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창간호-창작을 위한 시론 1】 시에서 ‘생략’ 문제, 코르크 병 따기와 시 따기 - 정연홍의 「북천역」과 「아프리카 9」를 본보기로
【장소시학 창간호-창작을 위한 시론 1】 시에서 ‘생략’ 문제, 코르크 병 따기와 시 따기 - 정연홍의 「북천역」과 「아프리카 9」를 본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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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26 10:30
  • 업데이트 2023.01.2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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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을 위한 시론 1

 

시에서 ‘생략’ 문제, 코르크 병 따기와 시 따기
- 정연홍의 「북천역」과 「아프리카 9」를 본보기로

박 태 일

 

1. 『코르크 왕국』을 받고 

2020년 6월 16일, 5주차 수업을 끝냈다. 부산대학교 평생교육원이 있는 CU백화점 7층으로 가기 위해 3층까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백화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시각. 9시 40분쯤 이르면 앞거리 쪽에 이저런 물품을 먼저 내놓는다. 그래도 실내 문은 닫혔다. 3층에 이르러 다시 오른쪽으로 걸음을 틀어 문을 밀고 들어서면 백화점 닫힌 쇠창살 복도를 따라 승강기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 승강기 앞에서 단추를 누른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면 쇠창살에 손을 슬쩍 대 본다. 차가운 무늬를 잘 새겨 넣어 만들었다. 

7층에서 내려 중국폐렴 탓으로 손목 온도를 잰다. 다시 알코올로 손을 닦은 뒤 강의실로 들어선다. 물론 입마개는 필수다. 3시간 수업인데, 중간에 한차례 10분을 쉬고 두 묶음으로 이어서 진행한다. 마산에서도 오래 해왔던 해묵은 방식이다. 마지막 짬에 질문 시간을 주니 한 사람이 손을 든다. 이른바 좋은 시를 소개하고 함께 즐기는 시간도 수업 속살에 넣었으면 좋겠다는 건의였다. 수업 진행과는 떨어진 것 같은데 이해는 가는 요구다. 시쓰기 수업에 남의 시를 함께 읽자고? 시간이 날까 싶지만. 그럴 기회도 뒷날에는 가끔 있을 거라 답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시창작반 사람의 유형을 알 것 같다. 세상으로 왕창 열린 누리집 곳곳에, 나날이 떠도는 일간 신문마다 뒤질세라 이른바 좋은 시라 내세워놓고 짧게 풀이를 붙이는, 좋은 시 읽기가 넘쳐나고 있는 마당 아닌가. 혼자 읽어도 버거울 그런 일을 아까운 시쓰기 수업 시간을 줄여 가며 하자니. 시창작반을 스무 해 가까이 끌어 오고 있는 동안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10년이 되었음 직한 옛날에. 그런 사람은 대개 쓰기보다 딴전을 피우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시창작 첨삭 수업 시간에 자기 습작시를 내놓고 남에게 어떻게 읽히는가, 어떤 수준에 이른 것인가, 궁금하지 않는가. 시 쓰겠다는 이가 무엇보다 자기 작품을 의제로 올려놓고 따지는 기대와 긴장 속에 갇혀 즐기는 경험을 예사로 여기다니. 그렇지 않아도 두어 주 수업을 하다 이른바 ‘등단’했다는 수강생이 있어 해당 작품이 실린 문예지를 한번 보자며, 가져와 보라 청했다. 작품 수준을 가늠해 보기 위한 일이었다. 그 다음 주에 가져온 잡지를 읽다 기겁을 했다. 이른바 ‘이 계절의 시인’이니 뭐니 기획 표제 아래 한 사람을 뽑아 놓고 그에 맞추어 올린 작품평 앞머리였다. 가로되 시 배우는 출발은 좋은 시를 두고 낱말을 바꾸고 고쳐 가면서 다시 쓰는 훈련이라고 적은 게 아닌가. 그러니 작품 수준이래야 말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강생에게 첫 시간부터 자기다운 글쓰기, 남의 시를 흉내 내거나 기웃거리는 시쓰기를 경계하면서, 자기 삶에 뿌리내린 자기 시쓰기의 중요성을 목청 높였던 터다. 그럼에도 불쑥 튀어나온 제안이었으니 뜬금없다 느꼈던 것이다. 몇 차례 이어 나온 수업을 겉치레로 따라왔던 셈이다. 한 주에 한 편 습작시 쓰기를 중요 목표로 삼았던 수업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습작시는 올리지 않고 남이 쓴, 이른바 ‘좋은’ 시에나 곁눈을 주고 있다니. 그런 사람은 다른 시인의 ‘좋은 시’ 읽기를 매주 다룬다 해도 자기 작품을 내놓을 이가 아니다. 헤엄치기를 배우러 왔다며 물가에서 기웃 기웃거리다 잠시 호들갑 떨고 돌아서는 부류.   

수업 뒤 장전시장으로 걸어 내려가 돼지국밥으로 점심을 마쳤다. 집에 돌아오니 우편물이 하나 와 있었다. 정연홍 시집 『코르크 왕국』(파란, 2020. 6). 어떻게 주소를 알고 학교가 아니라 집으로 보냈다. 출판사 ‘파란’은 내 시집의 풀이를 썼던 이경수·장철환 두 사람의 평론집을 빌려 알게 된 곳이다. 지난 해 겨울, 한정호·김봉희 두 교수가 엮어 낸 정년문집 『박태일의 시살이 배움살이』 출판을 한 차례 알아보았던 곳이다. 이미 알음이 있는 출판사에서 내기로 결정이 된 책이었다. 몇 주 지난 뒤 갑자기 인세분으로 받기로 했던 책을 주기 힘들다는 손전화 전언이 왔다. 출판 방향이 바뀌었으니 양해해 달라는 뜻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일반 판매는 어렵다 하더라도 저자 기증본이 얼마간 필요한 경우였다. 

급작스런 변경에 마음이 언짢아 다른 곳에 내기로 작정하고 파란에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거기서는 1000부 잣대로 출판비 전액을 적은 견적서를 보내왔다. 1000부까지 낼 필요가 없는 책인데, 자비 출판하라는 뜻인가? 나는 그쪽 출판사의 출판 내규를 몰라 몇 가지 궁금한 내용을 알려 달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달리 회신이 없어 나도 그 일을 잊어버렸다. 『박태일의 시살이 배움살이』 원고는 자연스레 오랜 출판 인연을 맺고 있는 도서출판 경진 양정섭 사장이 맡은 것이다. 『코르크 왕국』 날개를 보니 이미 낸 ‘파란시선’이 모두 57권이다. 낸 이들 이름을 훑어보았다. 내가 알 만한 시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놀라운 사실이다. 시문학사회가 그렇게 바뀐 것인가? 내가 아래 세대 시인에 관해 너무 모르는 탓인가? 아니면 출판사의 글쓴이 선택 취향이 나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 채워진 까닭인가? 어느 경우든 2000년대를 넘어선 시기의 젊은 시문학 세대에 관한 한 조감도를 그릴 만한 역량이 내게 없다는 사실은 뚜렷해진 셈이다. 

시집을 보내준 정연홍 시인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약력을 보니 1988년에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빌려 동화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문학사회에 얼굴을 내놓은 때가 1988년이니 나보다 8년 밖에 뒤늦지 않았다. 문학사회 등장이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사람이다. 2005년에는 『시와시학』을 빌려 시작 활동을 선보였다. 동화에서 시로 갈래를 옮겼으니 흔치 않은 경우다.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까지 거쳤다. 알음이 있는 강은교나 신진 시인에게서 배웠으리라. 첫 시집 『세상을 박음질하다』(2014)를 냈다. 『코르크 왕국』은 두 번째다. 검색을 해보니 시인은 196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하동에서 자랐다. 그렇다면 50대 초반이다. 시인으로 얼굴을 내민 뒤 15년에 시집 두 권이었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 버릇으로 보자면 과작인 셈이다.

목차를 넘기니 연작시로 올린 「아프리카」가 눈에 든다. 그 뒤에 「진주」. 「진주」 앞뒤로 「북천면」과 「통영」이 놓였다. 펼쳐서 읽었다. 세 편 모두 회고시다. 시인의 성장 체험이 깃든 경남의 장소를 글감으로 끌어다 놓은 장소시. 그런데 그러한 고향 회고의 장소시는 시집 속에서 더 찾을 수 없었다. 시인의 눈길이나 창작의 본령이 그런 곳에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유이름씨를 제목에 붙이고 있는 시는 그들 말고 「아프리카」가 있을 따름이었다. 거기다 모두 14편이다. 「북천면」, 「진주」, 「통영」보다 비중이 훨씬 높다. 그럼에도 「아프리카」 연작시는 장소시라 하기 어렵다. 아프리카 여행이라는 실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건 그렇지 않건 몇 편 읽어 보니 막연한 공간 상상일 따름이었다.  

정연홍 시인에게는 태어났고 자랐던 고향의 장소와 지명 경험이 자신의 시세계에서 곁가지였다. 『코르크 왕국』에서 제대로 읽도록 이끄는 것은 「아프리카」 연작이나 시인이 창작적 개성이라 굳이 강조하고 싶었을 앞머리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진주」를 비롯한 세 편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개인의 개별적 경험 가치가 그런 대로 속속들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어쨌든 세 편의 경남 지역 장소시만으로도 나는 『코르크 왕국』을 내 식으로 읽을 까닭이 뚜렷해졌다. 처음 알게 된 시인의 작품이다. 코르크 병 따듯 『코르크 왕국』이 쉽게 읽히기야 할 것인가. 가끔 이런 시 읽기를 빌려 덤으로 아래 세대 시인들의 흐름까지 제대로 짚어볼 수 있으리라.  

 

2. 생략의 괴로움과 즐거움  

문학은 허구(fiction)다. 이 말은 두 가지에서 참이다. 첫째, 세계를 언어라는 사람의 인위적 기호로 적은 것이다. 세계를 두고 이루어진 재구성의 결과물, 담론인 까닭에 모든 문학은 거짓이다. 둘째, 문학은 수용층, 곧 읽는이의 해석 영역에 맡겨져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거짓이다. 문학이 세계에 대해 말하는 속살은 작품이 지닌 성질이라기보다 해석에 의해 주어진 기능이다.1)

 문학은 해석 대상으로 열려 있는, 해석 공간에서 새롭게 열리고 닫히며 거듭나는 창조물이다. 길거리 알림판이나 밥값을 적은 차림판과는 엄연히 다르다. 문학의 특성을 과학 언어가 아니라 내포 언어를 쓰는 것이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문학 가운데서도 해석 활동의 기능이 가장 자유롭게 열려 있는 갈래가 시다. 시는 오히려 그것을 부추긴다. 현실 세계의 2차 환상으로서 모방적, 재현적 허구를 지향하는 소설 갈래와 다른 시의 오롯한 자리가 거기다. 시는 풍부한 상상력과 두터운 읽기의 가능성을 작법의 원리로 삼는 갈래다. 다르게 거듭 읽힘으로써 자기 목숨을 이어나가는 시. 보기를 들어 시인이 ‘나는 바다를 잃었다’고 쓸 때, 그것은 머물고 바라보는 현실의 장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바다는 어머니일 수도, 소년기의 순수성일 수도 있다. 바다는 여러 길로 읽히는 잠재적 해석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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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너선 컬러(이은경·임옥희 옮김), 『문학이론』, 동문선, 1999, 56쪽.

