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IMF③
그뿐이 아니었다. 아이엠에프 때문에 갑자기 실직하거나 가게 문을 닫거나 자식들의 지원이 끊어져 당장 끼니를 잇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공공근로사업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공원이나 산지의 화단이나 나무에 물을 주거나 번듯한 산책로의 계단이나 나무다리를 뜯고 다시 만들거나 하다 못 해 전주의 벽보라도 떼게 하고 슬며시 노임을 지급하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신종사업에 계획보다 몇 배의 인원이 신청하여 배점(配點)표를 만들어 심사를 하고 순위를 매겨 100명도 넘는 인부들이 중구의 유일한 숲인 몇 천 평도 안 되는 민주공원으로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다. 대부분 노인들이라 업무의 실적보다는 저러다 누가 다치지나 않을까, 혹시 작업 중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는 사람은 생기지 않을까 한없이 불안할 분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안과 혼란이 흐물흐물 녹아들며 구청과 동사무소는 물론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의 식당과 점포와 부동산중개업소, 달동네의 골목과 구멍가게에 새로운 수런거림이 만발했다. 바로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지방선거, 시장과 구청장, 시의원과 구의원, 그러니까 다시 골목대장을 뽑는 선거철이 다가온 것이었다.
아아, 지방선거! 그리고 구청장선거!
수많은 악재와 우울한 세월로 동면하는 개구리처럼 숨을 죽이고 살던 열찬씨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선거에 개입하지 않는 그야말로 공무원의 정치중립의 의무를 철저히 지킬 것이라고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 단지 그간 자신을 돌봐준 구청장을 당연히 지지해야한다는 저 유교적 명분에 물든 한국인이랄까, 경상도사내의 고정관념대로 아무런 생각이나 의심도 없이 김모구청장을 지지한 것이 대부분의 간부들이 현실적 강자인 공천자를 따라 줄을 바꾼 해바라기가 되어 살아남았음에도 끝끝내 그 알량한 의리랄까 신념을 지키다가 기어이 이 낯선 중구청으로 귀양 와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 하는 자신으로야 단 한 번의 시행착오로도 충분히 이 세상의 험난함을 깨쳤다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세상사에 초연하고 영리 살기다툼의 막다른 곳 감투싸움인 정치나 선거에 등을 돌리고 산다 해도 세상만사 누군가 다스리고 지배하고 앞장서 이끌어가는, 좋게 말해서는 지도자나 정치인, 나쁘게 말해서는 선동가나 거짓말쟁이가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였으니 그렇다고 열찬씨가 완전히 정치를 잊거나 무시하고 독야청청 살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설령 정치에 뜻이 없다 못 해 정치 또는 정치인을 무슨 흉물이나 원수를 대하듯 하더라도 자신이 먹고사는 직장, 행정이라는 그 바탕이 바로 정치의 바로 아래 단계, 그 거짓말쟁이 국회의원이 만든 법을 집행하고 대통령이나 장관이 내리는 명령을 추진하는 것이 기본임무인 바에야.
거기다 싫든 좋은 60년대 군사정권의 지방공무원으로 공직에 투신하여 입대하는 과정에서 일인 장기집권체제인 10월 유신의 대두(擡頭)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의 홍보요원을 거친 데다 10. 26정변 이후 같은 군사정권이면서도 광주사태로 수많은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노태우정권을 지나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민주정부까지 몸소 겪으며 골목골목 그 모든 공화국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붙이고 온갖 술책으로 미리 당선자를 정해놓고 하는 각종 선거의 선거인명부와 투표통지서를 작성하느라고 밤을 샌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는가?
싫든 좋든 이번 선거가 끝나 중구청장이 바뀌든 유임이 되든 열찬씨에게도 어떤 변화는 필연적으로 올 것이었다.
