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324)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④
대하소설 「신불산」(324) 제4부 신불산 정기 - 제15장 꿈꾸는 율도국④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2.12.04 07:00
  • 업데이트 2022.12.03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 꿈꾸는 율도국④

다음 열찬씨의 이야기를 듣는데 평범하고 무던한 영순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착하고 순한 남매를 낳아 키우고 오랫동안 동사무소에 다니다 승진도 하고 서구청 감사실에서 한참 욱일승천의 기세로 도약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하마터면 다리를 자를 뻔 했다는 이야기, 일 년 넘게 병원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에 순영씨는 아이고, 를 연발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둘이 저간의 이야기를 대강 마치고 이제 둘이 비록 부부가 되지는 못 했지만 마음속의 연인과 친구사이 쯤으로 잘 지내자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열찬씨가 노래를 하는데 이번에도 나훈아의 <18세 순이>였다.

  복사꽃이 핀다면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돌아올 줄 모르고
  서쪽 하늘 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에
  떨어진 꽃냄새가 나를 울리네.
  가야 해 가야 해 나는 가야해
  순이 찾아 가야해
  가야 해 가야 해 나는 가야해
  순이 찾아 가야해
  누가 이런 사람을 모르시나요?
  나이는 십팔 세 이름은 순이.

 아아, 순이, 순아, 그리고 순이야!

사춘기시절 끝없이 긴 연애편지를 수없이도 보내던 시절 날이면 날마다 외치던 순영씨, 어느 날은 페이지 마다 나순영을 가득히 쓴 대학노트를 통째로 보내다 마침내는 순이, 순아, 순이야로 부르던 그 애달픈 단어! 열찬씨의 젊은 열정이 가득하다 못해 불꽃처럼 피어오르거나 연기처럼 스멀대던 그 순이, 순아, 순이야가 가득한 시집 <끈질길 사랑의 노래>를 뒤적거리며 역시 빼곡하게 활자로 자리 잡은 순이, 순아, 순이야를 보던 순영씨도 가슴이 먹먹한 모양이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홉 시 반. 머뭇거리는 순영씨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열찬씨는 언제 한 번 순영씨가 먼저 연락을 해서 만나기로 하고 하나는 남산동, 하나는 연산동 남북으로 갈라져 택시를 탔다.

 

당시 서구청의 동료나 남부민1동의 주민과의 사이가 뭔가 어색해진 열찬씨는 자연스레 문단의 동료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주 무대가 중앙동이었다. 얼마 전 시청이 연산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가까운 동광동의 인쇄골목과 인접해 몇 군데의 전문출판사와 민속주점이 들어선 중앙동일대는 시청의 공무원과 그들을 접대하는 사람들은 물론 부산을 이끌어가는 수많은 문화예술계인사들이 드나들며 풍류가 가득한 별천지를 이루었는데 문인들이 주로 모이는 곳은 이상개시인이 운영하는 <빛남출판사>와 그의 부인 목경희여사가 문을 연 민속주점 <한길>이었다.

열찬씨가 문단에서 최초로 그저 근엄한 인상인 동장이라는 직책과 달리 젊은 40대의 시인으로 등단하자 단연 문인 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는데 출판기념회를 연다는 기사가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당시 부산일보 문화부 이광우기자가 그를 취재한 것을 인연으로 당시 부산문단의 촉망받는 젊은 시인 최영철, 김형술, 송유미시인들과 다리를 놓아주었고 그들과 만나기 위해 중앙동으로 드나들며 빛남출판사에서 박응석, 임명수, 임수생, 김석규 등 원로시인들과도 어울려 출판사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기원에 들러 바둑을 두기도 하고 저녁식사를 겸한 술판을 벌이기도 하며 <하체의 고향>이란 시집을 낸 떠돌이 노동자겸 노총각인 서규정시인과 또 하나의 떠돌이 젊은이 원무현시인과도 친해졌다.

 

며칠 뒤 순영씨로 부터 전화가 와서 금요일저녁에 둘이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잡은 곳이 중앙동의 입구인 부산우체국 앞이었다. 

