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 문학예술지 1
현대문학
이 주 홍
근세도 그랬지만 현대에 있어서도 이 지방에서 배출한 문학가는 그 수에 있어서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제는 문학사회에서도 그대로 행해지는 것이어서 활동 같은 활동을 하려면 자연 수도로 모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때문에 잡지 한 권 이 지방에서는 똑똑히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해방 후엔 주로 부산을 중심해서 서울에 본거를 둔 문학단체들의 지부들과 독자적인 집결로 혹은 문학 강좌나 강연회 예술제 등을 열고, 혹은 시화전 잡지로도 『문필文筆』, 『신조문학新潮文學』, 『문학』, 『현대문학』등, 그리고 수 삼의 동인지도 내고 했지만 대개는 창간호로써 끝내는 것이거나, 계속되었다 하더라도 불과 3, 4호를 넘기지 못한 실정에 별 두드러진 업적은 없는 터이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산지별로 개개인의 행적을 약기(略記)함으로 해서 이 고장 문학 분야 전체의 윤곽을 나타나게 해볼까 한다. 등장되는 사람이 이 지방 출신자들인 것은 물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 그리고 타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지방산의 작가이면 전부를 넣어서 이야기한다.
먼저 부산 지방인데, 처음엔 상업도시란 이름 그대로 문학하고는 완전히 인연을 멀리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문학의 기운이 성해지게 된 원인은 해방 후 교육의 보급에 따른 일반 지식 수준의 향상에도 있는 것이겠지만 보다 자극적 동기란 것은 아무래도 6·25 동란 때 피난민들과 함께 싸여 들어온 문화의 교류에 있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그들 피란문인들은 여기서 작품을 쓰고, 여기서 잡지를 발간하고 했다. 그래서 이 지방에 있는 작가 문학 지망자들에게도 적지 아니 고무했던 것이 사실이라 하겠다.
해방 전엔 몇 사람도 없었으나 타도와 타지에서 전입해 온 작가들을 합쳐서 지금은 50명 내외나 되는 현역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김말봉은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 「밀림」을 연재함으로부터 시작해 『찔레꽃』, 『화려한 지옥』, 『푸른 날개』, 『생명』, 『제비여 오렴』, 『찬란한 독배』 등 다수의 장편을 계속 발표해 여류작가로서의 기염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소설의 한 터전을 마련해 놓은 작가이고 「가족」, 「백련부인白蓮夫人」, 「화랑도」 등 좋은 희곡으로 해방 전부터 극작을 해오던 한로단은 부산에 와서는 주로 대학 연극사에 섹스피어극을 지도 연출하고, 미국의 근작 희곡들을 번역 소개하는 데 힘을 썼다.
1951년 시 「하수도의 생리』로 출발한 김장호는 『시작詩作』지의 동인인 고원, 이민영과 함께 삼인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을 낸 후 다시 단독 시집으로서 『파충류의 합창』을 내었고, 이민영은 그 뒤 주로 평론에 힘을 들였다.
불문학자 양병식도 평론에 주력해 불란서 현대 문단의 사정과 실존주의의 소개 등을 자주 했고, 시집에 『까치집』이 있는 박철석도 평론으로만 기울어져 특히 그 가운데서도 시 이론에 대한 것을 즐겨서 썼다. 신소야는 시집 『표정』을, 이숭자는 시집 『호심의 곡』을, 정영태는 『검은 태양의 계보』를, 홍원은 시집 『연鴌』을, 김성애는 시집 『차원에의 저항』과 소설집 『사랑의 영역』을, 오란옥은 시집 『부각된 광야』를, 박경사는 시집 『인간주소』를 각각 내었는데, 역시 시집으로 『청저집』과 수필집 『춘근집春芹集』을 낸 이영도는 매양 『현대문학』 등의 중앙지에 단아수일端雅秀逸한 작품을 발표해 부산 여류문학의 고성孤城을 혼자 지키고 있는 격으로 있다.
