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산토끼, 토끼야!⑤
두 구청장후보가 나타날지 모르고 선거후에 무슨 말썽이 날지도 모르니 대회장을 부구청장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참 생각하던 열찬씨가 호주머니에서 대회사를 꺼내 부구청장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박철수사무장이 하려던 경과보고를 맡기로 했다.
개회선언, 국민의례, 경과보고, 대회사, 축사가 이어지고 둥그렇게 그물을 친 5,000평 정도의 경사진 숲이 입구에 부구청장, 동장인 열찬씨를 비롯한 기관단체장과 새마을지도자, 부녀회, 청년회의 마을일꾼과 협찬기관인 대원사주지스님까지 산토끼 한 마리씩을 잡고 비잉 둘러섰다.
학년별로 10명씩 뽑아온 초등학생들은 장소가 좁아 두 명씩만 토끼를 안고 방사(放飼)를 준비를 했다.
남해의 외딴섬에 토끼장도 철망도 없이 자연 상태에서 토굴을 파고 살던 야생토끼들이라 하얀 앙고라, 회색의 친칠라, 또 무슨 품종인지도 모를 얼룩덜룩한 잡종토끼도 하나 같이 쫑긋한 귀와 크고 맑은 눈동자가 귀여웠다. 마치 산토끼처럼 커다랗고 선한 눈망울의 담당직원 안선화양를 불러 빨리 토끼를 한 마리 안고 열찬씨의 옆으로 오라고 했다.
이어 남은 학생들과 참석자들의 산토끼노래에 맞추어 일제히 산토끼를 방사하고 손뼉을 치는데
“이 동장, 고생합니다.”
헐레벌떡 김형호 구청장이 나타났다. 산 밑에서 기다리다 공식행사가 끝나자말자 후다닥 올라온 모양이었다. 열찬씨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며
“수고 많네.”
짧게 인사를 건네고 참석자들을 돌며 악수를 청하는데 유독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와 통반장들에겐 오래 손을 잡고 무어라고 속삭였다. 서수양씨일행과 청년회원들은 슬그머니 외면하다 마지못해 건성으로 악수를 나누고 도회수씨는 저승에서 부모라도 만난 듯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잡더니 이내 포옹을 하기도 했다.
이어 참석자들은 대원사로 옮겨 간단한 절밥으로 점심을 때웠는데 부녀회원들이 커피를 나누는 사이 새마을지도자와 통반장들은 몰래 소주를 마셨는지 모두들 얼굴이 번질번질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면서 열찬씨는 변모구청장후보가 혹시 나타날까 조마조마 긴장했다. 기왕이면 둘 다 왔다 가면 나중에 말썽이 없으련만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꺼림칙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튿날부터 며칠간 새마을담당여직원이 결재올린 경향각지의 신문에 난 산토끼방사기사의 스크랩을 보면서 또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부러움이 섞인 문의전화를 받으며 오후 느지막이 방사장에 들러 산토끼의 깡총걸음을 보고난 흐뭇한 기분으로 부둣가의 곰장어와 낙지볶음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참으로 느긋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방사 나흘째가 되는 날, 출근길의 동장에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13통의 새마을지도자, 그러니까 아침저녁 산토끼를 돌보기로 한 오석희씨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산토끼를 도둑맞았다는 것이었고 동장과 직원들은 한 걸음에 방사장으로 향했다. 절단된 그물을 밟고 토끼들의 잠자리인 검정 F. R. P관 앞으로 가니 입구에 벌건 산토끼의 피가 흙과 풀에 흥건했다. 누군가 한밤중에 손전등으로 굴속을 비추고 막대기를 휘저어 놀라 튀어나오는 산토끼를 몽둥이로 박살내어 자루에 담아갔을 것이라고 했다. 서너 마리 간신히 도망쳐 살아남은 토끼들도 얼이 빠졌는지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열찬씨가 멍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자 박상택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과 지도자, 부녀회원과 동사무소지도자들도. 하늘이 내려앉고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한숨만 푹푹 쉬었고 마음여린 여직원이 선화씨는 울타리 그물을 잡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토끼도가니탕을 하거나 한약건재를 취급하는 자의 소행일 것이라고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열찬씨와 일행은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다시 동사무소에 왔을 때, 사무실이 온통 술렁거리고 있었고 걱정이 되어 찾아온 새마을금고이사장이 걱정스런 얼굴로 동장을 위로했고 심순옥교장선생님은 토끼방사행사장에 갔던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 와중에 신문사, 방송국에서 문의전화는 왜 오는지...
처음부터 반대하고 지청구를 늘어놓던 토박이 패들이 그것보라고 쾌재를 부르며 동장은 이제 잘려나가거나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고 소문을 낸다고 했다.
그러나 열찬씨는 소문보다도 말없는 동민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모두가 자신만 쳐다보는 듯 모두들 자신의 뒤 꼭지에 대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그날 새마을지도자, 부녀회, 통장연합회의 핵심 7, 8명과 함께 부둣가에서 울분에 찬 소주잔을 비우고 몇몇은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뿌렸다. 그리고는 또 모진 결심을 했다.