이제 제법 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둘은 한길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동동주 한 되나 두부 전을 시켰지만 순영씨는 거의 먹지 않고 열찬씨의 이야기만 들으며 간간 미소를 머금었고 안쪽에 앉았던 임명수 시인이 일행이 자리를 옮기러 문을 나가면서 

“가열찬시인의 첫사랑이 너무 예뻐!”

일부러 들으라는 듯 탄성을 질렀다.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자던 순영씨가 꽤 고급으로 보이는 일식집으로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열찬씨에게는 소주를 권하고 자신은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는 해도 서로 만나지 않은지가 하도 오래 되어 자주 끊기고 둘은 잠자코 음식을 먹었고 벌컥거리면서 비운 소주잔에 순영씨가 조용히 잔을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자 둘은 말없이 지하철을 타러갔다. 전동차가 복잡해 얼굴을 마주보며 손잡이에 매달려 숨결이 느껴졌는데 그 옛날의 아련하고 황홀한 느낌보다는 뭔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어미가 되고 아비가 된 사이에 그저 오랜만에 만나 얼굴을 보고 밥을 먹을 뿐 더 이상은 할 말도 할 일도 없는 것이었다. 

전동차가 연산동에 이르자 종종 연락하자는 말을 남기고 열찬씨가 내렸다. 순영씨는 남산동에 내리면 될 것이었다. 차창 밖으로 가볍게 웃어주는 얼굴이 지상으로 올라오는 내내 아른거렸지만 눈을 질끈 감은 열찬씨는 곧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 아련한 첫사랑도 중년이 되자 그만 밍밍한 맹물이 되고 만 것이었다.

 

변모구청장을 정점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가열찬 동장의 압박은 이제 구청의 모든 실과와 직원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처럼 점점 숨 막히게 조여오고 있었다. 그래도 열찬씨 자신이 기관장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남부민1동에서는 대신 서수양구의원을 비롯한 토박이지역유지들이 차마 상대하기도 멋쩍은 치졸한 방법으로 열찬씨의 신경을 건드렸다. 

천마산 산토끼방사사업당시에 남부민1파출소의 소장은 열찬씨 비슷한 곤궁한 농촌출신으로 역시 어렵게 공부를 하고 경찰관이 되었지만 부산에 별다른 연고나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살면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마을에서의 서열이 빠르고 매사 의욕적인 동장을 존중하며 매사 공손했는데 구의원에서 낙마한 서수양씨가 자신의 오랜 친구인 이병진이란 새 파출소장을 스카우트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미 나이 예순이 가까워 한해후면 정년퇴직으로 경찰복을 벗어야하는 이병진소장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 뭉툭하면서도 끝이 꼬부라진 완강한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다. 서수양씨가 한 번씩 자랑삼아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유당말기 가을걷이를 하고 돌아서면 바로 양식이 떨어지는 농촌의 절량농가처럼 대부분의 산비탈 하꼬방을 향해 해질녘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새끼줄에 꿴 구공탄과 봉지에 담은 쌀을 들고 계단 길을 오르던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기던 시절,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스무 살의 그는 여름 한 철 송도해수욕장에서 시커먼 자동차타이어튜브를 해수욕객에게 빌려주며 잔돈푼을 벌었는데 당시 송도파출소의 젊은 경찰관 이병진순경을 알게 되 점심때면 같이 모국수를 먹고 저녁에는 멍게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친해진 모양이었다. 

이어 이병진순경이 경찰서의 교통계를 비롯한 여러 요직을 거치며 조금씩 성장하는 동안 결혼을 한 서수양씨는 남부민 윗길에 조그만 방앗간을 운영하다 건축업에 손을 대 약간의 부를 축적하며 둘은 더욱 가까워졌다고 했다. 마치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자라나는 시골아이처럼 이병진순경은 경무계 같은 경찰서의 요직을 차지하고 이제 4층짜리 빌딩을 가진 서수양씨는 마을의 청년회장을 거쳐 7형제의 철옹성 같은 비호를 받으며 동사무소와 파출소, 새마을금고의 각종 감투에 이어 남부민국민학교 육성회까지 좌지우지하면서 이병진의 도움으로 서부경찰서의 치안자문위원에 까지 이른 것이었다.