이밖에 고석규는 시론집 『초극超劇』을 들고 나와서 『시적 상상력』등 역작을 내어 신진 평론가로서의 촉망이 크더니 불행히 요절했고, 시를 쓰는 작가에 임하수가 「고향」, 「꽃」, 「헌사」 등의 건실한 작품으로 앞날의 촉망을 받고 있었으나 극도의 가난과 싸우다가 불행히 1960년 1월 1일 노변에서 비명횡사를 했고, 한찬식은 『자유문학』의 추천을 거치고, 김규태는 1958년 『문학예술』지에서 시 「밤의 극지」로 추천을 얻어, 그밖에 「기」, 「아직도 잊지 않을 것이다」 등의 작품이 있고, 성춘복은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쳐 계속 시작을 발표하고 있고, 구자운은 시 「균열」로 『현대문학』의 추천, 작품에 『청자수병』이 있고, 이밖에도 시로서는 『한국일보』에 시조 당선이 된 김민부, 「연이에게」를 쓴 박돈목, 지금은 소설에도 손을 대고 있지만, 시로서 「대화」 등이 있는 강파월, 「서귀포」를 쏜 송산운, 「기계」외 많은 작품이 있는 장세호, 평론도 겸하면서 「상흔」 등의 시작품이 있는 여신, 「창」을 쓴 원문갑, 『아메리카문학사』를 저술한 정무호, 그밖에도 시조 작품을 가끔 발표한 김어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정력적인 시인은 시집 『어안도』, 계속해서 수필집으로, 『사랑은 파도를 넘어』, 『달에게 묻는다』를 낸 안장현이 있다. 그는 가재家財를 털어서 문예지 『한글문예』를 몇 호 내기도 했는데 손동인, 김태홍과 함께 낸 삼인시집 『시문詩門』도 있다.
다음 수필로는 정신득, 김일립金一粒, 성수익, 유신 등이 있어서 참신한 글들을 보여 주고 했는데, 희곡에는 이순명이 『국제신보』에 「미인경연대회」를 했고, 신일순은 『국제신보』의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서 「늙은 기계」 발표되었다.
김관봉金寬峰은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발광」이 당선된 뒤로 수 편의 단편을 발표한 것이 있고, 이영우李英雨는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쳐 수삼 편 발표된 것이 있고, 이 밖에도 박승재朴承在, 홍삼출洪森出이 있어서 가끔 재기 있는 작품들을 쓰는데 오로지 중앙문단에서만 활약하고 있는 한무숙韓戊淑은 장편 『역사는 흐른다』를 들고 나와 단편집 『월훈月暈』과 1957년 『자유문학상』 수상 작품인 『감정이 있는 심연』 등을 내었다.
아동문학으로는 『학원』기타 수많은 문예지의 추천을 받아 줄곧 착실한 작품을 발표한 오경웅吳慶雄, 「월사금」, 「붉은 세타」 등 십수 편의 단편 동화를 발표한 안석순安石順, 『한국일보』에 동화 「슬픈 메아리」가 당선, 「고깃배가 오는 날」, 「사랑은 눈속에도 피고」, 「물새새끼」 등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한 성기정成基政, 시집 『부동항』외에 동시집 『하얀 칠판』을 낸 조유로曹有路는 『새벗』, 『동아일보』지 등에 항상 발랄한 작품을 싣고 있고, 작품집 『꼬마 십자군』을 낸 함처식咸處植은 보육학원을 경영하면서 주로 유년동화를 쓰고 있으며, 유대건柳大健은 동시집 『통통배』와 『두루미 선생』 등을 내었고, 이종택李鍾澤은 작품집으로 『새싹의 노래』, 『사과와 어머니』, 『바다와 어머니』 등을 내었고, 장완張完은 동시 외에 동화 「찰진 물」도 쓴 것이 있는데, 부산에 아동문학가의 단체로서는 ‘부산아동문학회’가 있었다.
