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12)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3장 승진과 애기동장②
대하소설 「신불산」(312)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3장 승진과 애기동장②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1.21 06:50
  • 업데이트 2022.11.21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 승징과 애기동장②

순간 회의실 가득 박수소리가 터지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열찬씨가 다시 앉고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정자문위원장 안만종입니다.

방금 사무장님이 소개했다시피 오늘 우리 남부민1동은 전국 최초로 행정사무관 동장이 취임하는 영광을 맞이했습니다. 아까 약력소개처럼 발군의 행정력과 오랜 경륜을 가지면서도 아직 창창한 젊은 나이의 가열찬동장님의 부임을 동민 여러분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하며 저는 오늘 취임식이 가열찬동장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면서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먼저 오늘 취임식의 의미는 아까 약력소개처럼 1969년에 공무원으로 투신한 가열찬동장님께서 면사무소와 동사무소의 9급에서 8급, 7급의 계급을 거쳐 동사무소 사무장이 되고 구청의 계장을 거쳐 마침내 1개동의 우두머리 동장이 되었다는 한 동직원의 성공신화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 동장님이 한 사람의 사무관으로 승진했다는 것은 말하자면 옛날 왕조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것과 같이 일신과 가문에 커다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양반상놈이 없어진 요즘도 공무원은 적어도 사무관이상의 지위에 올라야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리고 죽어 무덤의 비문에 그 벼슬을 올리며 비석의 머리에 벼슬을 상징하는 관(冠), 즉 모자를 씌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내가 사무관이 되는 것은 조상대대의 적선과 공덕은 물론 다만 뒷산의 여우라도 돌봐야 되는 것이라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두 가지의 엄청남 영광을 차지한 가열찬동장님께 축하의 박수를 보냅시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열찬씨의 취임사순서였다. 단상에 올라 공손히 인사를 하고 모두들 박수를 치는데 누가 휘파람을 휘익 불어 쳐다보니 뜻밖에도 같은 날짜로 아미2동장으로 발령받은 박주영 동장이었다.

새로 나온 자리가 둘 뿐이라 다섯 명의 합격자 중에 가장 진취성 있는 둘을 선발, 물러나는 별정직 동장을 비롯하여 토박이 유지들의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선에 먼저 발령을 낸 것이었다.

구청간부와 동료들의 축하를 위해 1시간의 시차를 두고 취임식일정을 잡았는데 코앞에 자기의 취임식을 앞둔 박주영동장이 간도 크게 열찬씨의 취임식에 참석한 것이었다.

“존경하는 안만종 동정자문위원장님과 동민여러분, 오늘 새로 동장으로 부임한 언양촌놈 가열찬이 인사를 드립니다.”

꾸뻑 절을 하고 고개를 드는데 바쁘게 회의실을 나가는 박주영 동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러분, 제가 1970년 부산으로 진출한 것은 바로 서구지역에 자리 잡은 동아대학 야간부를 다니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이라 초량동 산복도로에 방을 얻고 날마다 민주공원을 넘어 등교를 하면서 옹기종기 어선들이 떠 있는 남항과 천마산을 자주 바라보았고 1988 서구로 발령 날 때 시청에서 천마산을 바라보니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서구의 남부민동, 전국 최대의 수산물유통시장인 부산공동어시장이 있고 씩씩한 마도로스와 부지런한 상인들이 다정하게 살아가는 이 소박한 마을에 제가 동장으로 발령받게 된 것은 아까 안만종동정자문위원장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저 자신을 넘어 과히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것입니다.

동민여러분, 저는 25년 공직생활 중 20년 이상을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원. 통반장과 청년회원, 바르게살기위원님들과도 많이 접하고 동사무소의 모든 일을 다 맡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와 푸른 산, 부지런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이 남부민1동에 발령받게 된 것은 그간 신불산촌놈 제가 꿈꾸어오던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쳐나가기에 가장 좋은 여건으로 참으로 행복한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저는 전국최초의 행정사무관동장인만큼 지금까지 타성에 젖은 행정의 틀을 깨고 보다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들을 펼치며 대민봉사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민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취임식이 끝났다. 저도 답례삼아 박주영 동장의 취임식을 축하하러 아미2동으로 출발하려고 통로를 나오며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는 사이에 직원들이 올라와 간단한 다과회를 준비한다고 법석을 떨었다.

열찬씨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동장 실에 들어가 비로소 <남부민1동장 가열찬>이 쓰여 지고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화려한 자개 명패가 놓인 커다란 책상에 앉았다.

이어 응접세트에 동정자문위원장, 방위협의위원장, 바르게살기위원장, 새마을지도자협의회장, 부녀회장, 청년회장과 통장연합회회장이 배석해 커피와 한담을 나누고 다과회장이 마련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2층 회의실에서 건배를 하고 환담을 나누고 나서 다시 주요 인사들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 이튿날이었다.

젊은 직원 하나를 앞세워 관내도를 들고 25개통을 돌며 통장댁을 익히고 동정자문위원장을 비롯한 마을유지들을 방문해 인사를 하고 파출소와 초등학교도 들렀다.