옛말에도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듯이 처음부터 열찬씨에게 적대적이던 서수양씨나 7형제보다 같은 공무원이면서 사사건건 열찬씨의 일에 시비를 걸거나 훼방을 놓는 파출소장이 열찬씨에겐 더욱 야비하고 치졸했다. 당시의 일선 동은 대체로 명목상 마을의 어른인 동장을 정점으로 파출소장, 예비군중대장, 국민학교교장, 우체국장들이 기관장모임을 이루고 동장주재로 매달 회의를 하고 저녁을 먹으며 예비군중대나 파출소, 경우에 따라서 국민학교의 운영비나 난방비 같은 애로사항을 동장이 동정자문위원회나 방위협의회의 협조를 받아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이병진소장은 비단 기관장회의뿐 아니라 동정자문위원회를 비롯한 온갖 회의에 끼어들며 공공연히 파출소에 대한 경비지원을 요구하여 주면 착복하고 안주면 돌아서서 죄 없는 동장을 욕하는 것이었다. 

전부터 맥주병이 난무하는 술자리에 끼어들어 노골적으로 자기보다 열대여섯 살이 어린 동장에게 시비를 걸고 함부로 말을 놓기도 했다. 가뜩이나 암암리에 일거수일투족이 구청장실로 보고되는 처지라 열찬씨는 아예 묵살하고 꾹 참았지만 마침내 이병진소장의 입에는 “어이, 이동장!”이 튀어나왔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라도 대응하면 온갖 허물을 덧씌워 마을에 소문을 내고 구청장실로 밀고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서수양의원이나 이병진소장보다 더욱 열찬씨를 난감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이없게도 열찬씨의 비호로 구의원에 당선되었다고 소문이 난 도회수의원이었다.

처음 구의원에 당선될 당시만 해도 열찬씨를 보면 “아이구, 우리 동장님!”을 연발하며 굽실거리고 당연한 것처럼 점심이나 줄을 사며 언젠가 한번 사내 대 사내로 허리띠 풀고 밤새 술이나 한 잔 하자던 사람이 정작 의회가 개원이 되고 구청장을 비롯한 구청의 간부들로부터 “의원님!” 소리와 함께 공손을 극한 예우를 보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구청장이 쩔쩔매는 자신에게 가열찬동장은 이제 너무나 볼품없는 존재가 된 것이었다.

동장실로 찾아와 차를 마시고 가거나 점심초청을 하는 일이 차츰 줄어들더니 마을의 회의나 행사에 자신의 좌석을 배치하고 예우를 하고 인사말을 할 기회를 주는지 아닌지를 따지면서 은근히 열찬씨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공손하지도 않았고 그전처럼 당연히 밥값, 술값을 내기는커녕  열찬씨가 내는 것을 못 본 척 즐기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의회에 보고할 남부민1동의 애로사항을 자기사무실로 보내달라고 하기고 했다. 그전까지 스스로 동사무소에 찾아와 담당직원하나하나에게 “아이구, 아무개주사님, 고맙습니다. 수고가 많습니다!”면서 너스레를 떨던 사람이 마치 제집에 앉아 동장의 보고를 받는 시늉을 내는 것이었다. 

그간 부산이라는 낯선 바닷가로 와서 이런저런 사람들로 부터 한두 번 질시를 받거나 배신당한 것도 아닌 열찬씨는 허허 웃으며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니 혀를 끌끌 찼지만 젊은 날의 표상 정광식씨나 바르게살기위원회 장지상씨등은 순진한 동장님이 선거에 이용당하고 마침내 배신당한 것이라고 분개하기도 했다.

 

1996년 5월 어느 일요일. 무르녹는 봄의 막바지에 마흔여섯의 가열찬 동장은 관광버스를 빌려 동정자문위원회의 부부관광에 나섰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