우선 지금의 변모구청장이 재선된다면 기존의 임태갑 총무과장과 김실현 기획감사실장을 비롯한 경쟁자그룹의 견제와 세무과 김길평 계장과 조충환 주무를 비롯한 음해세력이 더한층 구청장을 싸고돌며 시기질투모함과 밀고를 일삼아 그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다 못 해 민선 제2기의 출범과 함께 이루어질 대대적 조직개편에 한직인 민방위과가 갈기갈기 찢어져 다른 부서로 통합되고 자신은 보직도, 단 한 사람의 부하도 받지 못할 투명인간 또는 그림자사무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 국제시장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전기, 전자제품을 팔다 전국적인 라디오 붐, 텔레비전 붐에 편성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중구의 터줏대감이 되어 용두산공원 서쪽 대각사 옆의 노른자위 땅에 커다란 예식장을 짓고 막강한 부를 과시하는 <라디오사장 이사장>의 큰아들이 새 구청장으로 당선되어도 혹시라도 그간에 소외되었던 열찬씨를 발탁, 사무관경력에 합당한 재무과장이나 기획감사실장, 총무과장을 맡겨 새 집행부의 중심인물로 키워나갈 것이라는 달콤한 기대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변혁을 꿈꾸며 은밀히 내통하고 있는 창업공신이 있을 것이고 지금의 변모청장 측근이면서도 재빨리 태도를 바꾸어 새 구청장을 맴돌며 온갖 아부로 환심을 사고 충성을 다짐하며 그런 자신의 변절을 감추려고 열찬씨처럼 어정쩡한 사람을 더욱 호되게 몰아붙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또 하나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지난번에 낙선하여 수많은 <떠도는 주사>를 양산하고 열찬씨를 귀양길에 오르게 한 서구의 전 김모구청장이 현직 변모구청장에게 재도전, 다시 권좌에 오르는 통쾌한 시나리오였다.
사실 지금 서구바닥은 물론 시청이나 다른 구청의 간부들도 유난히 집념이 강해 무슨 일이라도 한번 붙잡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고 끝장을 보는 김모구청장이 기어이 잃었던 권좌를 찾기 위해 이미 서구에 활동거점을 마련하고 전부터 자신을 따르던 직원, 특히 자신 때문에 서구에서 쫓겨난 <떠도는 주사>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운영하고 구청장당시에 가까웠던 부녀회, 새마을지도자, 청년회의 멤버들을 점조직으로 운영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사실 아직 별다른 모임명이나 회칙도 없어 단지 보스가 낙선을 하고 자신들이 떨려났다는 도무지 식지 않는 분노를 촉매로 동병상련의 동지애를 불태우며 매번 폭탄주로 단합을 다지는 그 모임에 열찬씨도 여러 번 참석통지를 받았지만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임의 모든 멤버들은 선거당시의 정황, 즉 김모청장 아래서 사무관이 된 동향인인 데다 누구보다도 신임이 두텁고 최후의 3인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며 선거종반까지 최선을 다 한 데다 당선자 변모구청장에게 모진 핍박을 받고 중구청으로 귀양까지 간 마당에 누구보다도 그 모임에 적극적이며 김모구청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최선을 다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열찬씨는 처음에는 업무나 가정적으로 바쁜 일이 있다면서 피하고 나중에는 몸이 좋지 않다거나 또 다른 변명을 대 자꾸 빠지다 보니 마침내 이젠 연락도 오지 않는 처지였다. 당시 열찬씨의 마음으로는 작금에 자신이 겪고 있는 것처럼 좌우간 정치는 행정하고 분리되어야 하고 정치, 또는 정치세력과 연관된 파당에 휩싸인다면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갈등과 힘겨루기, 나중에는 모함과 암투와 권모술수, 보이지 않는 저주와 암살에 이르기까지, 마치 임진왜란을 앞두고도 당파싸움을 일삼던 저 망국의 사색당파를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에, 멋모르고 한 번은 빠졌지만 다시는 정치에 빠져 좌고우면하는 공무원은 되지 않겠다는 각성, 단순한 공무원도 아닌 가장 예리하고 양심적인 지성이어야 할 한 시인으로서도 절대로 그리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심이 서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열찬씨의 마음과 달리 이제 슬슬 잠에서 깨어나 김모청장의 설욕을 위한 선봉장이 되어 차기 서구청의 간부, 기획감사실장이나 총무과장이 되고 국장으로 승진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연락이 오기도 했고 이장희 총무과장을 비롯한 서구 변모청장의 측근들이 벌써부터 열찬씨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며 움직임을 파악한다고도 했다.
연말에서 연초로 이어지는 그 급박한 정세의 흐름에 열찬씨가 그렇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데는 그 밖에도 이유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정석이의 대학입시문제 때문이었다.
