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1) 현고학생부군신위, 왜 ‘학생’인가?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1) 현고학생부군신위, 왜 ‘학생’인가?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1.22 05:45
  • 업데이트 2023.01.2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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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나 추석, 그리고 기일에 제사를 지낼 때, 지방紙榜을 써서 제사상을 받는 자리에 모신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한다는 제사의 의미를 고려하면, 현대에서는 그냥 한글로 ‘아버님 신위’로 씀이 더 옳을 듯하다(이 글에서는 설명의 편의상 제사 대상을 아버지로 한정한다). 굳이 지방을 ‘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쓸 때는,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신분차별과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남녀차별의 봉건적 유산이 이 문장에 들어있음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아버님 신위’와 ‘현고학생부군신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버님 신위’에는 남녀차별이 없다. 어머니 제사 때는 ‘어머님 신위’라고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관직명을 아예 쓰지 않기 때문에 관존민비라는 신분차별도 없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학생’이다. 모르긴 해도 이 ‘현고학생부군신위’에 유학의 핵심사상이 농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의 유학은 전한前漢 때 동중서(기원전 176년?~기원전 104년)에 의해 유교로 발전하고, 남송南宋 때 주희(1130~1200)에 의해 다시 성리학으로 발전한다. 유교든 성리학이든 공자의 사상인 유학이 기본 뼈대이다.

지방 [ 유튜브 Tatao CalliArt]

국어사전에 학생이란①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②학예를 배우는 사람 ③생전에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명정, 지방, 신주 따위에 쓰는 존칭, 으로 나온다. 이 중에서 ③의 뜻풀이는 정확하지 못하다. 사람을 선비로 정확하게 특정해야 한다. 왜인가?

배우긴 배우는 데, 대체 뭘 배운다는 말인가? 생업 기술을 배운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지방에서 쓰는 학생, 나아가 공자의 학생은 ‘치인治人의 자리에 나아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겠다는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수기修己하는 선비’를 지칭한다. 곧 관직을 얻지 못해 초야에 있지만, 언제라도 관직에 나아가면 치국과 평천하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하고 천하를 경륜하는 데 모자람이 없도록 배우고 또 배우는 선비란 뜻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출사하여 면장이라도 했으면, 지방에 ‘학생’ 대신에 품계와 관직명을 쓴다. ‘현고사무관00면장부군신위’. 이에 따라 어머니의 호칭도 달라진다. 학생의 아내는 유인孺人이다. 5급 사무관은 조선시대 정6품이나 종5품에 해당하므로 어머니는 ‘의인宜人’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김해 김 씨라면, ‘현비유인김해김씨신위’에서 ‘현비의인김해김씨신위’로 바뀐다. 관직이 아니고 사기업의 재무이사를 역임했다면, ‘현고00회사재무이사부군신위’라고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지방은 본래 공자 시대 농경사회의 신분질서의 표현이므로, 원칙적으로는 사기업의 재무이사도 그냥 학생에 불과하다. 아니, 학생 자격도 없는 신분이라는 게 더 정확하다. 하여 지방 자체를 쓸 수 없는 출신인 것이다. 관존민비 사상이다.

지방에 쓰이는 학생, 공자가 말하는 학생은 선비를 말한다. 공자 시대의 선비는 피지배계급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의 하나였다. 당시 유사儒士는 지배계급인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 등 가문의 대인大人이나 제후에게 고용되어야만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유사들은 지식을 팔아먹고 살아야하는 샐러리맨과 같은 처지였다. 자본주의로 말하면 정신노동을 팔아 먹고사는, 생산수단이 전무한 프롤레타리아에 해당한다.

그러나 유사 곧 선비는 중도주의를 표방한 지식인이었다. 위로는 지배계급에게 굴하지 않고, 아래로는 민중에 아첨하지 않는 중용의 도를 지키는 재야세력임을 자임했다. 이들도 중세에 이르면, 곧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산계급으로 발전했으나 중도주의와 재야 정신은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다.

유사 정신(선비 정신)은 공자가 강조한 중간계급으로 천하의 도리에 따라 행동하는 중도주의 정신을 말한다. 중도주의 정신이란, 제후와 대부에게 고용되어 먹고살지만 종이 아니므로, 도리가 아니라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그 곁을 떠나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도리에 벗어난 귀족에게는 고용되지 않는다는 지식인의 긍지 같은 것이다. 현대로 치면, 공무원들이 상급자의 하인이 아니라, ‘국가의 공복’이라는 자부심과 같은 것이다.

선비 정신의 조건은 청한淸閑이다. 청한의 삶은 물욕, 권력욕, 명예욕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물욕과 권력욕은 군주에게 중도를 지킬 수 없게 하고, 명예욕은 대중에게 중도를 지킬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선비들의 청한은, 고대에는 무산계급이었던 지식인계급에게 있어 자신들이 굶어 죽어도 군주의 권력에 굽히지 않는다는 자존심의 징표였다. 중세에는 중산계급이 된 지식인들이 물욕을 버리고 최소한의 청빈한 생활을 함으로써 토호들이나 거상들과 구분되는 고귀함의 징표로 삼은 것이다.

지방은 고인과 제사를 모시는 사람(祭主)의 관계, 고인의 직위, 고인의 이름, 고인의 자리의 순서로 적는 것이 원칙이다. ‘顯考學生府君神位’. 현(顯)은 존경의 의미를 나타낸다. 고(考)는 아버지를 뜻한다. 살아서는 父이고 죽어서는 考이다. 학생(學生)은 비록 재야에 묻혀있었지만 뜻을 얻으면 천하를 경륜할 수 있도록 수양하며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은 선비였다는 뜻이다. 부군(府君)은 남자 조상에 대한 존칭이다. 신위(神位)는 고인의 자리라는 뜻이다. 살아계신 어머니는 母이고, 돌아가시면 비妣이다. 그러므로 ‘어머님 신위’는 ‘顯妣孺人金海金氏神位’가 된다. 남자 조상의 존칭인 부군에 상응하는 여자 조상 존칭은 없다. 그냥 ‘김해김씨’라 한다. 남녀 차별이다.

신위에 영정을 모시든, ‘아버님 신위’로 지방을 써서 모시든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굳이 ‘현고학생부군신위’란 지방을 선택할 때는, 부정적으로는 신분차별과 남녀차별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학생’의 의미를 한 번 새겨봄 직하지 않은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