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2) 마지막 잎새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2) 마지막 잎새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1.26 17:25
  • 업데이트 2023.01.27 16: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픽사베이]

마지막 잎새? 뜬금없이 왜 오 헨리의 단편소설 제목이 생각났을까?

‘맨돌’이가 낮에 비실비실 끙끙거리다 밤에는 주둥이를 가슴팍에 처박아 몸을 동그랗게 말은 채로 움직이지를 않는다. 생후 2개월 정도에 집에 데려왔는데, 한 달 정도 깡충깡충 잘 뛰어놀았다. 잡종에다 볼품도 없어 천대하던 선배가 버리듯 떠넘겨 떨떠름한 기분으로 떠안은 강아지다. 안으니 다소곳이 품속에 파고들어 ‘사람은 잘 따르겠구나’ 싶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으로 안고 오면서 냉정히 뿌리치지 못함에 후회도 되었지만, ‘이것도 인연이다’며 합리화했다.

“잎사귀 말이야. 담쟁이덩굴에 달린 거.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나도 가야 해.” 폐렴에 몸져누운 가난한 화가지망생 존시가 친구 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수는 존시의 마음을 다잡아주려 타박을 했다. “저 늙은 담쟁이덩굴 잎사귀와 네 병이 낫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니? 오늘 아침에 의사 선생님이 네가 곧 완전히 회복할 가능성이……그러니까……열에 아홉이래!” 존시가 들은 말은 ‘열에 하나’였다.

아가씨들이 사는 낡은 연립주택 1층에는 베어먼이라는 늙은 화가가 산다. 사십 년 동안 붓을 휘둘렀지만 예술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 실패한 화가이다. 늘 걸작을 그리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방 한구석에 세워진 이젤 위에는 이십 오 년 동안 걸작의 첫 획을 기다려온 텅 빈 캔버스가 놓여 있을 뿐이다. 정식 모델을 고용할 수 없는 가난한 화가들의 모델 구실로 겨우 생활을 부지하고 있다.

수는 베어먼에게 존시의 망상에 대해 털어놓고, 존시가 세상을 붙들고 있는 얼마 안 되는 힘마저 점점 약해지면, 사실상 잎사귀 하나만큼이나 가볍고 연약한 그녀가 잎사귀처럼 날아가 버릴까 봐 몹시 두렵다고 말했다.

“맙소사! 그 빌어먹을 담쟁이덩굴에서 이파리 좀 떨어진다고 죽겠다는 멍청한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어? 어째서 존시가 머릿속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내버려 두는 거지? 가엾은 존시 양.”

간밤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잠을 못 이루던 존시는 날이 밝자, 친구 수에게 차양을 걷어달라고 했다. 하나 남은 담쟁이덩굴 잎사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누운 채 한참을 그 잎사귀를 바라보던 존시는 다시 친구 수를 불렀다.

“나는 참 나쁜 애였어, 수.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내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알려주려고 저기에 마지막 잎새를 남겨 둔 거야. 죽기를 바라는 건 죄악이야. 이제 나한테 수프를 조금 가져다줘. 포도주를 약간 넣은 유유도. 그리고……아니다, 먼저 손거울부터 가져다줘.”

며칠이 지났다. 왕진 온 의사가 수에게 말했다. “이제는 위험에서 벗어났어요. 아가씨가 이겼습니다. 이제 영양 섭취에 신경 쓰면서 잘 돌봐 주기만 하면 돼요.”

그날 오후 베어먼이 폐렴으로 사망했다. 평생 그리려던 걸작을 비로소 완성하려 비바람을 온몸으로 뒤집어쓴 후과였다. 그 걸작은 캔버스 위가 아니라 담벼락에 그렸다.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새.

마당은 넓고 대문은 없다. 대문 자리에서 서재까지는 서른 세 걸음 거리다.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 안에서 보내는데, 누가 왔다가 가도 모른다. 마당가 감나무 밑에 개집이 있다. 처음엔 거기에 물그릇과 밥그릇을 놓고 묶어두려 했다. 누가 오면 짖어서 인기척이라도 느낄 요량이었다.

