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76) 가난과 양주학(楊洲鶴)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76) 가난과 양주학(楊洲鶴)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11.26 08:40
  • 업데이트 2022.11.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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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조송원]

「“진채(陣蔡)의 땅에서 곤액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망령되이 누추한 골목에서 무슨 일로 즐거워하느냐고 묻던 일에 견주어본다네.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줌이 어떠하실까?”

박제가에게 보낸 박지원의 짧은 편지다. 언뜻 보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예전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진채 땅에서 7일 동안 밥을 지어 먹지 못하고 고생한 일이 있다. 그러니 진채 땅의 곤액이란 자기가 벌써 여러 날을 굶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안회(顔回)처럼 가난한 삶을 즐기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벼슬하지 않아 무릎 굽힐 일 없음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보니,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어 돈 좀 꿔달란 소리다. 궁한 소리 꺼낸 김에 염치도 없이 빈 술병까지 딸려 보냈다. 이왕이면 술까지 가득 담아 보내 달란 뜻이다. 그런데 막상 돈 꿔달라는 편지에 돈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위 편지를 받고 박제가가 보낸 답장은 이렇다.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 됨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방(孔方) 2백을 편지 전하는 하인 편에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의 양주(楊洲)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그 역시 돈이라고 말하지 않고 공방(孔方)이라고 했다. 공방은 구멍(孔)이 네모나다(方)는 뜻이다. 동전 속에 네모난 구멍이 있기에 이렇게 말했다. 직접 먹을 것을 싸들고 가서 뵈어야 하는데, 그저 동전 2백 냥을 인편에 부쳐 미안하다고 했다. 호리병 속의 일이 없다 한 것은 술을 못 부친다는 말이다.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여러 날 빈속에 술을 마셔 좋을 것이 없겠기에 한 말이다. 

끝에 붙인 양주학(楊洲鶴)은 고사가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양주자사(楊洲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자도 있었다. 학을 타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다고도 했다. 맨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나는 말일세. 허리에 10만 관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로 가서 자사가 되고 싶네.”

그러니까 양주학이란 말은 이것저것 좋은 것을 한꺼번에 다 누린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양주학이 없다고 한 것은 밥과 술을 다는 못 보내니 그리 알라는 이야기다.

꿔달라는 사람이나 꿔주는 사람이나 피차 구김살이 없다.」 -정민/미쳐야 미친다-

「스피노자(1632~1677)는 처음에는 반 덴 엔데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나중에는 다루기 어려운 재료를 다루는 것이 취미였던 것처럼 렌즈 갈기(磨)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유대인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동안 광학용구직을 배웠는데, 그것은 학자라면 누구나 어떤 재주나 기술을 익혀 두어야 한다는 헤브라이의 율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면학과 충실한 교수만으로는 좀처럼 생계를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가마리엘(바울의 스승인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이 말했듯, 노동은 사람을 유덕하게 한다. 그러므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자는 결국 부랑인이 되고 만다’는 이유에서다.

(중략)1677년 최후의 때는 왔다. 스피노자는 겨우 이제 마흔 네 살이 되었으나 친구들은 이미 그의 여명이 몇 해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폐병적인 기질을 다분히 갖고 있었으며, 더구나 스피노자의 경우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과, 먼지투성이인 방 안에서의 노동은 이 유전적인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2월 20일 일요일, 집안사람들은 스피노자의 병세가 보통 때보다 나쁘지 않다는 자신 있는 말을 듣고 교회로 나갔다. 집에는 의사 메이어만이 혼자 스피노자 옆에 붙어 있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철학자는 이 친구의 팔에 안겨 죽어 있었다.」 -윌 듀랜트(임헌영)/철학 이야기-

가난에는 종류가 없는 것일까? 있는 것도 같다. 돈, 시간, 건강, 업보. 우리는 돈이 없으면 혹은 부족하면, 가난하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부족하거나 건강이 나빠도 돈이 없는 것만큼이나 불행해지는데, 왜 가난하다고 하지 않을까? 나아가 지나온 삶의 궤적에 찍어둔 잘못들, 업보 또한 돈 없는 가난만큼 불행의 화근이지 않을까?

‘가난’이라고 하면 자본주의적 냄새가 묽어 조금은 낭만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하여 젊을 적 한때는 ‘가난은 불편할 뿐’이라는 정감어린 말들도 해 쌌다. 반면 가난에 비해 ‘빈곤’이라고 하면 자본주의 냄새가 짙어진다. 낭만적 느낌은 없어지고, 저주스런 고통만이 부각된다. 

빈곤은 둘로 나눌 수 있다. 빈(貧)은 가난이고, 곤(困)은 괴로움이다. 빈은 최저문화생활만 영위할 정도의 자산을 가진 경우다. 곤은 그것까지 없는 찰가난(赤貧적빈)을 말한다. 곤까지 이르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 괴로워한다면, 그 역시 빈곤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이 결코 괴로운 사람은 아니다.

孔子曰(공자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生而知之者上也(생이지지자상야) 태어나면서 아는 자는 상上이요
學而知之者次也(학이지지자차야) 배워서 아는 자는 다음이요
困而學之 又其次也(곤이학지 우기차야) 막히면 그때서야 배우는 자는 그다음이요
困而不學(곤이불학) 막혀 있으면서도 배우지 못한 자는
民斯爲下矣(민사하의)민民으로 하下가 된다 -논어/계씨9-

젊었을 적 이 구절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때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돈제일주의’(자본주의)에 세뇌되고 사회화한 것일까? “상속부자가 으뜸이요, 자수성가로 부를 이룬 사람이 다음이요, 생활에 쫓겨 근근이 가계를 꾸리는 서민이 그 다음이요, 생활에 쪼들려도 벌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하치라.” 이렇게도 해석한다.

이 글 앞 편에서 ‘체인톱’ 이야기를 했다. 지인이 복숭아밭을 관리하는 데 필요할 것 같다면서 거의 원가로 주고 사갔다. 점심까지 사주면서. 내심 소용에 닿지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한 일로 그는 기계톱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헤어지고 얼마 후 전화가 왔다. 작동이 잘 된단다. 내가 체인을 거꾸로 끼워서 작동이 시원찮았다고 했다. 이 나이 되도록 작은 동작기계 하나 제대로 조립도 할 수 없다니……. 자신이 좀 한심스러워진다.

그러나 어쩌랴. 생긴 대로 살 밖에, 무슨 수가 있는가. 스피노자의 행복관도 어쩜 나와 같은지도 모른다. 어차피 양주학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모든 행복과 불행은 오로지 우리가 애착을 갖고 추구하는 대상의 가치에 달려 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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