다음은 마산, 사학자요 시인인 노산 이은상은 특히 시조의 현대문학에 크게 바탕을 닦은 선도자인데, 『삼국사화집』, 『고려사화집』, 『이충무공일대기』 같은 역사물의 저술 외에 시집, 수상집 등으로서, 『무상』, 『노산시조집』, 『노방초路傍草』, 『노변필담爐邊筆談』, 『노산문선』, 『민족의 혈맥』 등이 있다. 1925년에 쓴 「남풍이 분다」, 「붉은 정령蜻蛉」 이래, 인생의 무상을 노래하는 동양적 무상시인이라고들 일컫는데, 그의 시조작품 중에서도 「성불사」, 「오륙도」 등 널리 애송되고 있는 터다. 해방 전 『문장』지에서 시 「소연가召燕歌」로 추천 받은 김수돈金洙敦은 꾸준히 시작을 계속하면서 시집으로 『소연가』와 『우수의 황제』를 내었고, 정진업鄭鎭嶪은 역시 『문장』지에서 소설로서 추천을 받고, 시, 소설, 희곡, 아동문학 등, 수다한 작품이 있는데 시집으로 『풍장』, 『김해평야』가 있는 외에 김수돈과 아울러서 연극 활동에 끼치고 있는 공적이 크다.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원수는 지금도 널리 불리워지고 있는 「내 고향」이 열다섯 살 때에 써졌다는 점 만으로써도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은 동요, 동화, 소설, 동극 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일찌기 다재로운 솜씨로 『소년세계』, 『어린이세계』 등의 잡지도 편집하였는데, 작품집으르는 『숲속나라』, 『오월의 노래』, 『파란 구슬』, 『구름과 소녀』, 『민들레의 노래』, 『이원수 아동 문학독본』, 『한국 아동 문학전집-이원수편』, 『어린이의 나라』, 『봄잔치』, 『종달새』, 『초록 언덕을 가는 전차』, 『동명성왕』, 『한국 전래동화집』, 『비·커피·운치』, 『국민학교 글짓기본』, 『영국동화집』, 『북구동화집』, 『동키호테』, 『인어 아가씨』, 『아버지를 찾으려』, 『레미제라불』, 『손오공의 모험여행』 등등 20여 편이 있다. 조향趙鄕은 해방 전에는 주로 『일본시단』, 『시문학연구』등 시지에 서정시를 썼고, 해방 후는 시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 특히 모더니즘 운동의 선봉이던 후반기동인회를 조직하고 시작에 활약했다. 편저서에는 대학국어의 『현대문학』, 『고전문학수』가 있고, 이원섭은 시집 『향미사響尾蛇』를, 김세익金世翊은 『석류』, 조봉제趙鳳濟는 『가을의 묘비명』을 내었고,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이순섭李淳燮, 이제하李祭夏가 있고, 아동문학의 김원룡金元龍은 동요집을 낸 것이 있다. 이광래는 희곡 「석류나무집」, 「들국화」, 「나상」 등으로 출발, 연출 방면에 지대한 공을 쌓고 있는데, 1938년에 ‘민족예술무대’ 창립, 그 다음으로는 한국연극학회, 신극협의회 등에 중요 간부로 있었고, 평론으로 출발한 문덕수는 시론을 많이 써서 김춘수와 좋은 대조가 되었다. 김용호金容浩는 1935년 『신인문학』에 「첫 여름밤 귀를 기울이다」의 시로 등장해서 계속 발표, 시지 『맥』의 동인이기도 했고, 시집으로는 『향연』, 『해마다 피는 꽂』, 『남해찬가』, 『푸른 별』, 『날개』, 그밖에 『시문학입문』, 『연간시집』, 『현대시인선집』 등도 있는데, 1957년에는 아세아문학상을 탔다. 그리고, 시집 『구름과 장미』, 『늪』, 『기』, 『한국시형태론』, 『세계명시선』, 『현대시감상』 등을 낸 김춘수는 평론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활약이 있었다.
진주에는 시작품과 아울러서 영남예술제로 널리 알려져 있는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가 있다. 1951년에 문교부 예술과장을 지낸 바도 있는데, 시집에는 동기東騎 이경순李敬純, 조진대趙眞大와 같이 낸 『삼인집』 외에 『개폐교』가 있다. 그 후 해마다 문예지 『영문』을 내는 한편 『경남일보』의 주필로 언론계에도 참여를 했다. 이경순은 1928년 『조선일보』에 시 「백합화」로 출발을 해서 틈틈이 시작품을 발표하는데 시집으로는 『생명부』가 있다. 그 밖에 시인 노석奴石 박영환朴永煥과 고려송高麗松이란 펜네임으로 시를 쓰던 신예균申睿均이 있고, 『문예』지의 추천으로 나온 시와 평론의 이형기가 있고, 지금은 이미 고인으로 아동문학까지를 겹쳤던 김병호金炳昊가 있었다. 일영逸影 홍두표洪斗杓는 「달팽이」, 「봉화대」 등의 작품으로 출발해서 꾸준히 시작을 계속했는데, 1958년 제2회 부산시문화상을 받았다.