 

1) 생략과 단형의 시

시가 허구로서, 읽는이-개인일 수 있고, 집단일 수 있고, 시대일 수도 있다-의 해석/독서 공간으로 나앉은 유동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해석의 가능성과 가독성이 텍스트 바깥으로 마냥 벋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 형식 안쪽에 담긴 언어적 표현의 맥락과 정독의 노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시 풀이 또는 시 읽기는 시가 지닌 그러한 표현적 개별성과 읽는이의 독서 능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긴장된 놀이다. 제대로 놀기 위해서 읽는이는 놀이 규칙을 배워야 하고 독서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글의 맥락을 찾고 읽어내는, 글의 유기성과 통일성을 재는 힘이다. 텍스트 진행의 앞과 뒤 사이 연속/불연속성의 감각, 텍스트 겉과 속 사이 구조적 간격을 메울 수 있는 동일/비동일성 감각이 그것이다. 

그런 해석적 역동이 같은 허구 양식이면서도 근대시가 소설과 맞서 자신의 제도적 정당성을 웅변해 온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다. 이때 시 독서의 정/부당, 정/오독 판단은 오롯이 텍스트 안팎에서 마련하는 맥락적 유기성과 통일성에 바탕을 둔다. 시 독서의 자유로움은 한쪽으로는 열려 있으면서 한쪽으로는 닫혀 있다. 따라서 ‘의미’ 전달을 목표로 삼는 줄글 언어와 달리 시가 언어 그 자체에 목표를 두는 ‘존재’의 텍스트라는 말은 큰 틀에서 참이다. 시가 겉모습에서부터 짧은 형식과 생략, 압축하는 언어를 미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있다. 

시는 짧다. 짧은 형식임에도 읽는이의 해석을 빌려 늘여 읽히고, 소설은 긴 형식임에도 읽는이의 간추림을 빌려 사건, 곧 스토리로 줄여 읽힌다. 시의 독서 방식과 소설의 독서 방식은 다르다. 근대시가 짧은 율문 형식을 갖추면서도 살아남는 제도적 정당성이 여기서 마련된다. 짧은 율문 형식은 생략과 응축 표현을 운명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다. 시는 생략과 압축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을 빌려 오히려 더 많이 더 오래 읽히고자 하는 모순된 갈래다. 시를 뜻하는 독일어 ‘디히퉁’(Dichtung)은 무엇인가를 새로 만드는 창조라는 뜻 말고도 길거나 복잡한 것을 간결하게 압축하거나 요약한다는 뜻을 지녔다. 

압축하거나 요약하기 위해서는 줄이는 일이 전제를 이룬다. 줄이는 일은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버려야만 줄어든다. 최소 언어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일은 경제 원칙일 뿐 아니라 시의 언어 원칙이기도 하다.2)

시를 만드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시상 전개나 표현에서 영향을 미치지 않거나 다른 효과와 영향을 마련하기 위해 어떤 단위나 성분의 말을 빼버리는 기법이 생략 또는 생략법이다. 이때 읽는이의 상상력에 의해 쉽게 보충될 수 있는 것이 가장 먼저 생략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는 장황한 구문을 피하고 간결한 압축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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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욱동,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2, 278쪽.

 

2) 생략 논의 점검

20세기 시인들 가운데서도 파운드, 엘리엇, 오든과 같은 이는 생략 기법을 주도적으로 활용했다. 뜻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 거의 모든 것을 생략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었다 한다. 각별히 에즈라 파운드는 시에서 가능한 한 모든 수사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했다. 그러다 보니 그이 시에서는 가장 압축된 형식인 ‘이름씨+이름씨’의 월 구조가 즐겨 나타났다. 적은 수의 낱말을 쓰면 쓸수록 그 시는 더욱 충만하게 의미를 충전하게 된다고 본 까닭이다.3) 알텐번드와 루이스 같은 이는 시의 수사적 기교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과장법, 다의성과 더불어 생략법을 들기도 했다.4)

우리시에서 ‘생략’ 문제를 다룬 논의는 드물다. 뜻밖에 두 편이 뜨일 따름이다. 앞자리에 이상섭의 글이 놓인다. 그이는 시의 언어 선택이 지닌 특성 가운데 하나가 고르고 버리는 생략적 구조라는 점을 먼저 전제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마련하는 ‘표면적 구조’와 ‘내포적 구조’ 사이 기대와 긴장감, 기대의 충족과 긴장감 해소의 반복이 이른바 ‘시적 쾌감’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시의 힘은 이러한 겉과 속, 표면 구조와 내포 구조의 역동에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시의 생략적 성격은 비논리적이라는 혐의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단절일 따름이다. 더 힘 있게 연결될 수 있는 정황 속에서 단절이다. 

시인 쪽에서 보자면 창작 역량이란 겉으로 드러난 언어의 표면적 생략 구조를 빌려 그 밑에 놓인 내포 구조의 맥락을 읽어내고 그 둘 사이 간극을 메우는 긴장된 역동을 효과적으로 마련하는 힘이다. 따라서 열등한 시는 대담하게 생략하지 못하고, 습관적인 생략에 많이 기댄다. 가짜 시는 거의 연결이 되지 않는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 곧 논리가 단절되는 게 아니라 불통하는 것, 어떤 전체 형상을 이루지 못한 것, 통일된 맥락을 갖지 못한 것5)이다. 

이러한 이상섭의 논의는 짧으나 시의 생략 현상을 구조론으로 풀이한 본격적이고도 요체를 얻은 글이다. 생략 현상을 시간적 연속 개념으로 보지 않고 공간적인 표층/내포, 위/아래의 역동으로 본 점은 앞으로 시의 생략과 의미론에서 많은 생각을 키워나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다. 

이어진 글이 오하근이다. 그이는 시에서 ‘어구’ 생략이 나타나는 수준을 낱말 수준의 것과 월 수준의 것, 곧 “어휘적 파격”과 “문장적 파격”으로 나누었다. 그런 뒤 김소월 시를 대상으로 월 수준에서 주성분이 생략된 본보기를 살폈다. 다룬 범위가 좁고 한 시인의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논의이나 시의 생략 현상을 작품에 구체적으로 따져든 것으로는 처음이라는 뜻을 지닌다.6)

 

이러한 두 편을 젖혀두고 나면 우리시를 향해 이루어진 생략 논의는 없어 보인다. 일상어나 표준어를 범위나 대상으로 삼은 ‘생략’ 현상 논의가 국어학에서 중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온 데 견주면 뜻밖이다. 그 점은 잘 다듬은 글을 목표로 삼은 문장론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곳에서 ‘생략’ 문제는 소홀하게 지나친다. 바른 문법적 완성이나 규범문 쓰기를 주요 목표로 하는 가운데서 어쩌면 변칙과 일탈로 여겨질 ‘생략’은 수사법 가운데 변화법의 한 가지로 짧게 올려 두거나 아예 논의 바깥으로 밀쳐놓는 게 대부분이다. 

생략이나 압축의 문제는 시창작 실제나 창작론 논의에서 드물게 이루어져 왔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시의 생략 현상을 두고 일반 규칙을 마련하거나 표준화된 생각을 만들기 힘들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시의 생략 현상은 더 크게 갈래의 됨됨이나 의미 영역과 폭넓게 맞물려 있다. 단일 논의로 다가서기 쉽지 않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가로 놓인 셈이다. 거기다 읽는이의 독서 행위와 해석 공간이라는, 정형적으로 실증하거나 일반화하기 어려운 상수도 가로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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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정일 엮음, 『시학사전』, 신원문화사, 1995, 470쪽. 
4)알텐번드·루이스(윤준 옮김), 『영미시의 길잡이』, 도서출판 동인, 2007, 58-59쪽. 
 
5)이상섭, 「시의 ‘생략적’ 구조에 대하여」, 『인문과학』 9집,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63, 105-106쪽.
6)오하근, 「김소월 시의 어구 생략」, 『한국언어문학』 33집, 한국언어문학회, 1994, 251-265쪽.

 

3) 생략의 방법과 유형

논의 방향과 관심이 다르다 하더라도 일상어의 생략 현상과 시의 생략 현상은 큰 틀에서 다를 바 없다. 다만 효과나 방법에서 시 특유의 기법 가능성이 훨씬 전면적이고 정교, 다채롭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어떤 경우 시에서는 일상어의 생략 현상을 완연히 뛰어넘은, 오히려 그것을 배신하는 절연의 파격을 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적 생략 현상에 대한 이해는 일상어의 생략 현상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둘 사이에 공통된 점은 간결성을 얻고자 한다는 데 있다. 듣는이/읽는이의 상상력을 자극할 뿐 아니라 응축되고 집약된 표현은 거기서부터 비롯한다. 그때 생략의 정도는 듣는이/읽는이가 문맥에 따라 알아챌 수 있을 정도/강도여야 한다.7) 이 점을 두고 김욱동은 빙산의 비유를 끌어 왔다. 물 위에 떠 있는 얼음을 갖고 물밑에 가라앉은 얼음을 생각하듯이 표면적으로 기술하거나 묘사한 말로써 생략한 부분을 미루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단위로 볼 때 생략은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말마디(음절) 수준과 낱말 수준, 그리고 월 수준의 생략이 그것이다.  

 

워라 워라 그리워라
님의 얼굴 그리워라
나라 나라 네 오나라 
네가 와야 나를 보지

- 「양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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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김욱동,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2, 279쪽. 

