 주사님, 이제 내려간답니다. 어서 오이소.”
어디선가 안내직원이 찾는 소리가 들려 둘은 눈빛을 풀고 숲에서 나왔다.
산업시찰에서 돌아온 영순씨가 달라졌다.
우선 기성복매장에서 깨끗한 양복 한 벌과 와이셔츠를 두 개나 사오더니 매일 아침 열찬씨에게 머리를 감게 하고 어떤 때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붙여주기까지 하면서 깔끔한 모습으로 출근하게 헸다.
그리고 동장이나 사무장 중에 누구를 통해서 구청사람들과 식사를 하거나 인사를 하면 어떻게든 비용을 대어준다고 제발 어떻게든 루트를 찾아보라고 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 극성스러워졌는지 곰곰 생각하던 열찬이에게 뭔가 집히는 게 있었다.
자신들이 결혼한 뒤 처음 부산을 방문한 서울의 셋째 외삼촌이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부산의 명문 B고등학교의 동창을 통하여 구청이나 시청의 요직에 근무하게 하고 배경이 든든한 집안의 처녀에게 장가들게 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게 할 것을 무엇 하나 변변치 않은 월남자 출신의 직업군인, 게다가 정화규씨의 고물상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집의 딸과 결혼한 것을 심하게 질책하던 말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비록 열찬씨가 먼저 손 내민 결혼이었지만 했지만 아무튼 그때 외삼촌의 말이 실현되기라도 하듯 지금 열찬씨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너무나 잔돈푼을 밝혀 마치 <장끼전>의 수꿩처럼 생콩인지 불 콩인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일단 집어삼키고 마는 천만해동장에게 무얼 부탁하고 돈을 맡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 될 판이었다. 그렇다면 사무장에게 부탁을 해야 되는 판인데 천신만고 끝에 사무장이된 지금의 사무장은 지금 한창 사무장이 된 즐거움을 누린다고 할까, 통반장, 새마을지도자와 어울려 다방에서 차를 마시거나 부녀회원댁에서 파전을 구워먹으며 점 백 고스톱에 잔뜩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김현택이라는 이름의 이 친구는 후리후리한 키에 어깨가 벌어지고 멀끔한 얼굴이 늘 불콰하게 혈색이 좋은 미남이었다. 거기에다 9급 출신이 아닌 7급 출신으로 구청의 요직에서만 근무하다 서른여섯 나이로 일찍 6급주사가 된 전도가 양양한 젊은이였다.
심지어 삼촌이 시청의 손꼽히는 보직의 과장으로 얼마 안 있어 구청장으로 승진해서 동래구로 나올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한마디로 동래구의 기린아요, 전도양양한 젊은이였는데 너무나 자신감이 넘쳐서일까, 동사무소의 근무는 성실하기보다는 다소 무사안일하고 방종(放縱)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아마도 그가 주로 총무과에서 인사나 감사를 담당했던 인맥을 믿고 그러는 것 같았다.
열찬씨가 연산1동 사무소에 부임하고 한 1주일 뒤쯤 이었다. 새로 발령받은 김현택 사무장이 구청이 아닌 동사무소입구의 청음다방으로 열찬씨를 불렀다.
전에 연산4동사무소에 근무하던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낮에 입었던 조기축구회의 추리닝을 입고 숙직근무를 하는데 마침 감사계의 주무 김현택주무가 근무확인을 나온 일이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와 얼굴을 한번 쓰윽 쳐다봄과 동시에 다짜고짜 왜 추리닝을 입었느냐, 여기가 사무실이 아니고 운동장이냐고 윽박질렀다. 열찬씨가 숙직실에서 누워 자는데 양복이면 어떻고 추리닝이면 어떠냐고 추리닝을 입고 숙직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해도 막무가내였다. 기어이 확인서를 받아간 뒤 경고장을 보내왔다. 분개한 동료들이 연말에 복무단속실적을 올리기 위해 투망(投網)식으로 아무데나 그물을 던져보고 만만한 동직원이나 족치는 건 너무 심한 처사로 항의라도 해보라고 했지만 숫기가 없는 열찬씨는 그만두었다. 경고는 징계와 달리 승진이나 인사고과에는 반영이 되지 않아 스스로 분한 마음만 달래면 되는 것이었다.