소설로서 조진대趙眞大는 설창수, 이경순과 함께 『삼인집』을 내었고, 김보성金寶成은 『자유문학』 등에, 김태인金泰仁은 『영문』에, 여류의 김수정(金守貞)은 역시 『영문』에 썼고, 평론의 정태용鄭泰鎔은 1937년 『조선일보』에 시 「분노」로 출발, 같은 해에 조연현과 함께 동인지 『아芽』, 시림詩林』을 발간하고, 나중엔 『예술부락』의 동인도 되었다. 1945년부터 평론으로 전환, 「문학의 대중성」, 「비평문학소고」, 「민족문학론」, 「실존주의론」, 「순수문학론」, 「한국작가론」 등의 노작들이 많다.(제1회 부산문필가협회상 수상) 이유식은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시인으론 허유許洧가 『현대문학』을 거쳐 나왔고, 최재호崔載浩는 시조집 『비취단장翡翠斷章』, 이명길李命吉도 두 권의 시조집을 내었고, 희곡으로는 박두석朴斗錫이 있는데, 1941년 『경응대학보』에 소설 「은어」의 발표를 위시해서, 희곡에 동명의 「은어」, 「김시민」, 「진양성」, 「동남풍」, 「운영의 사랑」 등이 있다. 그리고 동시 작가 최계락은 『동아일보』, 『새벗』지 등에 낭만성 짙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저서에는 『꽃씨』, 『어린이 세계문학』이 있다.
의령은 『현대문학』을 거친 이정호李正鎬가 있어서 과작이나 작품 발표를 하고 있고, 조순曺純은 『자유문학』지에 정열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 시집으로 『전후에 비는 내리는데』가 있고 「도민의 노래」가 당선되기도 했다.
함안엔 일찌기 양우정이 「산상」 등의 시작품으로 다분히 남국적인 정조를 풍기고 하더니 정치에 투족投足하고부터는 전연히 붓을 끊었고 조연현은 해방 후 무수한 평론을 써오면서 『문학개론』, 『한국현대작가론』, 『한국현대문학사』, 『문학과 사상』, 『휴일의 의장』, 『문학과 그 주변』, 『문학적 산보』 등을 내는 한편, 1954년 창간초부터 『현대문학』지의 주간으로 있어 작품 발표의 편의와 신인 양성의 면에 있어서 큰 공적을 남기고 있다.
밀양에는 『맥貘』의 동인으로서 시집 『무심無心』도 낸 일이 있던 시인 김대봉金大鳳 있었으나, 개업의로 있던 도중 발진지푸스에 전염되어 순직을 했고, 박재호朴載護는 1956년 『문학예술』지에 「작은 고동」으로 1959년 『사상계』지에 「꽃은 흔들린다」로 추천을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동인지로서 『석화石花』도 발간을 했고, 진주에 뒤이어서 예술축전도 수년래 열어오고 있다.
양산 출신으로서는 국어문법과 국문학사를 연구하는 외에 수필도 간혹 쓰는 박지홍朴智弘과 장시 『한알의 씨』를 써서 주목을 받은 일이 있는 정정화鄭井和가 있고, 최해군崔海君은 1962년에 『부산일보』의 3백만원현상장편에 당선, 「사랑의 폐허에서」를 연재했고 같은 해에 『동아일보』신춘문예에도 희곡 「종막」이 당선 발표가 되었다.
울산은 「도민의 노래」에 당선이 되기도 한 이동섭李東變이 시집 『강물에 띄우는 시』를 낸 것이 있고, 노래로 된 동시 「대한의 봄」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서덕출徐德出이 있었으나 진작 고인이 되고 있다. 그 밖에 시인으로는 시집 『병실』을 낸 여류의 김지향金芝鄕이 있고, 『현대문학』지의 편집을 맡고 있으면서 꾸준히 소설 작품을 발표하는 오영수吳永壽는 작품집으로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등을 내었는데, 아세아문학상도 받았다. 서민적인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소박한 무식층에 있는 인물들이 잘 등장하는 것으로 한 특색을 짓는다.