 

말마디 수준의 생략 현상을 멋지게 살리고 있는 한 본보기다. 김욱동이 가져다 쓴 것을 되옮겼다. “워라 워라”는 ‘그리워라 그리워라’에서 말마디 ‘그리‘를 줄인 꼴이다. “나라 나라”는 ‘오나라 오나라’에서 말마디 ‘오’를 줄인 꼴이다. 말마디를 더하는 가음법과는 거꾸로 간 약음법이다. 이렇듯 말마디 생략을 함으로써 두 걸음(2음보) 정형의 규칙 가락 안에서 님을 향한 그리움과 ‘나’의 마음을 강조할 수 있게 이끌었다.8) 말마디 생략은 토씨가 발달한 교착어인 우리말에서는 흔하다. 시를 쓸 때 자주 부딪치는 경우로는 주격 토씨 ‘은/는/이/가’나 목적격 토씨 ‘을/를’의 처리가 있다. 

낱말 생략의 전형적인 본보기는 그림씨나 어찌씨와 같이 부수적으로 들어서 있는 수식언, 곧 꾸밈말 경우다. 굳이 맥락 흐름에서 필요 없을 것까지 더해 놓은 군더더기는 바로잡을 일이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과 같은 보기가 그것이다. 하늘 푸름과 구름이 흰 사실은 누구나 아는 굳어진 표현일 따름이다. 언어 경제라는 쪽에서 볼 때 덧붙일 필요가 없다. 시에서 이러한 비기능적인 형용어법은 마땅히 생략 순위 첫머리에 놓인다. 

월 수준에서 나타나는 생략은 묻고 답하는 대화 연쇄체나 영탄 정황에서 흔하다. 앞선 물음에서 이미 언급된 요소를 줄이고자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병렬문에서 나타나는 주어 생략 또한 월 수준의 것에 든다. 

 

너는 어디 가니?
나는 도서관에 간다.

어디 가니?
도서관에. 

 

대화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월 생략을 보였다. 이미 주어진 앞 월의 주어와 술어를 다 쓸 필요가 없다. 주어 ‘나’와 ‘간다’는 말하는 상대가 알고 있는 구정보다. 따라서 ‘어디 가니’라는 말을 들을이는 ‘너는’이라는 주어가 생략된 것임을 알아챈다. 그리하여 다시 ‘도서관에’라는 답변을 준다. 이때 먼저 말할이는 그 말을 ‘나는 도서관에 간다’로 듣는다. 생략은 함축과 압축을 다 아우르는 현상이다. 일반 글에서는 그러한 생략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흔히 말줄임표 ‘……’를 쓴다. 생략 자리임을 밝히는 것이다. 시에서는 그럴 필요성이 확 준다.    

줄이는 이유를 중심으로 살피면 생략 현상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내용적 이유, 문체적 이유, 종교적 이유, 언어 경제에 의한 것, 대화 과정에 의한 생략과 같은 것이다. 더 묶으면 셋으로 모을 수 있다. 곧 언어 경제적인 이유, 내용적인 이유, 문체적인 이유로 생기는 생략이 그것이다. 시에서 생략이란 일상어에서 보이는 그러한 생략 이유나 유형과 함께한다. 그러면서도 일상어법의 생략과 다른 뚜렷한 특징은 듣는이/읽는이의 듣기/읽기를 지연시키는, 해석의 긴장과 울림을 더 크고 깊게 만들기 위한 미학적 고려나 장치에 있다. 

시에서 이루어지는 생략 현상을 보다 간명하게 유형화할 수는 없을까? 이를 위해서 표현을 중심으로 생략 현상이 표현된 언어 안쪽에서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으면 언어 바깥쪽, 곧 외적 상황이나 언어수행자의 세계상, 정신머리(아비투스)와 같은 데서 비롯한 것인가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 있다. 앞의 것을 언어 내적 콘텍스트 생략, 뒤의 것을 언어 외적 콘텍스트 생략이라 할 수 있다.9)

 곧 ‘언어 안쪽 생략’과 ‘언어 바깥쪽 생략’이다. 언어 안쪽 생략에서는 이미 앞에서 본바 말마디 생략에서 월 생략에 이르는 단위별 생략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언어 바깥쪽 생략의 경우 흔한 본보기는 주어 생략이다. 이것은 우리말이 의사소통 수행자인 상대방이 나와 어떤 관계냐에 따라 부름말이 바뀌는 것과 함께 일어나는 대표 현상이다. 상관어로서 우리말은 주어 ‘나’의 표출에 무게가 있는 게 아니다. 내 말을 듣는/읽는 언어 바깥 요소인 객체에 더 초점을 둔다. 따라서 우리말은 주어 생략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갖게 되었다. 시에서도 이 점은 즐겨 맞물린다.

일상어법에서는 영탄이나 명령, 호소 따위에서 생략 현상이 흔하다. 각별히 발화 주체의 감정 격화나 정서적 감동 표현, 절실한 호소나 고백 들, 말할이의 의지나 마음을 격렬하고 대담하게 담아내기 위한 뜻이다. 언어 바깥쪽 생략 가운데서는 이미 텍스트 유형에서 그러한 생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표지판, 광고문, 신문 표제와 같은 것이다. 정보 전달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설득 효과를 노리기 위한 생략 유형이다. 이러한 텍스트 유형의 생략은 설득적 효과의 확대라는 쪽에서 볼 때 시에서 노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작용 방향은 엄청나게 다르다. 명료한 설득적 정보 전달을 목표로 삼는 것과 상상적, 해석적 긴장과 뜻깊은 의미 형성이라는 목표가 그것이다.  

시에서 생략은 언어 경제적인 이유나 그것을 더 짜임새 있게 만들기 위한 문체적인 이유, 나아가 담론 주체의 의미 형성/작용과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수단이다. 시에서 생략을 압축과 따로 떼어 놓고 살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생략을 수사법의 한 가지나 텍스트 분석의 대상으로 다루는 일과 독자 수용 자리에서 의미론으로 따져드는 일은 차이가 있다. 그러한 압축적 생략은 비유의 문제까지 논의 안으로 끌어들인다. 정연홍의 작품을 다시 읽는 이 자리에서는 생각을 묶어두기 위해 의미론적 압축/함축과는 떨어져 될 수 있는 대로 수사적인 부분에 머물러 생략을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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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욱동은 이 노래 풀이에서 ‘그리’와 ‘오’라는 말을 생략해 씀으로써 4․4조 운율 조성과 단조로움을 깨트리는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김욱동,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2, 277쪽. 가락의 특성을 4․4조로 본 것은 잘못이다. 두걸음가락으로 보는 게 마땅하다. 「양류가」에서 보이는 생략법은 그러한 두 걸음 정형 가락에서 단조로움을 깨는 것 못지않게 말할이/들을이는 ‘워라/워라’와 ‘나라/나라’라는 생략에서 재미있는 말놀이(pun)를 지각한다. 말마디 생락이 말의 재미와 함축을 아울러 담아내는 복합 생략이 되는 셈이다. 
9)김성훈, 「텍스트에서의 생략현상에 대한 연구」, 『텍스트언어학 1』,(텍스트 연구회 엮음), 서광학술자료사, 1993, 393-394쪽. 

 

3. 「북천면」에서 생략하기

정연홍 시집 『코르크 왕국』을 받아 놓고, 그 가운데서도 첫 자리에 「북천면」을 올린다. 순전히 내 취향에서 비롯한 일이다. 경상도 한 작은 면, 아직 글쓴이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북천역이 있는 곳이다. 그렇건만 「북천면」이 먼저 마음을 끌었다. 우리 시대 좋은 시의 한 유형으로 내가 늘 권장하곤 하는 ‘장소시’였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 앞뒤에 있는 「진주역」과 「통영」을 같이 읽었다. 셋 가운데 처음 올린 「북천면」이 가장 나은 작품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을 따져 읽자니 나로서는 불만스러운 자리가 적지 않았다. 그 점은 ‘생략’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제 원문을 보인다. 

 

북천면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지나면 북천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학교 앞 자전거빵 아저씨 매일 빵구 때웠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야단맞았다
면사무소 건너 다방은 성업 중
오토바이 몰고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

통발 놓고 새벽을 건져 보면 참게가 가득했다
그해 동갑내기 남이가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서웠다
뒷동산에 묘가 많았다
우리는 묏등 베고 누워 구름을 세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땔감을 하였다
뒤란엔 겨우내 써야 할 땔감으로 꽉 찼다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하였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는 눈 쌓인 산에서 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 뿌려 놓으면
토끼와 꿩이 먹었다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이 되었다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 틀어 놓고 놀곤 했다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고 등교하였다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진주로 하동으로 마산으로 순천으로 흩어졌다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
토끼 눈엔 빨간 망개 열매가 열려 있었다10)

 

「북천면」은 묘사 자질이 잘 살아 있다. 시인의 경험 현실에 충실한 작품이다. 내포시인 정연홍과 시의 말할이 ‘나’는 일치한다. 월 짜임은 과거 서술형을 충분히 살려 쓰는 방식으로 다루었다. ‘했/었’다가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묘사와 서술이 알맞게 섞인, 전형적인 이야기시 꼴을 갖추었다. 읽는이는 경험 현실에 충실한 말할이가 어릴 적부터 청소년기까지 자라면서 겪었을 일과 사람, 사건을 간결하게 들려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에 놓인다. ‘이야기의 시간’(story time)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에 이르는 시기다. 여러 해, 꽤나 긴 시간 바탕을 지녔다. 그것을 짧은 ‘이야기 시간’(telling time)으로 담았다. 따라서 이야기시로서도 요약 제시가 두드러진다. 이상섭의 생각에 따른다면 시간상으로 초등학교/고교 입학까지 표면 구조와 내포 구조 사이 거리가 뚝 떨어져 있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표면 구조의 묘사 또한 경험 현실에 충실한 객관 묘사가 중심이다. 특별한 수사적 기교나 표현 가치를 얻기 위한 장치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표현성보다는 산문적 표현성이 두드러진다. 이 시가 읽는이를 잔잔한 추억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은 소년기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한다. 많은 소년기 이야기를 줄이고 탈락시킨 가운데 나름의 뜻있는 회상이라는 맥락을 느린 숨길로 조곤조곤 들어 앉혔다. 시는 객관적이건 주관적이건 구체적인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자기 정합성을 가지리라는 참을 이 시는 일깨워 준다. 

그런데 이 시가 이야기시의 틀을 갖춤으로서 갖게 된 약점은 줄글과 다르게 시가 얻고자 하는 생략의 즐거움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한 토막씩 그 점을 따지면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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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연홍, 코르크 왕국, 파란, 2020, 60-61쪽.