다시 토끼를 채우기로 하고 우선 숫자를 불리기 위해 구포장에 가서 생닭과 오리와 토끼를 잡아서 팔거나 끓여주는 집에서 방금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국솥에 들어가지 직전의 토끼 여남은 마리를 구출해 방사했다. 집토끼였지만 당시는 산토끼, 집토끼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났을까. 산토끼가 새끼를 낳았다는 참으로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얼른 달려가 보니 정말 계란만큼, 아니 다람쥐만큼 작고 앙증맞은 토끼새끼 세 마리가 제 어미를 좆아 깡총거리며 풀밭을 달려가는 것이었다. 열찬씨와 선화씨, 새마을지도자 오석희씨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당분간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기대대로라면 이제 산토끼가 50마리, 100마리가 되었을 것이라는 시점에 열찬씨와 선화씨는 또다시 기막힌 소식을 접해야 했다. 한 때 등산길에서 예사로 산토끼가 목격된다는 낭보가 들렸지만 그 후 도무지 토끼가 더 불어나지 않아 원인을 알아보니 등산객을 따라온 개들이 갑자기 그물을 뛰어넘어 토끼를 물어 죽이는 일이 빈발, 아예 반려동물의 출입을 금지시켰는데도 신통치 않아 사육장을 구석구석 살펴보니 이번에는 들 고양이가 문제였다.
민가에서 도망 나와 숲속에 자리 잡고 밤마다 산동네에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지고 불길한 울음을 우는 그 들 고양이들이 당시 천마산의 먹이사슬을 지배했는데 명색 고양이 과의 대표라고, 사자와 호랑이의 친척인 이 작고 모진 짐승은 어미건 새끼건 눈에 띄는 데로 물어 죽인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배가 불러서 먹지도 않으면서 기어이 토끼를 죽여 내장을 뽑아버린다고 했다. 참으로 기가 찬 일이었다.
결국 산토끼사업은 이슬처럼 투명하고 귀여운, 그러나 몹시도 가녀린 아기산토끼 몇 마리의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총체적인 실패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애기동장으로 불리는 한 무명시인의 꿈은 끝내 몽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웃었지만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산토끼방사사업의 흥망과 우여곡절이 난무하는 와중에 마침내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남부민1동의 네 개 투표소 투표함을 직원들과 함께 경남중학교강당의 개표소로 인계하고 돌아온 열찬씨는 동사무소앞 개미집에서 직원들과 낙지볶음으로 저녁을 먹고 동장실에서 텔레비전 개표방송을 듣기로 했지만 몇 달 간의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금방 눈꺼풀이 천근만근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잠에 빠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로 구청장선거의 개표결과에 따라 그의 입지는 천당과 지옥을 오고갈 것이었다. 그는 다시 눈꺼풀을 비비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정이 지나 비로소 구청장 개표가 시작된 모양으로 현장의 박철수사무장으로 부터 중간집계가 전화로 들어오는데 처음 개표되는 동대신1동부터 근소한 표자로 여당공천 변모후보가 앞서기 시작하더니 표차가 점점 커져 대체로 47:53정도의 비율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변모구청장의 집이 있는 표밭지대 대신동을 벗어나면 상황이 변해 조금 나아지거나 역전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충무동의 한두 곳을 제외하고 인구가 많은 아미2동을 비롯한 초장동, 부민동, 토성동 역시 여당의 우세로 표차는 점점 늘어났다.
마침내 열찬씨의 남부민1동. 새벽시장이 있는 제1투표구에서 김형호후보가 이겼지만 나머지 네 곳은 석패, 역시 여당의 승리였다. 부산이라는 꽤나 단순하면서도 시끄럽고 그러면서 의리를 넘어 고집에 가까운 성향이 무소속후보가 서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토양인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인구가 제일 많은 암남동, 그래서 김형호후보가 집까지 옮긴 텃밭에서 기적적인 역전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믿어보았지만 역시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화면에서 당선이 확정된 변모당선자의 인터뷰를 보다 눈앞이 아찔해진 열찬씨는 일단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내일부터 밀어닥칠 온갖 난관과 수모와 비아냥거림, 왕자의 난에서 실패자의 줄에서면 모조리 참살당하거나 유배당하듯이 혹독한 책임추궁과 괄시가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택시가 서면을 지나 양정로타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줄곧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비비안 리의 대사 <내일 생각하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집에 당도하면 독한 소주라도 유리클라스로 한잔 들이켜고 잠에라도 빠질 생각이었다.
“여보, 우짜겠노?”
아내 영순씨도 개표방송을 본 모양으로 현관을 들어서는 열찬씨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짜기는? 당하는 데로 살지. 설마 사람이나 죽이겠나?”
무심한 척 받는 열찬씨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영순씨의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세수를 하고 속옷차림으로 냉장고의 소주병을 꺼내는데 따르릉 전화가 울리더니
“여보, 도회수씨랍니다.”
영순씨가 수화기를 건네는데
“동장님, 고맙습니다. 모두가 우리 이 동장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흥분한 목소리로 도회수씨가 따발총처럼 쏘아대는데 아마도 당선이 된 모양이었다.
“아이구 축하합니다.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예, 모두 동장님 덕분이지요. 감사합니다. 내일 뵙지요.”
믿었던 김형호씨는 떨어지고 열세라던 도회수씨가 당선된 것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