동래는 요산 김정한金廷漢이 1936년 『조선일보』에 단편 「사하촌」을 들고 나와 계속 「옥심이」, 「낙일홍」, 「추산당과 곁사람들」, 「기로」, 「항진기亢進記」 등으로 연타,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사더니, 해방 후에는 별로 작품을 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의 작품 경향은 이른바 동반자 문학적인 준열한 고발정신이 일관되고 있다. 작품집에 『낙일홍』이 있고, 1959년 제3회 부산시문화상을 받았다. 석천昔泉 오종식吳宗植은 언론인이면서도 허다한 수필을 발표, 수필집 『원숭이와 문명』, 『연북만필硯北浸筆』등을 내었고, 영문학자 정인섭은 ‘색동회’, ‘극예술연구소’ 등에 참가해서 활동했고, 저서에 『온돌야화溫突夜話』, 『대한현대시영역집』등이 있고, 소정素汀 서정봉徐定鳳은 동시집 『반딧불』외에 시집으로 『소정시초』가 있고, 의사로서 주로 그쪽 방면의 수필을 쓰는 박문하朴文夏는 이색적인 수필집 『배꼽없는 여인』을 낸 외에 단편 「홀어미」 등을 쓴 것이 있고, 최해갑은 「유월의 찬송」, 「동명이인」, 「신문광」 등으로 출발해서 수필을 쓰고 있다.
김해에는 『경향신문』에 「별과자」, 같은 해 『국제신보』에 「학교가는 날」의 동화가 당선된 이영찬李英讚이 있어서 건실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제1회 부산아동문학상 수상) 이상봉李相奉은 부대 주최의 ‘전국문예콩쿨’에 단편 「거미」로 당선, 「사냥」, 「계단」 등 재기발랄한 작품을 발표했고, 명랑소설가 천세욱千世旭은 「사노라면」, 「장미의 독」 등 장편도 있다.
창원엔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이 1934년 『시원詩苑』에 「목단」을 발표해 동양적인 인생관을 동양적인 시풍 속에 담았다 해서 특색 있는 시인으로 주목을 끌었는데 시집에 『청시靑柿』, 역시집에 『조선여류시가선朝鮮女流詩歌選』이 있고, 김소운金素雲은 1923년 『시대일보』에 시 「신조」를 발표함으로써 데뷔, 그 뒤 1930년을 전후해서 「눈」, 「호심湖心」 등을 계속 발표했다. 한편 한국의 민요, 동요, 신시 등을 일본에 소개한 것이 많은데, 일역시집으로는 『조선시집』, 『조선민요선집』, 『조선현대시집』, 『조선동요선』 등이 있고, 다시 일문으로 『목근통신木槿通信』, 수필집으로는 『마이동풍첩馬耳東風帖』, 『삼오당잡필三誤堂雜筆』이 있다. 그리고 해방 전에는 아동문예지 『목마木馬』를 발간한 일도 있다. 조성덕曹聖德은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단편 「제대병」이 당선 되었었고, 이해주李海珠는 시집 『위치』를, 조영서曺永端는 『문학예술』지의 시추천을 「종이」, 「과실은」 등을 발표, 정상구鄭相九는 평론과 아울러서 문예지 『문학』을 발간, 저서에 『한국현대문학주조사』와 미완의 소설 「진공의 계절」이 있고, 살매 김태홍은 처녀작 『창』으로 출발, 1942년 『시림詩林』지의 동인 손동인, 안장현과 같이 낸 삼인집 『시문』외에 시집으로 『땀과 장미와 시』, 『창』, 『조류潮流의 합창』 그리고 ‘작고시인선’으로 『당신을 위하여』가 있는데, 1960년 제4회 부산시문화상을 받았다.
