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화된 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역사는 그저 이름 없이 살다 역사에서 사라진,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강연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체계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의 체계적인 노력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노암 촘스키/1993.2.18.편지-
우리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린다. 그러나 역사는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공헌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발전했다. 역사의 주역은 무명인이다. 생전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재능과 시대운(時代運)이 맞아떨어진 복권당첨자일 뿐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는 않다. 물론 악인도 역사에 이름 남긴 주역인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류에 부정적 유산을 남긴 역사적 인물들은 논의에서 제외하자.
어쩌다가 사후에 평가를 받는 인물들도 있다. 에드거 앨런 포(1809~1849)는 일생 생활고에 시달렸고, 절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등 40년 인생을 불우하게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리소설의 시초라 불리는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을 쓴 추리 소설가로, <검은 고양이> 등 공포 소설을 쓴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영미권에서는 순수문학 작가 혹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갈가마귀(The Raven)>에 나오는 "Quoth the raven", "Nevermore" 등의 시구詩句는 미국의 유치원생들이 알 정도라고 한다. <진달래꽃>의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쯤 된다고 할까. 물론 소월도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해 살다 뇌일혈로 32세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검은 고양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덕분이다. 포의 사후死後, 보들레르가 포의 글을 우연히 발견하고,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전집을 출판했다. 이 전집이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은 1990년 8,250만 달러(2020년 6월 현재 환율로 약 1,003억)에 팔렸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고흐는 생전에 <붉은 포도밭>이란 단 한 점의 작품만 400프랑에 팔았을 뿐이다.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들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생활비는 전적으로 동생 테오에게 의지했다. 가난과 고독의 삶을 살다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총알은 심장을 비껴갔지만,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사망했다.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람들도 내 그림이 거기에 사용한 물감보다 내 인생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고흐는 이처럼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천재성은 가난이란 물줄기의 고랑이 된다. 가난은 고독을 부른다. 이 ‘가난한 고독’은 확신까지 삼켜버리고 목숨을 갉아먹는 게 사람살이의 이치이다.
역사의 주역은 무명인이다. 이 무명인들의 이름 남기지 않은 헌신으로 유명인들을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게 한다. 사후 이름을 찾은 위인들도 흔적도 없는 무명인의 삶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사후 인정으로 무덤에서 세로토닌(행복 호르몬)이 분비돼, 포나 소월이나 고흐가 행복한 저승생활을 누리게 되는가.
우리 조상들은 참 현실적이고 현명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해골이 세로토닌을 분비할 수 없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고위 관료가 된다는 의미이다. 곧 출세하라는 말이다. 나아가 이 출세는 후손에게까지 광영이다. 후손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도,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속담의 현대판은 ‘호랑이는 죽어서 값비싼 호피를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거부巨富를 남긴다’일 것이다.
헌신적인 무명인은 말이 없다. 하여 울림도 없다. 대체로 지식인들은 체제순응적이고 출세지향적이다. 세상의 정의와 부정의는 관심 사항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물려줄 부의 획득에만 진력한다. 이러한 삶이 남보다 똑똑한 자신들의 권리이며, 세상살이의 이치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정의와 공정의 요구를 약자나 루저(패배자)의 넋두리쯤으로 치부한다. 4대강 사업에 앞장 선 그 수많은 강단 교수, 전문가, 관료 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틀리지 않음에 희희낙락해 할 것이다.
흔히들 “네가 그런(정의롭)다고 세상이 바뀌나?”고 한다. 맞다.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점을 잊은 단견이다. 한 개인의 정의로움으로 정의의 세상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그만큼 세상의 타락은 막아준다. 그 개인의 노력마저 거세된다면, 추락하는 삶의 조건 정말 날개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정도로나마 정의가 숨 쉴 수 있는 것은 그 개인의 노력이 끊임없이 작동해 왔고, 작동하는 덕분이다.
역사 발전에서 ‘무명인의 헌신’을 알아채는 지식인은 드물다. 그들에게 부채감을 가지는 지식인은 더 드물다. 그 ‘더 드문 지식인’을 우리는 거인이라 칭한다. 고만고만한 지식인들은 다들 ‘제 잘난 맛’에 살고, 자신의 전공보다 곡학아세에 더 식견이 높다.
노암 촘스키(1928~)는 “미국의 양심”으로 불린다. 32세에 MIT대학의 정교수, 37세에 석좌교수, 47세에 ‘인스티튜트 프로페서’가 되었다. 인스티튜트 프로페서(Institute Professor)란, 하나의 독립된 학문기관에 상응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는 70여 권의 저서와 1천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시카코 트리뷴>은 촘스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여덟 번째의 인물”로 묘사했으며, <뉴욕 타임스>는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으로 일컬었다.
촘스키는 ‘실천적인 지식인’의 살아있는 표상이다. 변형생성문법을 만들어 언어학에 혁명을 일으킨 언어학자이다. 그러나 언어학자로 머물지 않고, 세상의 왜곡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 있다. 온갖 편견과 음모와 거짓으로 얼룩진, 미국과 세계의 주류 지식인 사회와 지배 권력의 심장을 후벼대는 비판을 가한다.

“빌어먹을 촘스키”란 비난도 많이 받는다. 촘스키의 비판은 대개 자신들의 치부를 들춰내기 때문이다. 비난자들의 대부분은 타락한 권력의 주류이거나 그들에 기생하여 출세한, 출세하려는 먹물(지식인)이다. 우리 사회로 범위를 좁히면 재벌들, 교수사회, 언론계, 고위 관료들, 법조인들, 특히 말석에서 칼 휘두르며 세상 최고인 양 주제 파악 못하는 일부 검사들과 그에 발맞추는 판사들이다. 그러니 촘스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이 촘스키의 모든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토대로 한다. 하여 촘스키는 비판을 하는데, 비판받는 자는 비난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촘스키는 1966년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
촘스키는 57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지식인의 사명에 성실히 복무하고 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