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이란 건 너무 이질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들여오는 폭격음, 집과 학교 위로 떨어지는 폭탄들. (…) 나와 친구들 모두에게 친근한 존재들이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설탕이 뿌려진 빵 한 조각이나 푹신한 인형과의 포근한 포옹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다. 하지만 전쟁은 한 순간도 멀어지지 않았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당시 우크라이나의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에 살았던 예바 스칼레츠카(13)의 일기 중 한 부분이다.
그래도 예바는 불행 중 다행인 행운아이다. 폭격을 맞은 하르키우를 빠져나와,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헝가리를 거쳐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피란을 할 수 있었다. 어떤 전쟁에서건 외국으로의 피란은 극소수의 선택지일 뿐이다. 남은 자들은 어떠할까?
모든 재난에서 최악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아동,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이다. 전쟁은 건장한 젊은이들을 먼저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악랄한 재난이다. 그런데 전쟁 선포는 사회적 강자가 행한다. 개전(開戰)의 조건이 사회적 강자의 자식과 아내와 부모를 최전선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아마 인류사에 전쟁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특히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는 전쟁 범죄의 주요 희생자였고, 피란처에서는 성폭력 등에 노출되고 있다. 가정 폭력도 늘고 있고, 아이와 노인 돌봄의 부담까지 떠맡고 있는 형편이다.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에서 구호단체 ‘국제구조위원회’의 도움을 받은 여성인 올가(57)는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털어놨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두려움에 떨며 다시 일어나 기도를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한다”며, “이제 우리의 삶이 멈췄다. 잠자리에 들어가서도 다시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퀭한 눈을 글썽이며 말했다.
전쟁 중에는, 평화 때의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이 최고로 염원하는 행복이 된다. 전쟁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누가, 어떤 사회적 강자가 전쟁을 운운하는가!
한반도의 긴장 상태가 심상치 않다. 북한은 탄도미사일을 쏘고, 미국은 전략자산을 전개한다. 말 폭탄도 날린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정권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개 경고하고, 북한은 “미국이 적대적 관행을 이어가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맞받는다. 한반도에서 폭주 기관차가 마주보고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충돌을 막을 지혜는 없는 것일까?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21일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개최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현실적-실용적 접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는 “미국과 북한이 수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관계정상화를 점진적, 상호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권위주의 통치와 인권 침해는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북한의 생존 욕구를 무시”하면 협상이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북한 붕괴론’이 북-미 합의 이행을 어렵게 만들고, 북한이 핵무장에 더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핵무장론에 대해서는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로, 한-미 관계를 악화시키고, 동아시아의 핵무기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며, “평화를 위해 가능한 유일한 선택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통한 북한과의 외교 협상”이라고 강조했다.
북한과의 외교 협상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가 한반도 평화의 초석이다. 한데 북한의 비핵화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전제한다. 왜 그럴까? 왕선택(한평정책연구소 글로벌외교센터장)의 칼럼(‘Manage crisis and more to ease tension with NK’/<The Korea Herald>, 2023.2.23.>)을 참고해 보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이 핵 보유 및 탄토미사일 발사 등 국제 규정을 위반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긴장은 반복될 것이다. 북한의 논리는 이렇다.
북한은 미국과 전쟁 중이다. 적(敵)인 미국은 강력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적의 침략 가능성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들도 핵무기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은 어색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곧,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미국의 침략 가능성이 없어지고 미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고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북한의 논리는 순전히 프로파간다(선전)이니, 속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기 위한 핵심이다. 그리고 외교는 증오와 원한으로부터 공존과 배려를 유도해 낼 수 있는 절묘한 예술이다. 포기보다야 나으므로, 계속 노력해야 한다.
왕 센터장의 맺는말이 인상적이다. 한국은 10대 경제·군사 강국이다. 세계적으로 매력적인 문화도 가졌다. 이런 나라에서 북한이라는 자그만 나라와의 문제 때문에 원치 않는 근심 걱정으로 살아가는 것은 현명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우리 안의 통일’이 필요하다. 군사적 해결책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외교적 협상이 유일한 해법이다. 이를 위해선 북한이 주장하는 근본 문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용납하자는 게 아니다. 협상을 하려면 상대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상대의 주장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좋은 전쟁이라도 나쁜 평화만 못하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