11시 반쯤 되어 사무실로 돌아와 2층 회의실에 칸막이를 쳐서 마련한 동장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자욱하게 담배연기가 깔린 응접세트에 다섯 명의 마을유지들이 잡담을 하고 앉아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응접세트의 중심 동장자리에 버티고 앉아

“아, 동장님 왔어요?”

하고는 다시 잡담에 빠졌다. 하는 수 없이 열찬씨는 응접세트가 아닌 책상에 딸린 의자에 앉았지만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세상에 공직자, 그것도 일선 지휘관인 동장의 자리에 함부로 앉다니!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무례함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동행했던 직원이 열찬씨의 불편한 심기를 알고 눈을 찡끗했다.

“동장도 오고했으니 밥이나 먹으러가지.”

동장석에 앉았던 서수양이라는 건축업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니 우르르 따라 일어났다. 식당에 자리를 잡자 열찬씨의 전임동장 정정대란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새마을지도자를 하다가 별정직동장으로 발탁된 그는 동정자문위원장 안만종, 부위원장 서수양씨를 비롯한 마을유지들과 격의 없는 친구여서 허물없이 지내다보니 동장실을 제집마냥 드나들며 너나 돌이를 하고 동장자리에 앉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한갓 새마을지도자인 동네의 술친구가 동장이 되었으니 자신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동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 거리낌도 없었고 동장실은 그저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너나 돌이 강경대동장이 중풍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 하자 마침내 구청에서 사퇴를 종용해 동장 직에서 물러났는데 하필이면 그 후임이 이제 마흔넷의 젊은 동장 열찬씨였다.

그것도 최초의 행정사무관동장이 왔으니 어떻게 얼마나 잘 하는 지도 궁금했지만 우선은 그들 몇이 좌지우지하던 골목대장노릇을 방해받지 않을 지가 걱정이 되어 일부러 한번 골려보는 것이라고 그 날 오후에 박철수 사무장과 사회복지요원 홍태희 여사가 말했다.

홍태희 여사 역시 마을의 토박이로 부녀회활동을 하다 동사무소의 임시직으로, 다시 임시직에서 사회복지사로 임용된 특채출신이었다.

 

그렇게 마을이 돌아가는 실정을 알게 된 열찬씨는 기가 찼다. 하다못해 주먹조직에 오야붕이 있듯이 어느 지역이나 사회에도 그 바닥을 좌지우지하는 몇몇의 패거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좁은 산골이나 외딴 섬이나 돌아앉은 포구인 경우에는 좋게 말해서 능력자, 나쁘게 말해서 무뢰배가 함부로 마을을 들었다 놓았다 전횡을 부리는 토색(討索)질을 일삼기 마련이었다.

남항에 붙은 부산공동어시장, 새벽시장과 청과시장을 중심으로 송도아랫길로 불리는 매립지에는 냉동창고와 수산가공시설이 즐비하고 냉동어판매상과 선식, 선구등 선박관련 가게, 마도로스와 어시장사람들을 위한 다방과 술집과 식당, 항구의 새벽을 깨우는 새벽시장과 청과시장의 억척같은 장사꾼들과 등이 굽은 노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또 송도윗길이라 불리는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에는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적산과옥들과 남부민초등학교를 에워싼 주택가가 있고 그 위쪽의 가파를 계단 길을 헐떡거리며 올라가거나 버스로 아미동이나 송도를 돌아 올라가는 산복도로주변의 달동네에는 주로 부두의 막 노동자나 은퇴한 선원, 새벽시장의 노점상들이 어깨를 비비듯 좁은 판잣집들에 기대고 살았다.

몇 년 전 청과시장이 엄궁동의 농산물도매센터로 옮겨가기 전까지만 해도 공동어시장과 새벽시장, 청과시장의 상인과 손님들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는 남부민1동에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이 끓고 경기가 좋았다고 했다.

비록 새벽시장이 옮겨간 뒤로 다소 주춤하기는 해도 누구나 일할 의욕만 있으면 고대구리라고 불리는 저인망어선의 선원이나 하루 종일 장화를 신고 하얀 가운을 입고 명태의 배를 가르거나 참치를 자르는 수산가공공장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고 하다 못해 새벽시장 입구에서 길거리커피를 팔아도 월급쟁이 하나의 벌이는 충분히 된다고 했다.

거기다 그런 다소 거칠고 단순한 선원이나 난전꾼들을 위한 다방에다 마담과 아가씨가 한 둘 있는 단칸짜리 술집과 함바집처럼 허술한 식당이 즐비하고 그런 영세업자들을 상대로 일수를 찍는 사채업자들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부임 이튿날 첫 관내순찰의 안내를 맡은 정광식이란 직원의 메마른 체형과 어딘가 외롭고 쓸쓸한 우수에 잠긴 눈빛이 마치 자신의 꿈은 크고 현실은 비참하여 날마다 술에 젖어 살던 젊은 날 자신의 모습과 닮았다며 취임첫날 <젊은 날의 초상>으로 별명을 지어주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