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8) 적자생존과 깨달음
【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98) 적자생존과 깨달음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2.11 09:00
  • 업데이트 2023.02.1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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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óbl Alajos  (1856-1926), CC BY-SA 3.0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세인트 로쿠스 병원 앞에 세워진 제멜바이스 동상 [알라호스 스트로블Stróbl Alajos  / CC BY-SA 3.0]

“범용(凡庸)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웃고 울고, 천재(天才)인 사람은 성취로 웃고 울고, 각자(覺者·깨달은 사람)는 은인자중할 뿐이다.”

19세기 비엔나종합병원의 산부인과 제1병동에서는 산모들이 산욕열(産褥熱·출산 후 산모의 생식기를 통해 세균의 침입으로 감염되거나, 유선염 또는 방광염으로 인해 고열을 내는 질병)로 죽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스(1818~1865)는 산모들의 산욕열로 인한 사망률이 왜 이렇게 높은지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검토했다.

첫 번째로 병원 부근에 나쁜 기운이 돌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하지만 1841~1846년 자료를 조사해보니, 제1병동의 사망률이 15%까지 치솟았는데, 2~3%인 제2병동보다 높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에 이 가설을 폐기했다.

두 번째로 제1병동의 환경이 안 좋아서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사망률이 낮은 제2병동의 환경이 더 안 좋았기에 이 가설도 버렸다.

세 번째로 출산방식의 문제라는 가설을 세웠다. 사망률이 높았던 제1병동에서는 의사들이 산모가 바로 누운 채로 출산하게 했고, 제2병동에서는 조산사들이 산모에게 옆으로 누운 자세로 출산을 하게 했다. 하지만 출산방식을 바꿔도 사망률 변화가 없어서 이 가설도 폐기했다.

네 번째로 제1병동의 위치가 문제라는 가설을 세웠다. 사제들이 임종실로 가면서 치는 종소리로 인한 산모들의 불안이 산욕열의 원인인가 싶어 다른 길로 돌아가도록 했으나, 사망률은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 가설도 버렸다.

마지막으로 사체에서 나오는 어떤 나쁜 물질이 산욕열의 원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당시 이 병원의 한 의대생이 시체 해부 실습 중에 칼에 손가락을 베인 후 산욕열과 비슷한 증상으로 사망한 것을 알고 떠올린 가설이었다.

제멜바이스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의사들에게 해부학 실습 후 염화석회액으로 손을 깨끗이 씻도록 했다. 그랬더니 제1병동의 사망률이 1%대로 뚝 떨어졌다. 사체에서 나온 나쁜 물질이 산욕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세균이 뭔지도 몰랐고, 병원에 위생개념도 없었다. 의사들의 위생이 높은 산모 사망률의 원인이라고 지적한 제멜바이스는 그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결국 병원에서 쫓겨났다. 나중에는 정신병원에 갇혔고 거기에서 죽었다.

그러나 지금 비엔나종합병원에는 병원의 위생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제멜바이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2008년에 50유로짜리 제멜바이스 기념주화를 발행했다.(김필영/5분뚝딱철학)

인간의 수명이 갑자기 길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다. 그 원천에는 위대한 발견이나 뛰어난 의사의 등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발전이 있었다. 곧 사람들이 위생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위생관리는 의학에 급진적인 발전을 몰고 왔다.

헝가리 의사이자 과학자인 제멜바이스는 병원 및 의학 처치에서 소독법의 개척자로 환자들의 사망률을 낮추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쫓겨났고 정신병원에 갇혔고 거기서 죽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클루지』(개리 마커스/최호영)를 참고해보자. 인간의 마음은 세련되게 설계된 기관이 아니라 ‘클루지’(Kluge), 곧 서툴게 짜 맞춰진 기구이다. 우리의 마음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했다. 생존 때문에 최선의 선택을 방해 받는 진화의 법칙, 곧 진화의 관성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그리고 세계는 불완전하다.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맹목적인 진화 과정이 빚어낸 기이한 산물이다.