 

1) 언어 안쪽 생략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지나면 북천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학교 앞 자전거빵 아저씨 매일 빵구 때웠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야단맞았다
면사무소 건너 다방은 성업 중
오토바이 몰고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

 

첫 토막 첫 시줄이다.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지나면 북천초등학교”는 문법 성분을 다 살려 쓰면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지나면 북천초등학교가 있었다”라 쓸 수 있다. 풀이말을 줄임으로서 시의 말할이가 처음 자리한 시점과 자리를 도드라지게 이끈다. 그런데 ‘건너’와 ‘지나면’이라는 두 낱말이 문제다. 비록 뒤의 ‘지나다’가 조건형 ‘-면’을 가졌다 하더라도 앞의 ‘가다’와 비슷한 뜻을 품었다. ‘건너’ 가거나 ‘지나’ 가거나 거기가 거기다. 이럴 경우 한 곳을 줄이는 길로 가는 변화를 생각해 봄 직하다.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북천초등학교”라 적어 뒤의 ‘지나면’을 버리는 방식이다. 그렇게 이끌면 말결 흐름이 더 부드러워진다. ‘건너’와 ‘지나’ 두 움직씨를 다 밝혀 되풀이 써야만 ‘면사무소’와 ‘북천초등학교’가 서로 ‘지나’서 만나는 거리로 떨어져 있는 두 곳이라는 사실이 읽는이에게 지각되리라는 생각은 기우다. “면사무소 북천초등학교”로 줄임으로써 그 둘의 실재감이 오히려 더 살 수 있다. 이때 ‘지나면’의 생략은 언어 경제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둘째 시줄, “담임 선생님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에서는 ‘선생님’이라는 부름말이 걸린다. 그것을 ‘담임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로 줄일 수 있다. 이때 부름말 ‘선생님’을 빼는 줄임은 ‘담임’에 대한 존경심을 걷어내는 일이라 곤란하다며 낯빛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선생님’은 줄이는 게 좋으리라는 쪽에 선다. ‘선생/님’이라는 부름말이 아무에게나 붙이며 내돌릴 이름이 아님에도 오랜 세월 아무 곳이나 누구에게나 귀천 없이 붙여온, 잘못 쓴 이름이라는 원론적인 자리에 서서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시줄에서 ‘선생님’은 다음 시줄 “자전거빵 아저씨”의 ‘아저씨’와 맞물려 있다. ‘선생님’과 ‘아저씨’라는 부름말 둘 다 쓴 시줄 흐름보다는 어느 하나만 살리는 흐름이 훨씬 시의 결속성을 강하게 이끈다고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두 부름말 가운데 하나만 살린다면 뒤쪽 ‘아저씨’보다는 앞쪽 ‘선생님’을 줄이는 쪽이 바람직스럽다. 

셋째 줄,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야단맞았다”도 문제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로 풀이말 ‘야단맞았다’를 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야단맞았다’라는 풀이말을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어린 학생 시절 ‘가방 뺏’긴 경험을 가지거나, 그런 경험을 떠올릴 수 있을 이라면 누구든 쉬 알 수 있는 정황이기 때문이다. 이 시줄에 붙은 ‘야단맞기’는 설명적 군더더기인 셈이다.  

“면사무소 건너 다방은 성업 중”이라는 다섯째 시줄은 “건너 다방은 성업 중”이라 줄일 수 있다. 다방의 자리를 적시해 주는 ‘면사무소’를 버린 결과다. 그런데 이렇게 줄이면 ‘건너’의 주체가 달라진다. 면사무소가 아니라 ‘자전거빵’이 되는 셈이다. “면사무소 건너” 있는 ‘다방’과 ‘자전거빵’ 건너 있는 다방은 위치로 보아 다르다. 이러한 달라짐은 시인의 경험 현실로 볼 때는 크게 바뀐 거짓이다. 그러나 읽는이 자리에서는 ‘다방’이 “면사무소 건너” 있건, ‘자전거빵’ 건너 있건 차이가 없다. 오히려 맥락으로 보아 ‘면사무소’를 줄이는 흐름이 더 자연스럽다. 시인이 자신이 겪은 경험 현실의 참을 굳이 강변하고 싶다고 고집한다면 “면사무소 건너”를 그냥 둘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읽는이 쪽에서 겪을, 다소 산만해지는 지각 정황을 벗기는 힘들다. 권하고 싶지 않는 차선의 선택이다. 

첫 토막 마지막 시줄이다. “오토바이 몰고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에서도 생략이 가능하다. “오토바이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이 그것이다. 오토바이 모는 주체가 “누나뻘 가시나”이니 굳이 오토바이를 ‘가시나’가 몰고, 머리카락도 ‘가시나’의 것이 휘날린다는 중복 표현에 머물 필요가 없다. “오토바이 머리카락”이라, ‘몬다’는 상식 표현을 줄이는 방식을 따랐다. 만약 이러한 압축적 줄이기가 내키지 않는다면 월의 초점을 ‘머리카락’에 두지 말고 오히려 ‘오토바이’로 건너뛸 수 있다. 이 경우라면 아예 “머리카락 휘날리던”을 줄인 채, “오토바이 몰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로 손질이 가능하다. “머리카락 휘날리”는 상상이 사라진다고 해서 시의 흐름이 장애를 입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까지 짚은 바와 같이 「북천면」의 첫 토막을 줄인 상태로 보이면 아래와 같다.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북천초등학교
담임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학교 앞 자전거빵 아저씨는 빵구를 때웠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건너 다방은 성업 중
오토바이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

 

이러한 변형, 곧 낱말 생략이 중심이 된 손질 뒤에 새로 마련한 「북천면」의 첫 토막은 어떻게 읽히는가? 원시 첫 토막과 견주어 더 나빠진, 훼손된 상태로 읽히는가? 아니면 더 좋아진 상태의 것으로 읽히는가? 더 좋아진 상태의 손질이라 여겨지지는 않더라도 원시의 것과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가? 적어도 뒤의 두 물음에서 고개를 끄덕일 읽는이가 상대적으로 많다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시인이 발표한 「북천면」 원시의 첫 토막은 시의 생략이라는 눈길에서 보자면 단단한 짜임새를 갖춘 상태라 말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줄일 데가 적지 않은, 느슨하고 결속력이 떨어지는 상태의 시줄로 짜인 토막이다. 그리고 이 점이 작품 모두로 넓힐 수 있을 평가라면 문제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이렇듯 생략 변화를 중심으로 다듬은 다시 쓰기/읽기는 글 쓴 시인의 의도적 맥락에 충실한다는 조건을 만족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글쓴이의 의도나 텍스트의 맥락을 벗어나 더 자유롭게 생략을 끌어 들여 다시 쓰기/읽기를 한다면 큰 범위의 변형까지도 가능하다. 보기를 들어 아래와 같은 토막도 불가능하지 않다. 

 

보리밭 너머 자전거빵 북천초등학교
담임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서리하다 가방 뺏기고
면사무소 건너 다방
머리카락 휘날리던 오토바이 누나가 둘

 

지금의 시줄 전개보다 다시 한층 더 낱말을 버리고 발췌한 모습이다. 앞뒤 술어와 관계어들을 다 버리고 절연시켰다. 읽는이의 독서에 맡긴 맥락이 더욱 크게 넓혀졌다. 그러다 보니 시의 내포 구조는 시인의 본디 의도했던 맥락과는 크게 벗어난 쪽으로 열리게 된 셈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러한 변형이 무리한 일이며, 잘못된 뻘짓임을 스스로 웅변할 수 있을 표면 구조를 제시하도록 신중해야 한다. 

다음으로 둘째 토막을 살펴보자.

 

통발 놓고 새벽을 건져 보면 참게가 가득했다
그해 동갑내기 남이가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서웠다
뒷동산에 묘가 많았다
우리는 묏등 베고 누워 구름을 세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땔감을 하였다
뒤란엔 겨우내 써야 할 땔감으로 꽉 찼다

 

먼저 첫 시줄, “통발 놓고 새벽을 건져 보면 참게가 가득했다”다. 첫 토막 앞머리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지나면 북천초등학교”와 비슷한 월이다. ‘놓다’와 ‘보다’라는 두 움직씨를 빌려 하룻밤의 시간 이동을 드러내고자 했다. ‘건너’와 ‘지나면’을 빌려 공간 이동을 보여 주었던 첫 토막과 같은 맥락이다. 다소 느슨한 연결을 더 단단하게 묶을 수는 없을까. ‘새벽 통발을 건지면 참게가 그득했다’ 또는 ‘새벽 통발에는 참게가 그득했다’라는 생략 변형이 가능하다. 여기에 다른 물음이 놓일 수 있다. 원시에서는 건지는 객체가 ‘참게’가 아니라 ‘새벽’으로 전이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점을 살린다면 “참게 통발에는 새벽이 가득했다”와 같은 줄임도 가능하다. 

둘째 시줄 “그해 동갑내기 남이가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다른 생략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다. 이어진 셋째, 넷째, 다섯 째 시줄은 한 묶음으로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모두 “강에서 돌아오지” 못한 ‘남이’의 죽음 기억과 맞물린 일이기 때문이다. ‘강’의 기억이 ‘뒷동산’의 기억으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따라서 넷째 시줄 “뒷동산에 묘가 많았다”의 ‘많았다’는 풀이는 군더더기처럼 여겨진다. 이어진 시줄에서 ‘우리’가 “묏등 베고 누워 구름을” 셀 정도라면 적어도 한두 무덤으로는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 정황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뒷동산’의 묘가 많은가, 적은가라는 판단은 오히려 읽는이의 상상에 맡기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다. 

“묏등 베고 누워”에서도 손질이 필요하다. 묏등을 ‘베는’ 일은 누운 짓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줄일 수 있다. ‘묏등 베고’나 ‘묏등(에) 누워’가 그것이다. 그런데 ‘묏등-베다’와 ‘묏등-눕다’, 둘 가운데서 ‘묏등-베다’가 보다 표현 가치가 더한 것으로 여겨진다. 덜 상식적인 까닭이다. ‘묏등 베고’로 줄이는 게 바람직스럽다. 그리하여 줄인 앞 시줄 “뒷동산엔 묘가 많았다”에서 묘의 위치를 일러 주는 ‘뒷동산’을 살려 ‘뒷동산 묏등 베고’로 다듬을 수 있다. 따라서 넷째, 다섯째 시줄은 ‘우리는 뒷동산 묏등 베고 구름을 세었다’는 한 시줄로 모인다. 이때 주어 ‘우리는’이 받는 것은 ‘묏등 베다’와 ‘구름 세다’ 둘이다. 이 둘은 이어진 행위이나 서로 다른 짓이어서 한 시줄 안에 담기에는 넘친다. 따라서 다시 두 시줄로 나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뒷동산 묏등 베고 
구름을 세었다

 

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자니 시줄 흐름이 밋밋하다. 약간 변화가 필요하다. 주어 ‘우리는’의 위치를 바꾸는 일이다. 그러면서 ‘묏등 베고’에서 생략된 목적격 토씨 ‘을’을 기워 넣는 것이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리하여 셋째, 넷째, 다섯째 시줄은 

 

무서웠다
뒷동산 묏등을 베고
우리는 구름을 세었다

 

와 같이 줄이면서 가다듬는 과정을 거치는 쪽이 나을 듯싶다.  

