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씩 우울하다. 더럭 우울해진다. 삶의 조건은 변함이 없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조건은 바뀐 게 없다. 다만, 차이라면 그때는 길을 몰랐고, 지금은 알 뿐이다. 그리고 우울한 감정의 나머지는 머릿속이 상쾌해짐이다.
산은 높고 험하다. 그때는 산을 오르며 거칠 것 없이 용기백배했다. 생채기 좀 나더라도 이 산을 오르면, ‘정복’일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정상에 서는 하나의 성취로 구름을 탈 수 있을 거라는 환상에서였을까? 그러나 막상 산에 오르니, 눈앞에 더 높은 산이 버티고, 산 너머에는 또 산이다.
짐은 가볍지 않고, 해는 서산과 서너 발 허공에 있다. 길을 재촉해야 하나, 그만 쉬어야 하나? 그러나 이런 생각의 갈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애당초 길을 가는 사람에게 쉼이란 없기 때문이다. 쉼이란 한 걸음 더 가기 위해 숨 고름의 의미만 있다. 그러므로 쉼도 걸음의 한 부분이다. 더구나 쉼은 일시적 편안함은 주지만,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다. 즐거움은 오로지 발걸음을 내디디며 흘리는 땀만이 가져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걸었다. 그때는 이 걸음에는 끝이 있고 완성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모퉁이를 돌면 더 먼 길로 이어졌고, 산외산(山外山)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도 먼 길 탓하지 않고, 걸음 느림만 탓했다. 하여 부지런을 떨며 내쳐 걸었다. 그러나 걸음을 시작한 곳까지는 돌아볼 수 있으나, 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지칠 만도 하다.
그래도 걷는다. ‘아하 체험’(aha experience)을 위해선 좌절의 경험이 필요하다. 길이란 본시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선험적일 수 없다. 시행착오를 전제한다. 곧, 이걸 깨닫기 위해서는 ‘끝이 있다’고 내닫는 젊을 때의 만용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님을 알고 무력감에 주저앉음도 필요하다. 주저앉아 그렇게 서서히 스러져버림이 오히려 ‘인간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성으로 비관적이라도, 의지로 낙관하는 사람’은 일어나 다시 걷는다. 끝에 도달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은 어차피 길을 가는 동물이고, 그 길에서 쓰러져 사라짐이 인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시멜로 실험’이라 일컫는, 교육학과 심리학 분야의 고전적 실험이 있다. 어린아이에게 마시멜로 1개를 주고 15분 동안 참고 먹지 않으면 2개를 주기로 하고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먹지 않고 참아서 마시멜로를 2개 받은 아이들이 이후에 자라서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SAT(대학진학적성검사) 성적이나 학업 성취도 측면에서 더 우월한 결과를 보였다고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실험으로 자주 인용된다. “자제력(self control)은 매우 어린 나이에 형성되며, 이후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비판도 많다. 다른 연구에서는 “첫 번째 마시멜로를 빨리 먹은 아이들 중 일부는 참을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돌아오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연구원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외 가정환경 등에 따라 실험 결과는 많이 달라졌다.
어쨌건, 자제력이나 인내심이 성공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맞다. 맞긴 맞는데 영 말맛이 찜찜하다. 왜냐면, 자제력이나 인내심이란 단어는 가치중립적인 말이 아니다. 이미 ‘좋은 자질, 바람직한 성품’이란 가치를 품고 있다. 좋은 자질을 가진, 바람직한 성품인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건 당연한 말이다. 하여 마시멜로 실험에 관한 해석은 단순히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미래 중독’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역시 언어 분석을 하면, 실체가 없는 말이다. 우선 행복이 지시하는 개념이 매우 불분명하다. 더구나 내일은 없다. 무한히 반복하는 오늘만 있을 뿐이다. 희생이란 단어도 결코 행복과 무관한 의미가 아니다. 놀러 다니기보다는 오늘 힘써 땀 흘리는 게 더 즐거운 경우가 많다. 이땐 희생이 아니라, 행복의 누림에 속한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란 말이 『논어』「옹야편」에 나온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에서 목적어인 ‘그것’(之)이 무엇일까? 설명이 없다.
『논어집주』에 따르면, 그것을 도道로 해석한다. 하여 “안다는 것은 도가 있음을 아는 것이요, 좋아한다는 것은 좋아하되 아직 얻지 못한 것이요, 즐거워한다는 것은 얻음이 있어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풀이한다. 배움의 경지를 세 단계로 나눠 설명한 것이다. 동의하지 못한다. 세상살이에서 행복을 향유하는 인생의 세 단계로 해석한다.

필자는 그것을 ‘인생(삶)’으로 읽는다. 누구나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곧, 인생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아는 것이다. 인생은 ‘희로애락애오욕’의 합창이다. 욕심내어 사랑하고 미워하며, 성취하여 기뻐하고 실패에 분노하며, 오는 자에 즐거워하고 가는 자에 슬퍼하는 게 인생이다.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좋아할 만한 세상살이다.
미워함과 성냄과 슬퍼함도 다 욕심 탓, 깨닫고 보면 다 성취와 기쁨과 즐거움의 밑돌인 것이다. 희로애락애오욕, 모든 감정을 즐긴다.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한 인생이다.
걸음은 반드시 정상에 이르고자 함이 아니다. 길이 있고, 걷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가는 햇살 아래서도 홀로 터벅터벅 걷는 것은, 쉼보다는 걷는 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중턱에서 무너져 앉을지라도 무슨 여한이 남으리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