한데 한사코 뻗대며 짖어댄다. 어린 생명의 애처로운 울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재에는 대청마루가 없다. 마당보다 한 뼘 높이의 섬돌용 공간이 있고, 바로 서재 방문이다. 행여나 무서워서 그런가 싶어 종이박스를 서재 방문 옆에 두고 헌옷가지를 깔고 안아다 놓아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서 귀를 세워 들어봐도 희한하게도 조용하다. 짖지 않았다.

이렇게도 주인 혹은 사람을 따르는, 혹은 의지하는 맨돌이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짚불 마냥 사위어 가니, 묵직한 슬픔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동물병원에 가보려 해도 금요일 저녁이다. 왜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냥 잘 깡충댔는데, 도대체 이유가 뭔가? 말을 못하니 알 수가 없어 쭈그려있는 맨돌이를 쳐다만 보노라니, 답답함과 애처로움만 더할 뿐이다.

생각해 본다. 맨돌이와 나는 같은 생명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별반 다를 게 없다. 맨돌이는 나를, 인간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죽일 힘은 있되 살릴 능력은 없다. 3개월과 60년이 큰 차이가 남직 하지만, 우주적 시간으로는 같은 찰나일 뿐이다. 그리고 우주적 범위에서 죽음 혹은 ‘죽어있음’(생명 없음)이 자연스런 현상이고, ‘살아 있음’이나 생명은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한 어린 생명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에 이런 합리적인 앎은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침에 방문을 열고 가만 종이박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쭈그려 앉은 채로 가슴팍에서 고개를 빼내들고 쳐다본다. 눈빛에 반가움이 묻어있는 만큼 가슴은 더 미어진다. 내가 뭘 할 수 있는가? 베어먼 노인처럼 잎사귀라도 그려야 하나?

냉장고에서 아껴둔 소고기를 꺼내 구웠다. 그리고 잘게 썰어 내 국그릇에 물을 떠서 함께 가지고 갔다. 입에 넣어주니 받아먹는다. 그리고 비틀비틀, 하며 일어서려 안간힘을 쓴다. 볕바른 곳으로 안고 가 접시에 소고기 조각을 놓았다. 쭈그린 채로 한 입 힘겹게 먹고는 내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먹기를 반복한다. 강도는 약하지만 연신 꼬리도 친다.

토요일 내내 이러기를 여러 번했다. 오후가 되니 비틀거리지만 제법 제대로 걷는다. 참 이상한 노릇이다. 사료를 안 먹은 게 아니다. 잘 먹고 잘 놀다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생기를 잃었다. 하룻밤을 죽은 듯 보낸 후 고기를 먹게 되었다. 다음날 일요일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신 꼬리를 치며 깡충깡충 뛰며 내 손을 물고 핥는다. 오후에는 사료도 잘 먹는다. 이 무슨 조화인가.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인생에 대해 운명에 대해 얼마나 알까? 맨돌이가 자신의 운명을 모르듯, 인간인 내가 병인지 무엇인지 맨돌이의 사정을 모르듯,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어떤 신비적인 힘이나 초자연적인 조화가 작용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냥 세상이나 인생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일 뿐이다. 하여 온전한 해석이나 앎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바닷가 백사장에서 조가비 줍는’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상은 인생은 저 대양이다. 앎의 추구는 당연하다. 그러나 앎의 추구는 곧 앎의 한계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수많은 현상이 발생하고, 삶에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무지無知의 지知를 가진 사람은 안다. 하여 이들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포용하는 지적 용기를 가지고 있다.

잘못은 몰라서가 아니라, 알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을 백사장 한 줌 모래알에 불과한 지식으로 재단하는 데 있다. 허황된 욕심은 허황한 사기꾼들의 일용할 양식이다. 무당이나 도사나 예언가가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허황된 욕심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사기를 더 잘 당한다.

약 25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오늘날의 호모 사피엔스까지, 문명 시작된 B.C. 5천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무당이나 도사나 예언가란 이름의 존재가 있어왔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발전에 기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혹세무민의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그러나 본디 ‘의미’는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실패한 화가, 늙고 병든 초라한 베어먼이 목숨을 담보로 비바람을 무릅쓰고 담벼락에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새를 그렸다. 대수로운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윗길의 걸작을 또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또 베어먼은 진정한 화가이며, 삶을 위대하게 마무리했다는 평가에 반론할 근거는 어디 있는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