다음은 충무. 동랑 류치진은 1931년 일본에서 돌아오던 길로 홍해성, 함대훈, 윤백남, 서항석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조직, 다음해인 1932년에는 희곡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을 써서 상연, 1935년에는 「소」, 「당나귀」, 「빈민가」 등을 발표, 다음은 「마의태자」, 「춘향전」, 「대추나무집」, 「자명고」, 「원술랑」, 「별」, 「자매」 등 30여 편의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연출도 30여 편을 맡아서 우리나라 신극의 길에 믿음직한 기수가 되었다. 1941년에 극단 ‘현대극장’을 창립 상연했고, 1947년에는 한국무대예술원을 창립 그 원장에, 1949년에는 중앙국립극장장, 연극학회 회장에, 현재에는 ‘한국드라마센터’를 주재하고 있어 이즈러져가는 신극의 중흥을 꾀하고 있다. 시인 청마 류치환은 1931년 『문예월간』에서 시 「정적」으로 출발, 1946년에 제1회 조선시인상, 1950년에 서울시문화상, 1958년에 자유문학상, 제1회 경북문화상, 1962년에 제1회 5월문예상을 받았는데, 시집으로는 해방 전에 낸 『청마시초』를 비롯해서 『생명의 서』, 『울릉도』, 『청령일기蜻蛉日記』, 『보병과 더불어』,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등 『제9시집』까지를 냈고, 수상집에 『예루살렘의 닭』, 『행복은 이렇게 오리이다』 등이 있다.
황산皇山 고두동高斗東은 향리에서 늘샘 탁상수卓相銖와 시조집 『참새』를 간행한 일도 있고, 1953년에는 시조지로 『시조연구』를 간행, 『동아일보』, 『국제신보』 등에 시조를 발표한 것이 있고, 탁상수는 진작부터 중앙지에도 시조를 발표하더니 해방 직전 배의 조난으로 해서 불의의 횡사를 했다. 장하보張何步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작품이 당선된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현대문학』지 등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고, 초정 김상옥金相沃은 1936년 김대봉 등과 함께 『맥』의 동인 활동을 해오다가, 1938년 『문장』지의 추천으로 등장했다. 시조, 현대시, 동시에 걸쳐서 많은 작품이 있는데, 시집으로는 『초적草笛』, 『고원故園의 곡』, 『이단의 시』, 『의상』, 『목석의 노래』 외에 동시집으로 『석류꽃』과 『꽃 속에 묻힌 집』이 있다.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친 천상병은 평론을 계속하고 있고, 한글 학자 석동石同 옥치정玉致精은 『한글의 원심성과 구심성」, 「언어 활동의 사회성」 등 한글의 평론을 위시하여, 『한글 가로쓰기 교본』을 낸 외에 수필로도 「모순 방담」, 「잠언 음미」 등이 있고 가끔 시조를 발표했다. 주평朱萍은 희곡으로 『현대문학』 추천을 받았는데, 수편의 희곡 작품이 있는 외에 아동극에 관한 작품집과 지도법서가 나와 있고, 여류로서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친 박경리는 『표류도』, 『김약국의 딸』, 『가을에 온 여인』 등의 장편이 있는데, 지금도 맹활약을 하고 있고 내성문학상과 1961년에는 현대문학상을 받은 바도 있다.
거제에는 구월久月 이석봉李錫鳳이 1930년 경부터 동요를 써 해방 후 동요집까지 낸 적이 있으나 지금은 병마와 싸우면서 완전히 붓을 꺾고 있고, 삼천포엔 『현대문학』 추천시인 박재삼朴在森이 있어서 시집 『춘향이 마음』을 냈다.
하동엔 『현대문학』의 추천을 거친 정공채鄭孔釆가 있어서 「석탄」 등 주목을 끄는 시작품이 있고, 이병주는 수 편의 평론 외에 장편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책으로 낸 것이 있다.
함양에는 여류시인 노영란盧映蘭이 있어서 동인지 『등불』에 참여 활동, 시집으로 『화려한 좌표』, 『흑진주』, 소설로 『마지막 향연』이 있고, 이석인李石人은 「무숙자」 등의 시로 유랑시인이 전전하더니 1961년 저 빈궁시인 임하수와 같은 형상으로 서울 노변에서 횡사를 했다.