“이형, 오랜만이요. 난 이제 이형만 믿겠습니다.”
다방에 들어서는 열찬씨를 보고 김현택사무장은 너무나 공손하게 이야기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평소에도 붉은 얼굴이 한층 시뻘겋게 변하는 것이 다시 안 볼 줄 알고 억지로 복무단속을 한 일이 상기된 모양이었다.
“승진 축하합니다. 그리고 사무장부임도요. 어서 들어가십시다.”
테이블에 놓인 사무용품을 싼 보따리를 들고 나오려는데
“이형, 잠깐만 좀 앉으세요. 차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하십시다.”
애원하듯 자리에 앉히더니
“내 연산동에서 근무하려면 고참 이열찬주사의 도움 없이는 애로사항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차마 말하기는 그렇지만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이 김현택이 좀 잘 도와주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사무장님!”
짐짓 밝게 이야기하고 동사무소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직원과 단체원에게 소개시키고 각통을 돌며 통장 집을 알리고 개발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유지들에게도 인사를 시켰다.
이후로 사무장은 단 한 번도 열찬씨를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이 “이형! 이형!” 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처음부터 너무 좋은 자리에 근무하면서 좋은 식당, 좋은 술집에서 접대를 받았는지 씀씀이가 커 자주 돈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구청의 동료들과 2차, 3차까지 술을 마셨는데 마지막엔 온천장의 맥주홀에 갔느니 기생집에 갔느니 자랑이 대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스톱을 좋아해 점심식사가 끝난 짧은 시간에 아구찜 집이나 다방내실에서 판을 벌려 직원들은 물론 통반장이나 단체원들과 어울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무장보다 더 고스톱을 즐기는 정년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은 파출소장이 부임하면서 사무장의 고스톱 판은 아연 절정을 맞았다. 점심시간이 끝나도 게임이 끝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계급사회가 무엇인가, 잃었든 땄든 이럴 때는 높은 사람, 사무장이 아닌 졸병 열찬씨가 사무실로 돌아와야 했다.
동사무소에선 아무리 바쁘거나 외근일이 많아도 사무장이나 총무주임중 하나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불문율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오후 네 시도 지난 퇴근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전화가 와서
“이형, 사무실에 별일 없지요?”
“예.”
상투적인 통화가 끝나도 전화를 끊지 않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평소 눈치가 무딘 열찬씨도 무언가 집히는 게 있어
“와? 끗발이 안 납니까?”
“예, 돈 되면 조금만...”
이렇게 돈 몇 만원을 갖다 주고 오기가 일쑤였는데 나중엔 파출소장과 사무장과 청년회원 몇이 일요일에도 노름판을 벌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이형, 새마을금고에 대출을 받으려면 우짜면 되는 가요?”
사무장이 물어왔다. 동직원의 가장 장점이 새마을금고에서 어렵잖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사무장을 데리고 새마을금고로 가서 이사장과 상무에게 소개를 시키고 커피를 한 잔 나눈 후에 대출이야기가 나오고 상무가 회원가입신청서를 가지고 왔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난 사무장이 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양복호주머니의 지갑을 만지작거리면서 열찬씨를 쳐다보았다. 지난밤에 차비도 없이 털려 가입비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급한 대로 열찬씨가 대납을 하고 당일로 제법 큰돈인 백만 원을 빌렸다.