여섯째, 일곱째 시줄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땔감을 하였다/뒤란엔 겨우내 써야 할 땔감으로 꽉 찼다”도 묶어서 보아야 한다. 여섯째는 무리가 없으나 일곱째 시줄에서 어찌씨 ‘꽉’은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대로 두면 읽는이에게 감정적 과장을 강요하는 표현이 되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거기다 ‘겨우내’ 뒤의 “써야 할”이라며 땔감의 용도를 풀이한 자리도 생략을 고려해 봄 직하다. 그렇다고 시줄이 잘 간추려지는 것은 아니다. ‘뒤란엔’을 그대로 처소격으로 두느냐 아니면 주격으로 바꾸느냐는 물음이 생길 수 있다. 그대로 둔다면 “땔감으로”는 “땔감이”로 바뀌는 것이 마땅하다. 주격 ‘뒤란은’으로 바꾼다면 그대로 두는 게 옳다. 어느 경우든 변형 가능성이 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땔감을 하였다
뒤란엔 겨우내 땔감으로 찼다

 

이렇게 생략 변형을 거쳤음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뒤로 되풀이하고 있는 ‘땔감’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는 더 과감한 생략을 꾀할 용기가 필요하다. 아예, “땔감을 하였다”는 풀이 부분을 버리는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가 더 남았다. ‘겨울방학엔’의 ‘겨울’과 이어진 ‘겨우내’의 시간 배경에서 보이는 되풀이다. 가능한 방향이라는 자리에서 보면 앞선 ‘겨울방학’의 ‘겨울’을 버리는 길이 보인다. 다른 경우는 ‘겨우내’를 줄이는 길이다. ‘겨울’을 버리면 여름방학 때도 땔감을 했다는 뜻을 담아 원래 시의 의도를 많이 벗어나게 만든다. 곤란한 일이다. 뒤의 ‘겨우내’를 지우면 ‘그’ 땔감은 봄여름가울겨울 없이 네 철 아무 때나 쓸 땔감이라는 속살로 뜻이 크게 달라져 버린다. 각별히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 주던 ‘그’ 땔감이라는 시인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게 이끌게 만든다. 거기다 ‘겨울방학’ 기간과 ‘겨우내’는 같은 겨울 기간이라도 뜻이 서로 다르다. ‘겨우내’는 ‘겨울방학’ 기간을 포함한 더 긴 시간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겨울방학엔’과 ‘겨우내’에서 보이는 시간 배경의 반복은 나름의 변화 있는 되풀이다. 그대로 두는 게 마땅하다.  

이제 줄이면서 축소 변형이 크게 이루어진 둘째 토막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 

 

참게 통발에는 새벽이 가득했다
그해 동갑내기 남이는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서웠다
뒷동산 묏등을 베고 
우리는 구름을 세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뒤란은 겨우내 땔감으로 찼다

 

이어서 셋째 토막이다.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하였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는 눈 쌓인 산에서 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 뿌려 놓으면
토끼와 꿩이 먹었다

 

첫 시줄은 생략이 필요한 것 같지 않다. 둘째 시줄에서는 ‘눈 쌓인 산’이라는 풀린 표현이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의 시줄에서 “눈이 온 날”이라는 풀이가 이미 이루어진 뒤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눈 산’이라 적어 ‘쌓인’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는 눈 산에서 거북이었다”에서 주격 토씨 ‘는’의 위치가 걸리는 까닭이다. 가락으로 볼 때 첫 시줄은 세걸음, 둘째 시줄은 네걸음이다. 그리고 셋째 시줄은 다시 세걸음. 

 

눈이 온 날/뒷산으로 몰려가/토끼몰이하였다
가슴이 콩닥거리던/잿빛 산토끼는/눈 쌓인 산에서/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망개 열매/뿌려 놓으면
토끼와/꿩이 먹었다

 

그런데 그런 흐름 가운데서 둘째 시줄 “눈 쌓인 산에서”를 ‘눈 산’으로 말마디를 줄이면 가락 흐름에 불균형이 생긴다. ‘눈 산에서’ 부분이 가빨라진다. 거기다 둘째 토막을 이루는 세 월은 모두 서술형으로 이루어졌다.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 주는 방식이다. 그러하니 둘째 시줄의 네걸음 가락을 안정되게 이끌 필요가 생긴다. 따라서 둘째 시줄의 두 번째 걸음(음보)의 토씨 ‘는’을 ‘눈 산에서’ 뒤로 옮겨 ‘눈 산에서는’이라 쓰면 걸음 마디에 균형이 잡힌다. 아울러 첫 시줄 첫 걸음 마디 “눈이 온 날”이라며 시인이 “에는”이라는 토씨를 붙이지 않아 가벼워진 걸음과도 맞물려 든다. 

셋째 시줄에서도 생략 변형이 필요해 보인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와 그것을 “뿌려 놓”는 두 행위를 다 풀어서 둘 필요가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토끼와 꿩이” 먹는 것은 “망개 열매”다. 따라서 “뿌려 놓으면”이라는 마디를 줄이고 바로 “토끼와 꿩이 먹었다”로 잇는 것이 더 단단한 표현으로 올라선다. 셋째 토막은 아래와 같이 생략 변형을 이루었다.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를 하였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 눈 산에서는 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는 
토끼와 꿩이 먹었다

 

이제 마지막 넷째 토막이다.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이 되었다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 틀어 놓고 놀곤 했다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고 등교하였다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진주로 하동으로 마산으로 순천으로 흩어졌다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
토끼 눈엔 빨간 망개 열매가 열려 있었다

 

첫 시줄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이 되었다”는 쉽게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으로 풀이말을 줄일 수 있다. 피동형 ‘되다’를 ‘되었고’와 ‘되었다’로, 두 차례나 되풀이하는 흐름보다 훨씬 간결하고, 은숙이와 나 사이 관계를 더 강조하는 말맛을 낸다. 이어진 둘째 시줄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 틀어 놓고 놀곤 했다”도 비슷하다. ‘밤늦도록 카세트 틀어 놓다’와 밤늦도록 ‘놀다’는 겹친 표현이다. 그것은 모두 ‘했다’와 맞물렸다. 따라서 이 시줄은 ‘카세트 틀고 놀았다’나 ‘카세트 틀곤 했다’와 같은 두 쪽으로 변형이 가능하다. 나로서는 ‘카세트 틀곤 했다’를 고르겠다. 

나아가 이미 생략되어 있는 ‘카세트 틀곤’의 목적격 토씨 ‘를’을 되살려 내는 쪽을 생각해 봄 직하다. 그렇게 하면 “카세트 틀어 놓고 놀곤 했다”에서 ‘카세트 틀어 놓곤 했다”로 압축하면서 흐트러진 시줄의 숨길을 다시 단정하게 잡을 수 있다. 자연스레 그 다음 이어진 시줄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의 주격 토씨 ‘가’와 ‘이’를 다 살린 월 흐름과도 맞물리는 이점까지 얻는 변화다.  

셋째 줄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는 손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은 다르다.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고 등교하였다/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진주로 하동으로 마산으로 순천으로 흩어졌다”는 두 시줄은 생략 변형을 빌려 더 압축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시줄은 세 월을 바탕에 지녔다. 곧 ①‘우리는 등교하였다.’ ②‘우리는 졸업반이 되었다,’ ③‘우리는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가 그것이다. 학교에 ‘등교하는’ ‘우리’와 ‘졸업반이 된’ ‘우리’ 사이를 나누어 시간 진행에 따른 간격을 둔 표현을 그대로 살리더라도 서술형 종결어미들을 연결형으로 바꾸면서 생략 변형을 한다면 훨씬 매끄러운 연결이 가능하다. 거기다 흩어져 가는 곳을 드러내는 토씨 ‘로/으로’도 쓰임을 줄여 시줄의 결속을 단단하게 이끌 필요가 있다.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다/“우리는 졸업반”이 되어/“진주로 하동 마산 순천으로 흩어졌다”와 같은 본보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다’가 뒤의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와 맞물리면서 시줄 흐름이 헐거운 채로 그대로 남는다. ‘모자를 쓰다’와 ‘졸업반이 되어’의 ‘쓰다’, ‘되어’가 그 원인이다. 손질이 또 필요하다. 둘 가운데 하나를 줄이는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쓰다”에서 “까만 교복에 모자”로 맺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략 변형이 시의 흐름을 느리게 만든다고 여겨진다면, 뒷부분에 슬쩍 작은 변화를 주어 다듬으면 해결된다. “흩어졌다/진주로 하동 마산 순천으로”가 그것이다. 따라서 넷째 토막의 넷째 다섯째 시줄 둘은 아래와 같이 세 시줄로 생략 변형을 이루며 응축된다. 변화가 크게 일어난 셈이다.  

 

까만 교복에 모자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흩어졌다 진주로 하동 마산 순천으로 

 

여섯째 시줄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는 따로 눈길에 드는 자리가 없다. 맨 끝 시줄 “토끼 눈엔 빨간 망개 열매가 열려 있었다”는 뒤의 “열려 있었다”가 눈을 잡는다. ‘있었다’는 정지태 표현은 이 시가 갖추고 있는 과거 회상이라는 얼개에 충실한 표현이다. 하지만 있다/없다라는 유무의 깨달음보다 ‘열리다’라는 움직씨로 맺는 게 훨씬 생동한다. 열매가 열렸으면, 그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굳이 ‘열리고’ 또 ‘있다’고 표현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열려 있었다”는 ‘열렸다’로 줄여야 한다. 그러나 ‘빨간 망개 열매가 열렸다’로 압축 변형을 하더라도 한 문제는 남아 있다. “빨간 망개”는 그대로 익은 ‘열매’를 뜻하는 까닭이다. ‘열매’를 줄이고 그냥 “빨간 망개”라 쓰는 것이 훨씬 단단한 표현으로 올라선다. 