끝으로 합천엔 손풍산孫楓山이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코 고는 소리」의 당선으로 데뷔, 「이슬비에 젖어서」 등 계속 발표하고, 「불칼」, 「거머리」 등 동요도 쓰곤 하더니 지금은 문학과 인연을 멀리하고 있고(제1회 경상남도문화상 수상), 「일요일」 등의 시로 최재열崔載烈도 수 편 발표하고, 허천許天도 10수 편 발표한 시작품이 있었는데, 수필집으로 『교하촌삽화橋下村揷話』가 있고 소설가 최인욱崔仁旭은 1939년, 『산신령山神靈』과 「월하취적도月下吹笛圖」로 문단에 등장, 「멧대지와 목탄」, 「개나리」, 「두 상인의 기록」, 「못난이」, 「동자상」, 「속물」 등을 계속 발표하고, 장편으로도 「행복은 슬픔인가」, 「낭만의 조락」, 「슬픈 생존자」, 「지옥왕래」 등이 있는데, 저서로는 단편집 『저류底流』, 장편으로 『초적草笛』 등이 있다.
같은 해인사 출신 작가로 최인욱보다 앞서 나온 허민許民에 있어서 『매일신보』신춘문예에 「구룡산九龍山」이 당선, 『문장』지에도 『어금도魚琴圖』 같은 것을 발표해, 당시의 문단에서 촉망을 받더니 30전에 병으로 요절을 했고, 『문예』지의 추천을 거쳐 시작을 계속하고, 안장현, 김태홍金泰洪과 함께 3인집 『시문詩門』을 내던 손동인孫東仁은 나중에 소설과 아동문학으로 전환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데 장편동화 「꽃수레」, 「에쓰의 일기」 같은 것은 특히 힘을 들인 작품이었다. 저서에는 동화집 『병아리 삼형제』, 『꽃수레』가 있는데 이밖에 수필집도 한 책을 내고 있다.(제2회 부산아동문학상 수상) 이주홍李周洪은 1922년 『신소년』지에 동화 『뱀새끼의 무도』, 1929년 『여성지우女性之友』지에 단편 『결혼 전날』을 발표함으로 해서 출발, 아동문예지 『신소년』을 편집하면서 『조선문학』지에 「여운」, 「완구상」, 「제과공장」, 「한 사람의 관객」 등을, 『중앙시보中央時報』지에 장편 「화원」을, 『사해공론』지에 장편「야화夜花」를, 『비판』에 중편 「동연冬燕」, 기타 『풍림』에 「하이네의 아내」, 「제수弟嫂」 등, 희곡에 「여명」, 씨나리오에 「청춘」, 「전원 회상곡」 등외 『시학』지에 시 「누란집累卵集」, 「사도死都의 노래」 등 그밖에 많은 동요, 동극, 동화, 소년소설 등을 쓰고 『풍림』, 『음악과시』, 『신세기』 등 잡지 편집도 하다가, 해방 후엔 학생 신운동에 치중, 희곡, 「진리의 뜰」, 「집」. 「대차待車」, 「청춘기」, 「탈선 춘향전」, 「낙성落城의 달」, 「아버지는 사람이 저래」, 「나비의 풍속」, 「성웅 이순신」, 「구원의 곡」, 「임이 부르신다면」, 「꾀꼬리 오는 집」, 「춘향전」, 「잃어버린 막간」, 「신부추방新婦追放」, 「호반의 집」 20여 편 내외를 창작, 이 중에서 「성웅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연이 되었고, 저서로는 해방 직후에 쓴 『중등국사』를 위시해서 작품집으로 『못난 돼지』, 『탈선 춘향전』, 『조춘(早春)』, 『예술과 인생』, 『요전수搖錢樹』, 『아름다운 고향』, 『피리 부는 소년』, 『이순신 장군』, 『비오는 들창』, 『후라이 대감의 모험』, 『외로운 짬보』, 『톡톡할아버지』, 『이주홍 아동문학독본』, 『한국아동문학전집 삼인편』, 『수호지』, 『조개껍질과의 대화』와 『학생과 생활』, 『한국풍류소담韓國風流笑譚』, 『춘향전』 등이 있고 중편 『풍마風魔』, 『가족』외 최근에 끝난 장편으로는 『사명당』, 현재 연재 중에 있는 장편소설로는 『국제신보』에 「부나비」, 『새벗』에 「어사 박문수」가 있다.(제1회 부산시문화상, 제1회 경상남도문화상 수상)
각부문에 걸쳐서 이밖에도 빠진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자료를 얻는 대로 다음 중판 때 보정하려 하며, 이 위에 쓴 작가의 배열은 순서가 없는 것임을 덧붙여 말해 둔다.
<소설가·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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