그런데 연말이 가까워오면서 사무장이 이젠 고스톱 판이 아니라 청년회원 몇과 해운대 극동호텔의 파친코 장에 다닌다는 소문이 돌면서 허모라는 직원도 하나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파출소장도 정년퇴직을 해서 먼 시골로 귀향해 만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지 두어 달이 지났을 때였다. 금방을 하는 허사장이라는 청년회원이 야반도주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튿날 전자대리점을 하는 채모 청년회원의 가게 앞에 빚쟁이들이 몰려들어 도망간 청년회원 대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파출소로 몰려갔다. 도망간 두 청년회원이 이웃의 돈을 빌려 파친코에 탕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인 동사무소에서도 초주검이 된 사람이 둘이나 생겼다. 바로 사무장 김현택씨와 전자대리점주인의 동향인인 김주사란 사람이 전자대리점 채사장에게 대출보증을 해주었는데 각각 자신의 집들을 담보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 중 김주사는 담보물이 조그만 연립주택이어서 큰돈은 아니었지만 김현택사무장은 결혼할 당시 부곡동의 제법 부자인 토박이영감이 구청에서도 촉망받는 7급 공채 엘리트에게 딸을 여의는 게 좋아서 자기 땅에 지은 2층 양옥집을 하나 물려준 바로 그 건물이 넘어가게 생긴 것이었다.
당연히 온 동네와 구청에 소문이 나고 소문을 들은 그의 아내가 연산1동 연동시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미 죽을상이 되어 숨도 크게 못 쉬는 모습이 딱해서 어느 토요일오후 열찬씨가 김현택사무장과 김주사 내외를 온천장에서 만덕으로 넘어가는 터널입구 차밭골의 오리백숙집으로 초청해 위로하기로 했는데 꼬창꼬창한 김주사는 오지 않고 김현택 사무장의 아내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네 살짜리 딸아이의 한 쪽 눈이 초점이 잡히지 않는 사시(斜視)였다.
옥에도 티가 있다고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전도유망하고 당당한 사무장이 이렇게 많은 애로사항이 다 있는구나 싶어 순간 열찬씨는 별 욕심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다행스럽고 아내 영순씨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여간 사무장마저 형편이 그 모양이니 구청간부를 소개시켜 구청전입이나 승진을 부탁할 형편이 되지 못 했고 더더욱 돈을 맡길 수는 없는 판이었다.
그렇게 무심히 세월이 흘러가던 어느 일요일 국민학교운동장에서 조기축구를 마치고 오뎅국물을 안주로 막걸리에 사이다를 탄 막사이를 즐길 때였다. 열찬씨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회원 하나가
“열찬씨, 누가 딱 한 가지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이 제일 급한가?”
하고 빙긋 웃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열찬씨가
“지금은 6급 주사로 승진해서 동사무소사무장이 되는 것이 소원이지요. 그렇지만 동래구에서는 인사적체가 심해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르는 하늘에 별 따기이지요. 몰라 혹시 구청장이나 시장 빽이 있으면 몰라도...”
말끝을 흐리는데
“그러면 내가 승진을 시켜줄까?”
또 빙긋 웃는 형뻘을 보고
“에이 형님, 싱겁기는...”
하고 눈을 흘기자
“이 사람아 잠자코 귓밥이나 만져봐. 혹시 아나 어느 날 갑자기 동사무소사무장이 될랑가? 혹시 되더라도 그건 니 재수지 내 덕은 절대로 아이다 알았제?”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또 빙긋 웃었다.
그런데 묘한 조짐이 시작되었다. 별 어려움이 없이 귀히 자란데다 늘 주변의 부러움을 산 7급 공채출신이란 자부심으로 밤새워 술을 마셔도 당당하고 1박2일 노름판을 벌여도 당당하던 사람,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으로 순수하다고 할 정도로 순진하여 세상의 어려움이나 돈 귀한 줄도 모르고 구청 출신의 매끈하고 눈치 빠른 직원들과 신 개발지 과정로와 연동시장에서 조그만 가게를 열고 사장님 행세를 하기 시작한 청년회원들에 둘러싸여 골목대장처럼 군림하던 김현택 사무장이 빠찡고와 대출보증으로 무너진 소식이 구청장의 레이더에 잡혔는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동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부임하는 김세현 사무장은 열찬씨가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치거나 이름조차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