아이엠에프, 즉 국제통화기금을 신청하느냐 마느냐 전 국민이 초미의 관심에 휩싸였던 연례행사처럼 몹시도 춥고 스산한 11월 하순에 정석이는 해운대신도시에 있는 양운중학교에서 수학능력평가고사를 치렀는데 승용차로 학교까지 태워다준 열찬씨 내외와 정문 앞에 도열해 커피를 부어주며 파이팅을 외치던 후배들의 응원에 부응하지 못 한 모양으로 귀가하는 걸음걸이에 힘이 빠지고 기가 빠졌다.
무슨 일이 일인가 조심스레 묻는 영순씨의 말에 어디 깜빡 쓰인 것처럼 환하게 잘 아는 문제를 몇 개나 틀렸다고 고개를 꼬았다. 긴장해서 그 정도 실수는 누구나 다 하는 법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라고 열찬씨가 위로했지만 시험성적표를 받아오는 날 보니 역시 걱정대로 기대보다 좀 떨어지는 390점 만점에 370점 정도였다. 그 정도면 전국대비 1, 2%에 드는 점수지만 부산바닥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남일고등학교 인문계의 선두그룹으로서는 역시 좀 아쉬운 점수였다.
이제 어느 대학으로 응시할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가급적 한 명이라도 더 서울대학교에 보내 학교의 위상을 높이가 위해 담임선생은 서울대학교를 추천했다. 수능점수가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작년부터 실시하는 논술시험에 특히 강한 편이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슬비의 고3때처럼 식탁에 둘러앉은 네 식구는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학과별 모집인원표를 놓고 토론에 들어갔다. 어학과 문학에 강한 집안의 혈통에 따라 일단은 인문과를 진학하기로 하고 1차로 전통이랄 연세대학교 인문학부와 서울대학교 신문방송학과가 지목되었는데 가난한 공무원가족의 한계랄까 또 다시 만약 재수를 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라는 부부의 우려 때문에 일단 제1지망은 연세대 인문학부 수시모집으로, 2차는 서울대 신문방송학과에 정시로 지원키로하고 원서를 썼다.
만약 서울대학교 정시의 논술고사를 치른다면 평소에 아이가 책도 많이 읽고 이야기도 조리 있게 잘 하는 데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일기나 글짓기도 잘 하는 데다 특히 매우 감성적인 이비와 달리 냉정을 넘어 비정할 정도로 간결하고 날카로운 큰아버지 일찬씨를 빼닮은지라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당시에 요행으로 열찬씨의 먼 외척, 그러니까 소캐집 큰 딸의 둘째 아들 김영태씨가 경북대학을 나와 지리교사로 근무하다 서면의 부산학원의 원장으로 있었는데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정석이와 친구 셋을 논술 반으로 보냈는데 정석이를 비롯한 넷 모두가 너무나 똑똑한 아이들이라 모두들 걱정 없이 서울대에 진학할 것 같다고 그렇게 되면 학원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희색이 만면했다.
열찬씨는 열찬씨대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지난 해 논술문제 생 택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이어 올해는 과연 어떤 동화나 소설이 나올 것이냐는 것이었다. 물론 비교적 널리 알려지고 그리 길지 않고 간명하면서 상당한 상징성을 가진 괘 유명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한 그는 몇 개의 소설로 압축해 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조지오웰의 풍자소설 「동물농장」이었다. 우선 그리 양이 많지 않은 데다 의인화된 동물 하나하나가 상당히 상징성을 띠며 인간세상을 은유하는 지라 지난 해 사막여우가 등장하는 「어린 왕자」에 이어 동물시리즈로 출제 될 것만 같았다.
다음 떠오른 것은 연암 박지원의 「호질」과 「양반전」이었다. 한 때 들불처럼 번진 전 국민 교양강화차원에서 우리 고전읽기의 중심을 이룬 풍자소설로서 역시 짧고 간명하여 논술고사의 문제로 걸맞고 시대배경 역시 이씨조선의 답답한 성리학의 감옥을 부수고 실사구시의 현장으로 탈출하는 실학시대의 작품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미쳐 논술고사를 치를 기회도 없이 정석이의 대학입시는 종결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세대학교로부터 인문학부에 수시 합격되었다는 통지서가 날아온 것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