마지막 두 시줄은 묶어서 보면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곧 입학한 ‘나’와 눈에 망개 열매가 열린 ‘토끼’ 사이 관계가 그것이다. 원시의 흐름으로 보자면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한 ‘나’와 ‘토끼’는 다른 둘이다.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한한 내가 그에 앞서 더 어렸을 적 토끼몰이했던, 앞 시줄에서 이미 제시된 추억의 시간에 젖는다는 뜻으로 읽힌다. 서로 다른 두 시간대에 걸쳐 있다. 그런데 이 둘을 원시의 뜻은 살리되 더 표현 가치가 드높은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다. 곧 주어를 ‘나’ 하나로 묶은 방식, 마지막 시줄의 ‘토끼’를 ‘나’의 비유로 쓰는 길이다. 그것은 ‘토끼’를 지우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내) “눈엔 빨간 망개가 열렸다”로 줄이면 토끼몰이하던 지난 시절 추억의 시간대도 함께 녹여내면서도 새 학교에 입학한 자신의 처지, 곧 몰이당하던 토끼와 같은 심정을 담아내는 표현으로 확장할 수 있다. 따라서 맨 마지막 토막은 아래와 같은 손질이 이루어진다.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를 틀곤 했다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
까만 교복에 모자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흩어졌다 진주로 하동 마산 순천으로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
눈엔 빨간 망개가 열렸다

 

이제 다시 생략, 축소 변형을 거친 「북천면」 전문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북천초등학교
담임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학교 앞 자전거빵 아저씨는 빵구를 때웠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건너 다방은 성업 중
오토바이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

참게 통발에는 새벽이 가득했다
그해 동갑내기 남이가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서웠다
뒷동산 묏등을 베고 
우리는 구름을 세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뒤란은 겨우내 땔감으로 찼다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를 하였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 눈 산에서는 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는 
토끼와 꿩이 먹었다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를 틀곤 했다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
까만 교복에 모자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흩어졌다 진주로 하동 마산 순천으로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
눈엔 빨간 망개가 열렸다

 

원시 「북천면」과 새로 줄여 쓴 「북천면」을 견주어 보자. 어떤가? 어느 것이 더 나은, 더 좋은 상태의 작품으로 여겨지는가? 어느 쪽이 더 모자라는 시로 여겨지는가? 그런데 이렇게 손질했다고 다 끝나지 않았다. 작품 모두를 한자리에 옮겨놓고 다시 훑으니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곳이 눈에 뜨인다. 시의 흐름을 떠맡고 있는 서술형 종결어미 ‘하다’의 처리 문제다.  

둘째 토막 처음과 둘째 시줄에서는 과거형 ‘했다’로 썼으나, 여섯째 시줄에서는 ‘하였다’를 올렸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땔감을 하였다”-물론 앞에서 줄여 쓰는 과정에서 ‘땔감을 하였다’를 버렸지만-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였다’는 같은 토막 처음과 둘째 시줄의 ‘가득했다’, ‘못했다’와 묶여 있는 표현이다. 이런 점은 다음 토막의 첫 시줄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를 하였다”의 ‘하였다’로 이어진다. ‘했다’와 ‘하였다’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것과 같이 ‘했다’로 다듬는 것이 시의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시줄의 다른 종결형, ‘무서웠다’, ‘세었다’, ‘찼다’의 단정적 목소리와 한결같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북천면」에서 ‘하다’의 과거형은 ‘했다’와 ‘하였다’ 둘 가운데 ‘했다’로 가지런하게 통일하는 것이 더 나은 길로 보인다.  

이제까지 생략 변형을 중심으로 시 「북천면」의 부분과 전체를 다 훑었다. 그런데 이러한 따지기는 ‘언어 안쪽 생략’의 경우다. 이제 나아가 ‘언어 바깥쪽 생략’, 곧 언어 외적 콘텍스트 생략 문제를 고려하면서 다시 한 번 훑을 필요가 있다. 

 

2) 언어 바깥쪽 생략

언어 바깥쪽 생략에 눈을 두면 두 곳이 눈에 든다. 첫째, 첫 토막 마지막 시줄이다. “오토바이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뻘 가시나가 둘”이다. 여기서 “누나뻘 가시나”는 이중 표현이다. 곧 “누나”와 “가시나”는 성별 뜻은 같으나 언어 바깥쪽 맥락에서 보면 서로 맞서는 부름말이다. ‘누나’는 그 대상에게 말을 건네거나 바라보는 말할이가 어린 사람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시나’는 말할이 눈길에서는 더 낮거나 어린 자리에 있는 여자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누나뻘 가시나”는 언어 바깥 맥락에서 볼 때 모순된 관계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이 가능한 것은 “오토바이 몰고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 들을 바라보는 말할이의,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도덕적 우월감은 자신이 더 지녔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태도에 있다. 다시 말해 “누나뻘 가시나”는 그 오토바이 모는 누나들의 행위를 마땅치 않은 것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로 초점화한 표현이다. 첫 토막의 말할이 자리가 초등학교 학생의 눈길 아래 있는 만큼 그러한 도덕적 판단 유무라는, 무거운 눈길을 걷어내는 것이 보다 중립적인 울림을 마련한다. ‘가시나’와 ‘누나’의 모순된 말씨를 ‘누나’ 하나로 줄이는 변형에 담긴 뜻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의 시점 화자인 ‘나’의 목소리뿐 아니라 어린 소년 시절을 추억하는 초점 화자의 눈길에서 보자면 “누나뻘 가시나가 둘”은 그냥 “누나가 둘”로 다듬는 것이 더 걸맞다. 

그리고 작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셋째 토막 둘째 시줄이 걸린다. “가슴이 콩닥거리던 잿빛 산토끼”는 시점에서 무리가 보이는 까닭이다. 이 시 「북천면」의 초점 화자는 어린 소년이다. 그이의 눈길과 입장에 충실한 표현으로 짜였다. 그런데 “가슴이 꽁닥거리던”은 소년의 시점이 아니다. 작가 전지 시점의 결과다. 말할이의 시점에 맞춘다면 “가슴이 콩닥거렸을”로, 관찰자의 눈을 취해야 한다. 물론 “가슴이 콩닥콩닥 잿빛 산토끼” 정도로, 보다 느슨하게 누그러뜨릴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앞에서 ‘가슴이 콩닥거렸을 잿빛 산토끼 눈 산에서는 거북이었다’로 바꾸어, 토씨 ‘는’을 ‘산토끼’에서 ‘산에서’ 뒤로 옮겨 붙인 변화를 다시 되돌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 다음 이어지는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는”의 ‘는’과 거리를 더 떨어뜨리면서 시줄의 흐름에 균형이 잡힌다. 

이제껏 다소 장황했지만 언어 안쪽 생략과 언어 바깥쪽 생략을 중심으로 손질을 제대로 마친 시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보리밭 건너 면사무소 북천초등학교
담임은 고시 준비로 사표를 썼다
학교 앞 자전거빵 아저씨는 빵구를 때웠다
서리하다 붙잡혀 가방 뺏기고 
건너 다방은 성업 중
오토바이 머리카락 휘날리던 누나가 둘

참게 통발에는 새벽이 가득했다
그해 동갑내기 남이가 강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서웠다
뒷동산 묏등을 베고 
우리는 구름을 세었다
겨울방학엔 하루 두 지게씩 
뒤란은 겨우내 땔감으로 찼다

눈이 온 날 뒷산으로 몰려가 토끼몰이를 했다
가슴이 콩닥콩닥 잿빛 산토끼는 눈 산에서 거북이었다
싸이나 넣은 망개 열매는 
토끼와 꿩이 먹었다

중학생이 되었고 은숙이와 한 반
친구들이랑 밤늦도록 카세트를 틀곤 했다
목소리가 굵어졌고 코털이 자랐다
까만 교복에 모자 
우리는 졸업반이 되어 
흩어졌다 진주로 하동 마산 순천으로 
나는 진주기계공업고에 입학했다
눈엔 빨간 망개가 열렸다

 

남은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코로크 왕국』에 올려진 「북천면」과 생략 변형을 중심으로 이 글에서 글쓴이가 되쓴 「북천면」, 둘을 놓고 어느 쪽 시가 더 나아 보이는가를 견주는 토론/토의가 그것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은 시로 여겨지는가? 둘을 놓은 그런 자리에서 다수의 읽는이들이 원시보다 되쓴 「북천면」이 더 나아보이거나 적어도 더 나쁜 상태는 아니라 여긴다면 원시 「북천면」은 표현성에서 필연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4토막 24줄 가운데서 6줄만 남기고 18줄에서 크작은 생략 변형의 손길이 이루어졌다. 시줄 숫자로만 보면 75%에서 손질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시인의 언어 수행력에서 아쉬운 구석이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빗겨가기 힘든 셈이다. 물론 이 시가 이야기 꼴이라는 점을 강조해 반복적이고 비압축적인 표현,  또는 다소 자유로운 시점과 같은 점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라 판단할 수 있다. 창작과 발표를 전적으로 책임진 시인의 의도와 텍스트의 축자적 의미에 충실하게 따라가려는 덕목이 더 필요하다고 변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에서는 하나의 완결 텍스트로서 생략 변형의 가능성, 손질할 자리가 너무 많이 열려 있다. 

둘째, ‘생략’이라는 문제로 새로 고쳐 읽기/쓰기를 거쳐 마련된 새 텍스트가 정연홍 시인의 개성적인 문체나 말씨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따져 보는 일이다. 물론 이런 일에는 『코르크 왕국』의 다른 시뿐 아니라, 첫 시집 세상을 박음질하다도 꼼꼼히 읽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을 빌려 따져본 결과 이 자리에서 새로 고쳐 읽은/쓴 새 텍스트「북천면」이 시인의 개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면 정연홍의 시작법은 더 단련이 필요하다는 평가에 이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새 「북천면」이 정연홍의 전체적인 시적 개성과 크게 벗어나, 그것을 무너뜨리는 정도로 여겨지는 판단에 이를 수도 있다. 그 경우라면 정연홍의 시 「북천면」을 애꿎게 다시 고쳐 읽고/쓴 나에게 잘못이 크다. 박태일 식의 개성을 다른 시인에게 강요하는 듯한 일인 까닭이다. 어느 경우든 짚어 두어야 할 일은 정연홍 시인의 문학 출발이 동화였다는 사실이다. 서사적 글짓기에서 서정적 글짓기로 옮겨온 특이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다. 그 점이 정연홍의 개성이며 특장이다. 정체성이다. 그 점이 존중되어야 할 국면인지 스스로 극복해야 할 국면인지는 모른다. 다른 사람인 내가 판단할 일도 아니다.  

다만 나는 정연홍 시인과 마찬가지로 시를 쓰는 시문학사회 내집단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내가 ‘생략’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읽어내는 「북천면」 시 읽기에서 적지 않은 손질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확인했다. 같은 시대 다른 읽는이로 넓혀 나가거나, 뒷시대 읽는이를 고려한다면 또 어떤 텍스트 변형 가능성, 유동성 속에 이 작품이 놓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자리에서 마무리 삼아 할 수 있는 물음은 자연스레 다음과 같이 모인다. 「북천면」은 시인이 최선을 다해, 최상의 상태에서 내놓은 시라 말하기 조심스러워지는 작품은 아닌가.   

