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79) 장안사 계곡의 골바람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79) 장안사 계곡의 골바람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2.12.04 11:09
  • 업데이트 2022.12.07 11: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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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를 품고 있는 불광산 [유튜브 - 찬드라여행채널]
장안사를 품고 있는 불광산 [유튜브 - 찬드라여행채널]

장안사 계곡으로 딴 바람이나 좀 쐬자는 기분으로 동료들과 나들이를 갔다. 기말고사가 끝난 토요일 오후이면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은데, 아니다. 삶터에 매여 있으면, 언제나 마음은 무겁다. 삶터를 벗어나서 느낌이 다른 새 바람을 맡아야 비로소 어깨가 가벼워진다. 하여 시험 며칠 전부터 ‘학생과’ 교사들 전원 참여로 예정해둔 나들이였다.

학교가 있는 동래에서 기장까지는 거리도 적당하다. 놀터보다는 한적한 계곡이 몇 시간 쉬며 과원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에는 안성맞춤이다. 계곡에 자리를 잡기 전 장안사에 들렀다. 경내에 들어서자 마당에 기와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마침 ‘기와불사’ 중이었다. 절을 증축이나 개축을 할 때 신도들이나 방문객들이 십시일반으로 돕는 행사다. 얼마간의 돈을 시주하고 기와에다 소원 등을 적고 기명한다.

불심이 깊은 두셋은 검은 기와에다 흰 페인트로 뭔가를 적었다. 불심과는 거리가 먼 나도 기와 한 장을 가져와 이름만 쓰고 연월일을 적었다. 성경을 열심히 읽는 교무실 내 옆자리의 여교사도 불사에 참여했다. 자기의 기와를 내가 갖다 둔 기와 옆에 두었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다 봤다.

“선생님답네요. 기와에 자기 이름을 안 쓰고, 000 선생님 이름을 적었네요.”

어떤 조직에든 못난이 취급 받는 이가 있다. 능력이 평균에 못 미치든지, 언행이 좀 칠칠맞다든지, 이유야 가지각색이다. 일행 중에 능력도 언행도 인정받지 못하면서 인색하기까지 한 선배교사가 있었다. 내 기와에 그 선배교사의 이름을 적었다. 용케도 김 선생이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기독교인이 부처님께 예불 드림만 하겠습니까?”

부처의 가피를 바라지 않는다. 불교는 자력신앙으로 이해하고 있다. 철저히 스스로의 깨침을 지향할 뿐, 불보살의 힘을 빌린다는 타력신앙을 미더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사에 기와 한 장이라도 보탬은 부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을 보존하고 유지하며, 전승하여 널리 펴는 도량에 기와 한 장 얹는 수고는 인류의 지적 유산에 대한 기본 예의 아니겠는가.

교무실에서의 자리가 글자그대로 지척이다 보니, 김 선생과 나는 서로의 독서 성향에 대해서 잘 알았다. 김 선생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책을 주로 읽었다. 나는 성경이든 불경이든 가리지 않는 잡탕 독서를 했다. 성향은 아주 다른 것 같으면서도 어쩜 지향점은 같은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돈독히 하면서도 다른 종교에도 마음을 열었다.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겼다. 하여 나는 그녀의 열린 마음을 존중했고, 그녀는 내 지적 포용력을 높이 샀다.

몇 달 전 김 선생이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 같은 책을 두 번째 읽고 있으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이태하의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이었다. 어떤 내용이냐고 묻길래, ‘종교적 믿음’에 대한 긍정과 부정, 그리고 반성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김 선생은 ‘철학’이란 단어가 있어서 골치 아플 것 같으니 ‘꽂히는 부분’만 적시해 달라고 했다. 나는 머뭇거림 없이 <종교의 반도덕성> 부분을 들었다. 김 선생 정도면 이 정도 비판은 감당할 깜냥은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구약성서》가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다산, 장수, 권력, 명예, 건강과 같은 현세적인 복들에 대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 《신약성서》는 현세적인 복들을 상대화하는 천국의 영생을 약속한다.

17세기 초 유럽의 각국들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기독교는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충실히 해냈다. 남미의 열대우림을 헤치며 독충과 굶주림을 이겨내고 마침내 획득한 식민지는 구약에서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탈이 그랬던 것처럼 신이 허락한 축복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압제 받는 식민지의 원주민들에게 전파된 기독교는 신약에서 말하는 천국이라는 내세의 축복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이 불행한 사태를 체념하고 받아들일 것을 가르쳤다. 다시 말해 17세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주민들에게 순종을 가르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식민지에 기독교가 전파되면 원주민들이 시민적 평등과 자유를 자각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식민지 총독에게 영국 국교회의 한 주교가 보낸 편지는 바로 기독교의 이중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민적인 사유재산이나 시민적 관계에 속하는 의무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기독교가 주는 자유는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자유이며, 인간의 탐욕과 격정과 부당한 욕심에서 헤어나는 자유이다. 그러나 그들의 외부적 조건에서 말하면, 그 전에 있었던 것이 무엇이거나 노예로 있었든지 자유로웠든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가 주는 자유를 영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유럽의 지배자들에게 기독교는 오직 신약적 요소만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할 때는, 모든 부와 권력을 신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구약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신약과 구약을 자의적으로 선택, 적용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신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기독교인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누리는 부와 권세는 신의 축복으로 간주하고, 남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영적인 위로만을 내세우는 기독교인은 바로 구약과 신약을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부와 권력을 주신 구약의 하느님이 바로 억압 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억압 받는 자들을 위해 영적인 위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조송원 작가
조송원 작가

그러나 기독교가 억압 받는 자에게는 겸손을 강조하는 신약을, 압제하는 자들에게는 생에의 의지 즉 지배의 의지를 강조하는 구약을 가르치는 한, 기독교는 사회의 도덕화에 이바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의 도덕화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장안사 계곡으로 자리를 옮겼다. 골바람의 신선함을 호흡한다. 상쾌하다. 김 선생이 바나나를 건네며 대뜸 “선생님은 정말 신의 존재를 믿는 것 같애요”라고 말했다. 왜요, 하고 눈길로 나는 김 선생에게 물었다.

“신이 목사나 승려 수준이 아니잖아요. 기와에 적힌 이름으로 누가 신심을 내었는지를 안다면, 이미 신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하하 웃었다. 말이 된다는 뜻이다. 김 선생도 입매에 미소를 담았다. 쏴, 하고 골바람이 분다. 마음까지 상쾌하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