우리 인간은 체계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만큼 영리한 유일한 종種이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주의 깊게 짠 계획을 순간의 만족 때문에 내팽개칠 만큼 어리석기도 하다. 무병장수를 바라면서도 담배를 피며, 새벽 조깅을 하면서 한 번씩 음주운전도 한다.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구미 당기는 음식을 대하면, 그 다이어트를 ‘내일부터’로 미룬다. 동네에서 5만 원짜리 선풍기가 옆 시내에선 3만 원이면 2만원 아끼려고 거기까지 간다. 그러나 100만 원짜리 냉장고가 시내에서 98만 원이면 그냥 동네에서 100만 원 주고 산다.

공학자들은 대개 돈이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클루지를 만든다. 자연은 왜 클루지를 만들까? 진화의 과정은 돈과 상관이 없으며, 선견지명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게다가 진화는 10억 년에 걸친 일이다. 우리 신체의 클루지를 보자.

인간 척추는 형편없는 해결책이다. 만약 네 개의 기둥이 균등하게 교차 버팀목 역할을 하면서 몸무게를 분산해 지탱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단 한 개의 기둥으로 전체 몸무게를 지탱하는 척추는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직립 보행 덕분에 우리는 똑바로 선 채로 손을 자유롭게 놀리면서 생존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요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적절하다고 할 수 없는 해결책이 우리 몸에 들러붙은 까닭은 무엇일까? 척추가 두 발 동물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그 구조가 네발짐승의 척추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즉 불완전하게나마 일어서는 것이 아예 일어서지 않는 것보다(우리처럼 도구를 사용하는 생물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은 쉽게 클루지를 만들곤 한다. 자연은 그것의 산물이 완벽한지 또는 세련됐는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작동하는 것은 확산되고, 작동하지 않는 것은 소멸할 뿐이다. 성공적인 결과를 낳는 유전자는 확산되고 증식하는 경향이 있고,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는 생물을 낳는 유전자는 사라져버리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이 게임의 이름은 ‘우월자 승리’가 아니라, ‘적자생존(適者生存·Survival of the fittest)’이다.

예전 동양의 사고(철학)의 특징은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곧 물리법칙과 인간법칙을 통합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사기열전』「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의문을 던진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이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했어도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는 제자 일흔 명 중에서 안연만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난 도적 도척盜跖은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간을 날로 먹었다. 잔인한 짓을 하며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제멋대로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의 수명을 다 누리고 죽었다. 이는 도대체 그의 어떠한 덕행에 의한 것인가?

최근 사례를 살펴보면,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 호강하며 즐겁게 살고,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걸음 한 번 내딛는 데도 땅을 가려서 딛고, 말을 할 때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하며, 길을 갈 때는 작을 길로 가지 않고,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면 떨쳐 일어나서 하지 않는데도 재앙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다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조송원
조송원

사마천의 의문을 바꿔보자. ‘하늘의 도’란 게 있는가, 없는가? 없다면, 세상사 인간사에 웃고 울며 그냥 생존하면 그만이다. 있다 해도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온전한 이해는 인간의 인식 능력 너머의 무엇일 테니까. 천재(타고난 뛰어난 재주)는 한 성품일 뿐, 하늘의 도를 깨닫는 것과는 무관하다.

깜냥껏 하늘의 도 혹은 삶의 진실의 한 가닥이라도 잡은 이가 있다. 일러 ‘각자(覺者·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깨달음은 인식하는 것일 뿐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하여 그들도 삶의 외관은 장삼이사와 꼭 같다. 다만, ‘마음의 상태’가 다를 뿐이다. 그 마음의 상태가 어떠할까? 나는 모른다. 도연명은 ‘잡시’(雜詩·이것저것 읊음)에서 이렇게 읊었다.

“말을 하려다 어느덧 말을 잊었네”(欲辯已忘言)

<작가/본지 편집 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