 

4. 「아프리카 9」에서 생략하기

정연홍 시집 『코르크 왕국』에는 연작시 「아프리카」 14편이 실렸다. 그들이 시집 4부 가운데서 3부 한 토막을 이루었다. 비중 무거운 작품들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가 지닌 「북천면」과 같은 점은 앞에서 말했듯이 고유이름씨를 제목으로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아프리카라는 광활하고 넓은 땅. 「북천면」과는 견줄 수 없다. 그런 곳의 생태나 환경에 관한 지리적 상상력을 한껏 펼쳐 보이고자 한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거의 모두 그곳에서 살고 있는 짐승의 생태에 관한 관심으로 폭이 좁혀져 있다. 실제 경험 현실로서 아프리카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런 만큼 고유이름씨를 제목으로 올렸다는 점 말고는 「북천면」과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이 작품들 또한 ‘생략’이라는 눈길에서 작품 안팎을 살필 때는 「북천면」과 비슷한 자리에 함께 놓인다. 손에 집히는 대로 연작시 14편 가운데서 9를 골랐다. 

 

아프리카 9

 

누우가 새끼를 낳았다

오 분 후에 일어섰다
오 분 후에 달렸다

달려야 한다
달려야 한다

치타가 뒤에 있다
사자가 앞에 있다
하이에나가 옆에 있다

달리지 않으면 먹힌다

태어나자마자 
다섯 마리가 잡아먹혔다

한 마리는 아직 달리고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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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연홍, 코르크 왕국, 파란, 2020, 80쪽. 

 

모두 7토막 12줄로 이루어진 짧은 시다. 글감은 누우라는 짐승의 새끼들과 둘레 환경이다. 검색해 보니 아프리카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는, 우리의 황소 만한 짐승이다. 떼로 몰려다니나 본데 나는 본 기억이 없다. 한 작품이 텍스트 안쪽에서 읽는이의 상상력에 미룰 수 없어 굳이 검색 기능을 빌려야 한다면 먼저 그것을 모르고 살았던 나 같은 이의 무지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아무리 한 번도 겪지 못한 짐승이라 하더라도 텍스트 읽기를 빌려 머릿속에서 상상적 맥락, 곧 시의 얼개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시인의 소홀함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도 오랜 세월 시읽기와 시쓰기를 거듭해 온 나 같은 사람의 읽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점은 누우라는 짐승을 알고 있었건 그렇지 않았건 누우라는 짐승의 생태나 삶살이에 관한 묘사 자질이 시 속에 거의 보이지 않은 데서 말미암는다. 시줄 맥락이 사자와 하이에나 같은 맹수 틈새에서 약육강식을 겪고 있는 누우의 처지를 간명하게 보여 주는 설명적 서술에 치우쳐 있을 따름이다. 

이 시의 맥락을 줄글로 풀어 보이면 아래와 같은 다섯 개 바탕 월로 나눌 수 있다. ①누우가 새끼 여섯 마리를 낳았다. ②오 분 만에 일어서자마자 달려야 한다. ③왜냐하면 그를 잡아먹기 위해 노리고 있는 사자와 하이에나가 둘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④벌써 다섯 마리가 잡혀먹혔다. ⑤한 마리는 살아남기 위해 아직 달리고 있다. 아프리카 야생의 숲이나 초원에서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을 짐승의 약육강식이라는 비참한 현실을 일깨우고자 한 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뜻을 시라는 문학 관습으로 읽히도록 만드는 최소 장치는 시의 토막 나누기와 들쭉날쭉한 가락글, 거기다 낱말과 월 단위에서 시를 끌어 잡고 있는 반복법이다. 

그럼에도 읽는이 입장에서는 당장 한 물음이 머리를 맴돈다. 이러한 약육강식은 누우라는 한 짐승 종에만 일어나는 일인가? 대상 짐승이 꼭 누우여야 하는가? 이 시에서 누우를 들소로 바꾼다면, 기린으로 바꾼다면 시의 흐름이나 속뜻이 엄청나게 달라질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금방 드러난다. 대상 바꾸기가 가능하다는 답이 그것이다. “오 분 후”에 일어난다는 사실과 ‘다섯’ 마리가 잡혀먹혔다는 구체적이지만 별 구속력이 없는 수치로 이어진 자리 말고, 이 작품에서 꼭히 누우라는 짐승의 정황으로 내세워야 할 까닭은 흐릿하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 누우의 누우다운 생태나 상황에 관련한 맥락의 구체성이 떨어진다. 이 점은 아프리카를 포괄적이고도 거시적인 시각에서 다루고 있는 시인의 눈길에서 비롯했다고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 거듭하고 있는 ‘한다/한다’, ‘있다/있다’와 같은 단순 서술형의 월 반복과 ‘옆에/옆에’와 같은 낱말 반복이 걸린다. 이들은 일상어와 다른 즐거움을 주는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법은 문제를 드러낸다. 생략과 맞물리는 자리가 있을 경우에는 더 그렇다. 따라서 글쓴이로서는 이 시「아프리카 9」를 생략이라는 눈길 아래서 볼 때 금방 다음과 같이 고쳐 읽는다.  

 

아프리카 9

 

누우가 새끼를 낳았다

오 분 후에 일어섰다
오 분 후에 달렸다
달려야 한다

치타가 뒤에 
사자가 앞에 
하이에나가 옆에 

태어나자마자 
다섯 마리가 먹혔다

아직 달리고 있다 한 마리는
누우 누우

 

이렇게 고쳐 놓은 것과 원시를 견주면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꼴에서만도 모두 7토막 12줄의 시가 5토막 11줄로 줄어들었다. 

첫 토막은 달라짐이 없다. 둘째, 셋째 토막, 

 

오 분 후에 일어섰다
오 분 후에 달렸다

달려야 한다
달려야 한다

는, 

 

오 분 후에 일어섰다
오 분 후에 달렸다
달려야 한다

로 줄이고 토막까지 하나로 묶었다. 넷째 토막 “달려야 한다”의 두 차례 되풀이는 월 하나를 줄인 뒤, 앞의 토막으로 올려붙인 결과다. 시의 흐름이 압축되고 빨라졌다. 그리고 원시 다섯째 토막, 

 

치타가 뒤에 있다
사자가 앞에 있다
하이에나가 옆에 있다

 

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는 ‘있다’는 풀이말은 다 줄여도 될 것들이다.  

 

치타가 뒤에 
사자가 앞에 
하이에나가 옆에

 

가 훨씬 먹이사슬의 긴장된 환경을 잘 담아내는 되풀이로 보인다. ‘있다’는 말은 그러한 긴장을 다시 존재태로 정지시키는 몫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섯째 토막 “달리지 않으면 먹힌다”는 아예 생략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이어진 여섯째 토막에서 “태어나자마자/다섯 마리가 잡아먹혔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절은 읽는이가 떠올릴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리고 일곱째 토막, 

 

태어나자마자 
다섯 마리가 잡아먹혔다

에서는, ‘잡아먹혔다’의 앞 ‘잡아’를 줄이고 그냥 ‘먹혔다’로 쓰는 게 좋을 것이다. 모든 짐승의 먹이사냥은 잡혀서, 그 다음 먹히는 까닭이다. 앞의 ‘잡아’는 이미 전제된 일이다. 그리고 일곱째 토막, 

  

한 마리는 아직 달리고 있다

 

는, 그대로 두되 시 흐름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도치가 그것이다. 거기다 “누우 누우”와 같은 반복을 시줄 끝에 새로 더했다. 

 

아직 달리고 있다 한 마리는
누우 누우

 

가 그것이다. 원시 「아프리카 9」가 바탕에 깔고 있는 수사법은 반복이다. 그것을 더 적극적으로 살려 썼다. “누우 누우”로 되풀이함으로써 이 작품이 시라는 점을 웅변하는 가장 큰 터무니인 외형적 가락감을 더 살리는 쪽 변형을 따른 셈이다. 게다가 요행히 살아남아 달리고 있는 마지막 한 마리 누우에 읽는이의 눈길을 더 모을 수 있다. 

이렇게 고쳐 읽는 시와 원시를 두고 어느 것이 더 텍스트 결속성이나 완결성이라는 쪽에서 나은 상태의 것으로 여겨지는가? 읽는이들은 어느 쪽의 것을 더 좋은 시로 여기는가? 아니면 별다른 변화로 자각되지 않는 상태인가? 여러 과정과 토론이 필요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가지는 뚜렷하다. 원시 「아프리카 9」는 글쓴이가 줄이고 다듬은 보기와 같은 고쳐 읽기/쓰기의 대상으로 쉽게 나앉는 자리의 작품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원시가 지닌 변경가능성은 크다 할 수 있다. 이 점은 「아프리카 9」뿐 아니라 앞의 「북천면」도 마찬가지였다. 

화가라는 이가 자신이 내놓은 그림을 같은 화가가 쉽게 개칠해 손볼 수 있을 상태로 내놓는다면, 그 화가나 그가 내놓은 그림을 마냥 좋다고 칭찬만 할 수는 없다. 드높은 말놀이로서 시가 나아가고자 하는 가장 큰 덕목 가운데 하나가 변경불가능성, 반복불가능성 ‘반복불가능성’, ‘변경불가능’12)에 관해서는 이미 「좋은 시와 나쁜 시」에서 다루었다. 더 붙일 말은 그 글을 참조 바란다.

이라는 자리다. 다른 사람에 의한 고쳐 쓰기/읽기, 다른 시공간 안에서도 달라질 수 없을 최선의 표현 언어로 시를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그런 경지가 이를 수 없는 바람이라 하더라도 그 점은 언어를 빌린 창조적 활동으로서 시인이 맞싸워야 할 핵심 조건이다.

그런데 시인이라는 이가 자신의 작품을 동류 시인이 읽었을 때 쉽게 변경 가능한 유동 상태로 작품을 내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오로지 시의 표현력, 언어 수행력이 모자란 탓에다 미루고 말 일일까? 시적 역량의 문제로만 돌려놓고 말 일인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시는 무엇보다 수학 계산식과 같은 한 가지 답을 위한 계산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라는 문학 관습을 향한 개별 시인의 취향과 창작 목표, 쓰는 방법, 독자사회를 대하는 태도는 다 다르다. 따라서 모든 시가 문제가 아니라 늘 ‘어떤’ 시가 문제다. 나는 그 ‘어떤’ 문제를 언어 표현, 그 가운데서도 ‘생략’으로 짚어보면서 생략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둘 사이 관계를 중심으로 시의 짜임새에 초점을 두어 살폈을 따름이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다른 평가가 여러 길로 가능하다. 

