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75) 나무는 잎을 떨쳐야 겨울을 난다.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75) 나무는 잎을 떨쳐야 겨울을 난다.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11.23 11:25
  • 업데이트 2022.11.2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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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픽사베이]
겨울나무 [픽사베이]

「1989년쯤 미국 버클리대학의 중국학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 나는 같은 대학의 물리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막 졸업한 분을 알게 되어, 두 가족이 함께 옐로스톤국립공원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엔 아이들도 좋아서 좁은 차 안에서 잘 놀더니, 열 시간 이상 갇혀 있으니 슬슬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목적지인 공원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싸움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 싸움의 발단이 매우 철학적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우리 아이가 국립공원 초입부터 늘어서 있는 기암절벽에 감탄한 나머지, 저 바위는 곰이고 저 바위는 선녀라는 둥 외쳤다. 그러다가는 급기야 어디서 들었음직한 선녀바위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급조했는지 아니면 패러디했는지 계속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어른들이 그 이야기에 재미있어 하니까, 동급생이던 물리학자의 아들이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야, 이 바보야. 저 바위들은 땅속의 마그마가 터져서 굳은 거야. 저게 무슨 선녀냐? 세상에 선녀가 어디 있냐? 곰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말할 수 있냐? 그런 건 다 거짓말이야. 이 멍청아!”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논리적인 비판이었다. 정말 물리학자의 아들다웠고, 아버지의 사고나 직업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입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과학적 담론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우리 아이는 결국 ‘멍청이’라는 명예훼손을 빌미로 폭력을 행사했고, 마침내 물리적 충돌로 확전된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나는 곧바로 차를 세우고, 두 아이가 알아듣도록 설명을 했다.

“얘들아, 사람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잖니? 하나는 세상을 시적으로 바라보는 눈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눈이란다. 그래서 세상에는 전설도 있고, 과학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 두 가지 눈으로 봐야 정확히 볼 수 있단다. 그러니까 너희 두 사람 말이 다 옳아요.”」 -김근/漢詩의 비밀-

‘절실함’은 종종 눈에 뵈는 게 없게 만든다.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시야는 더욱 좁아지고, 전혀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된다. 홈쇼핑에 관심한 적이 없다. 의도치 않게 인터넷 검색 중에 ‘체인톱’ 광고를 보게 됐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 문턱에 섰다. 날씨는 햇살인데, 머릿속에는 북풍한설 이미지가 떠올라, 몸이 오싹해진다. 서재를 덥힐 땔감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톱질에는 힘이 많이 든다. 잔가지는 불땀이 약하다. 군불 나무는 굵기가 중요하다. 장작을 팰 수 있을 만큼 굵어야 한다. 그 정도 굵기의 나무를 베는 톱질에는 참 힘이 많이 든다. 한데 광고 영상에는, 이 체인톱은 김장용 통배추 굵기의 나무도 무처럼 자른다. 가격도 10만 원 안짝이다. 바로 내질렀다. 10일 후에 제품이 왔다. 조립하여 시험해봤다. 무 굵기의 나무도 벨 수가 없다. 기계 문맹이다 보니 조립을 잘못했나? 창고에 보관 중이다.

“오늘 마시는 차가 마지막입니다. 인연이 다 된 것 같네요.” 몇 년 전 어느 날, 몇 년간 종종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하던 미인은 절교를 선언했다. 많이 씁쓸했고 좀은 분노했다. 인연은 상대가 있는 건데, 상대와는 의논치 않고 인연이 다했다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구먼!

몇 년 뒤 지금, 돌아보면 그가 고맙다. 자기 방식의 세상해석을 나는 인정했다. 동감여부를 떠나 그의 세계관을 존중한 것이다. 그때는 찻잔에 미소를 담아 즐겼다. 미소를 위해 세계관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관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남이 익숙해질 무렵, 자연스레 내 세계관을 찻잔에 담았다. 그러자 평소 찻물과 함께 있던 미소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다름이 틀림은 아니다. 그러나 먼 길 가는 데에 다름의 길벗은 곤란하다. 치수가 맞지 않는 다름과 동행하기보다는, 허위허위 홀로 걷는 게 나그네의 무게 같은 것! 태생적 다름인데, 다름을 같음으로 포섭하려는 의지, 그건 곧 틀림이다. 하여 그가 먼저 ‘자아개방’하여 다름을 선언해줌이 어찌 고마움 아니랴.

오랜 지기에게 침묵으로 교류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도 훗날 고마워할까? 그 친구와 열흘 정도 한 사업을 도모했다. 결실 분배 때, 그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세상 삶의 길잡이는 경제논리’란 그의 지론을 아주 느지막이 이제야 깨닫게 됐다. 친구의 길잡이를 존중한다. 그러나 내 길잡이는 아니다. 길잡이가 다르면 각자는 다른 길로 가게 되어있다. 좋음도 궂음도 아니다. 각자 제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다. 굳이 만날 일이, 협업할 일은 없는 것이다. 휴대폰의 전화번호와 카톡에서 그를 지웠다. 푸르던 잎이 낙엽으로 뒹군다. 마음나무는 한결 가뿐하다.

옐로스톤국립공원에서 한 초등생은 선녀를 보았고, 다른 초등생은 굳은 마그마를 보았다. 한 세대 위 초등생의 아버지는 시적인 시선으로 선녀를 보고, 과학적 시선으로 굳은 마그마도 본다. 이 아버지의 한 세대 위의 시선은 어떠할까?

선녀를 보든 마그마를 보든 둘 다를 보든, 모두 맞을 수도 있고 모두 틀릴 수도 있다. 시적인 시선과 과학적 시선에다 종교적 시선, 역사적 시선 등을 보태도 세상 전체를 볼 수는 없다. 또 세상 전체를 볼 필요도 없다. 바닷물이 짜다는 사실은 한 모금 바닷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여 자신의 한 시선에 겸허히 침잠하고, 굳이 다른 시선과 다퉈 그 우월함을 탐하지 않는다면, 세상 전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시선일 것이다.

조송원
조송원

각자 생긴 대로의, 본래면목대로의 시선을 누구나 갖고 있다. 높낮이는 없다. 각자 생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압박으로, 관계로, 인연으로, 구실로, 핑계로 자신의 시선은 감추고, ‘나 아닌 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한 육신 편히 하려는 데 빌딩이 필요한 건 아니다. 열 평 남짓 공간이면 족하다. 한 마음 편히 가지는 데 백 가지 이론, 백 가지 시선이 필요한 게 아니다. 본디 타고난 시선 하나면 족하다. 다른 시선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면 그냥 들어줄 일이다. 아무리 들어주어도 자신의 시선, 잃는 것은 아니잖은가.

겨울나무는 푸르던 잎 낙엽으로 떨치고 가지가 앙상해야 살아남는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