정연홍 시인만 하더라도 문학사회에 얼굴을 내놓은 지가 20년을 넘었다. 신생 출판사에서 낸 의욕적인 시집 무리 가운데 한 권이 아닌가? 게다가 시집 풀이를 쓴 이병국,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라는 이가 뜻깊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곧 “정연홍 시인이 지닌 중층적 층위의 사유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부터 비롯”13)

되었다 했다. 나로서는 적어도 정연홍 시인의 시 「북천면」과 「아프리카 9」를 줄여 읽으면서 “중층적 층위의 사유”는 모르되 “냉철한 인식”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것이 시가 담은 ‘현실’을 향한 것이든 시의 가장 중요한 특장인 시어 자체로 향한 것이든. 비록 두 편에 그친 읽기임에도 정연홍의 시 둘은 ‘언어적’ ‘냉철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쉬운 일이다.  

글쓴이가 읽은, 정연홍의 두 편을 대상으로 삼은 시 고쳐 읽기/쓰기가 시인의 오랜 시적 개성과 시법, 글쓴이보다 젊은 세대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이 든 시인, 나 같은 이의 자의적인 딴죽 걸기라 내칠 수 있을까? 시에서 구체성과 생략이라는 표현 가치를 중시하는 특정 시인인 나 같은 이가 자기 취향이나 좁은 안목에 빠져서 읽은 자의적인 오독일 따름일까? 이에 대한 답이나 판단은 이 글을 읽을 이들의 독서 공간 안으로 멀찍이 밀어둔 채 더 기다려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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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박태일, 「좋은 시와 나쁜 시」, 『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 케포이북스, 2015, 41-42쪽.
13) 이병국,「착시의 세계와 부정의 사유」, 코르크왕국, 파란, 2020, 155쪽.

 

5. 덕목으로서 생략

사람은 살면서 숱한 일을 겪고 또 지나친다. 그 과정에서 끝없이 선택하고 선택당하면서 현실과 기억을 재구성, 배열한다.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진다. 어떤 일은 잊히고 어떤 일은 추억한다. 삶에서 생략이란 그런 일을 겪는 늘스런 방식이다. 생략하는 일은 한 쪽으로는 버리는 일이다. 그럼에도 삶의 욕구를 채우는 일은 생략할 수 없다. 먹고 자고 입고 싸고. 다만 덜 먹고 덜 자고 덜 입고 덜 쌀 따름이다. 더 먹고 더 자고 더 입고 더 쌀 따름이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지녀야 할 기본 욕구, 필요 생존 조건은 줄일 수 없다. 

그런데 삶의 경험과 행위를 언어 표현이라는 허구적 현실로 옮겨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어 표현은 의식/무의식적 욕망의 산물이다. 욕망의 조절은 오롯이 주체의 선택에 달렸다. 욕망의 생략은 삶의 방법, 목표와 맞물린 성찰적 선택이다. 그 가운데 언어 표현 속의 생략도 걸쳐 있다. 그 길은 욕구의 길과 다르게 글쓴이를 이끈다. 마땅하고 필수적인, 문법적 완성이 이루어진 자리라 여겨지는 곳이 오히려 버려야 할 것으로 나앉는다. 누구나 알고 떠올리는 군더더기를 덕지덕지 달고 이루어지는 창작 언어는 어쩌면 악덕이다. 삶의 욕구와 언어의 욕망은 걸음길이 서로 맞선다.  

그럼에도 모든 생략 행위는 뚜렷한 가치 개념이라는 점에서 한결같다. 삶의 선택과 의지라는 쪽에서 볼 때, 목표에 이르고 닿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줄이고 버려야 한다. 참아야 한다. 따라서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둘 것인가, 그 선택은 선택 주체의 도덕적, 이념적 조건이나 강도와 맞물려 있다. 어느 사람이나 괴로움은 줄이고 즐거움은 늘이고자 한다. 즐거운 일이라면 없는 것도 부풀리고 애써 떠벌린다. 가진 것 더 갖기 위해, 누리는 것 더 누리기 위해 힘과 기세를 뻐긴다. 즐거움을 향한 탐식은 끝이 없다. 괴로움은 그 건너에 놓였다. 그러니 삶의 참된 싸움은 오히려 줄이고 참는 괴로움에 있는 게 아닌가. 

모름지기 버릇든 자기 삶에서 우리는 한 가지라도 제대로 참고 버릴 수 있었던가. 생략이 현실 삶의 가치 개념이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르기 힘든 상태, 생략의 비장함. 참고 버리고 선택하고 집중하면서 삶은 더 그답게, 더 자주적으로 나아가는 게 아닌가. 어떤 선택은 하루 짧은 순간의 일로 그친다. 다른 선택은 한 번뿐일 삶의 모든 시기에 걸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줄이기 힘든 일, 버리기 어려운 일을 힘껏 이겨냄으로써 얻게 된 결과는 아니던가. 

한 편의 시 속에서는 줄여야 할, 버려야 할 데가 적지 않다. 한 권의 시집 속에서도 빼야 할 작품이 적지 않다. 하물며 한누리 삶이라는 커다란 책의 편집, 줄거리 각본 안에서랴. 얼마나 많은 일을, 생각과 느낌을 우리는 군더더기처럼 달고 사는가. 그럼에도 삶이든 시든 줄이는 일은 어렵고 괴롭다. 코르크 병 뚜껑 따듯이 쉬 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를 쓰는 전문가라면 시를 위해 더 많은 욕망은 생략해야 한다. 시인의 핵심 경험과 가치는 시쓰기다.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시인의 삶을 운전면허증 따듯 자격 얻는 일로 여기면 곤란하다. 새로 낸 가게 광고판 달고 회비 내며 상인회 회원이 되었다고 시인이 되고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이득을 보자고 그런 데에 삶을 걸고 하루살이처럼 떠돌다 사라질 것인가. 

정연홍 시집 『코르크 왕국』에는 서로 다른 경향의 작품이 뒤섞여 있다. 아마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 시도해 본 작품까지 묶었는지 모른다. 두 번째 시집이니 첫 시집에 넣지 못한 시도 손질해 넣었을 수 있다. 경향이 사뭇 다른 「북천면」과 「아프리카」 연작이 같은 시집에 한 자리씩 차지한 까닭이 거기서 비롯했을 것이다. 고유이름씨를 붙인 시들임에도 「북천면」 쪽은 더 늘이고 「아프리카」는 줄이는 쪽으로 생각을 키웠다면 시집이 어떻게 되었을까. 거꾸로 「북천면」 둘레 세 편을 다 버렸다면 시집의 풍취는 어떠했을까. 

문득 올려다 본 가을 하늘의 붉은 감처럼 삶이든 시든 익어 뚝 떨어지는 상태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일까? 저 질펀한 적멸. 확실한 점은 이제껏 버릇든 대로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건성건성 거듭하다가는 그런 경지에 이르기는 어려우리라는 참이다. 시 쓰는 이로서 문학에 삶을 걸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던 추억을 지닌 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그런 추억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앞자리는 시를 위해 더 버릴 즐거움과 시를 향해 더 늘여야 할 괴로움만이 남았는지 모른다. 가혹한 상태다. 그것이 노년, 나이를 향해 달리는 일. 노년은 그러한 가혹함과 맞서는 괴롭고 즐거운 나날을 뜻하는 게 아닌가.  

 

지난 2020년 9월 25일 새벽 나는 진주로 차를 몰았다. 정연홍 시인이 “철로엔 콜타를 냄새가 풍겼다/06시 10분 완행열차 타고 완사역 지나면/진주역/3년 내내 기차 통학하였다”(「진주」)로 시작하는 시의 밑그림이 된 도시다. 짐계 려증동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들은 이튿날이었다. 마산에서 평생교육원 시창작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남마산정류소로 내려가던 걸음이었다. 멀리 안동에서 한경희 교수가 보내준 손전화 전언으로 확인한 일이다. 집에 와 다시 살펴보니 내게도 한 학회 전자편지로 부음이 와 있었다. 의례적인 학회 연락이겠거니 하고 무심코 지워버린 것이다.  

진주 경상대병원에서 문상을 마치고 7시 10분 발인식이 끝날 때까지 병원 들머리를 서성거렸다. 발인차가 선생이 잠드실 진주영락공원으로 떠나는 뒷모습을 배웅해 드리고 싶었다. 짐계 선생과 살아 만났던 오로지 두 번의 만남. 지금은 이미 스물두 해가 지난 1998년 겨울, 경상대학교 선생의 제자 박사학위 논문 심사에 불러 주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차례 진주로 가 선생을 뵈었다. 종심을 끝내고 저녁밥을 마친 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고속버스정류소로 걸어가다 굽이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길 건너 저 쪽에서 선생은 내 뒷모습을 지키고 계셨다. 다시 한 번 선생에게 목례를 드리고 나는 돌아섰다. 

시인 정연홍은 여러 해 고향 하동 북천면에서 진주로 오가면서 학창 생활을 보냈다. 머지않아 나는 진주 영락공원, 짐계 선생의 묘소를 다녀올 생각이다. 발인 날 아침 10시부터 김해 월봉서원에서 특강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관까지 지키지 못한 채 마음 무겁게 돌아섰던 날이다. 다시 진주로 걸음할 그 날에도 북천면을 지나지 못할 것이다. 마산, 함안, 의령, 문산, 그리고 진주. 어느 날 문득 여수로, 목포로 기차를 타는 여정을 마련한다면 진주 지나 하동 북천면과 북천역을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도 시인이 통학하면서 오내렸을 옛 북천역이 아니라 새 북천역. 그런 경험을 오래도록 누리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북천면」과 「아프리카 9」를 읽으면서 진주로 오갔던 한 시인을 새로 만났다. 나보다 한참 젊은 50대. 그가 겪었던 추억의 고단함과 따뜻함 위에 내 마음이 가랑잎처럼 얹힌다. 정연홍 시 「북천면」과 「아프리카 9」는 시인의 언어 수행력이나 짜임새로 보면 뛰어난 작품이 아니다. ‘생략’이라는 잣대로 들여다 보자면 줄일 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북천면」은 좋은 작품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 같이 하동 북천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이의 마음 갈피에 한 시대, 장소 북천면이 마련했던 애틋한 소년기를 선물해 준 고마움 때문이다. 선물도 이런 시로 된 선물은 울림이 길다. 이미 사라진 하동 북천 북천역은 시인 정연홍으로 아름답고, 시인 정연홍은 시 「북천면」으로 오래 그윽하리라. 

<시인·경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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