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03)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4장 축제와 길놀이②
대하소설 「신불산」(403)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14장 축제와 길놀이②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3.02 06:20
  • 업데이트 2023.03.01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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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축제와 길놀이②

이튿날은 사생대회와 백일장, 서예대회, 새로 생긴 동화구연대회와 시낭송대회, 그러니까 진짜 문화예술제의 핵심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참가자가 많지 않아 썰렁한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예상을 깨고 꽃마을입구에서 야영장에 이르는 길과 주차장엔 시내 곳곳의 어린이집과 미술학원에서 단체로 참석한 차량이 빼곡했는데 서구관할이 아닌 해운대나 구포, 연산동 같은 먼 곳에서 온 차량들로 많았다.
 
전날의 개막식은 물론 모든 행사가 아무 사고나 말썽 없이 길놀이와 롯데호텔의 고적대, 꽃마을출신가수 <수와진>의 초청까지 매끄럽게 진행된 탓인지 김모구청장은 서구문화회의 회장인 김종문서예가가 진행하는 2일째 축제의 초청자로서 인사말씀만 하면 되기 때문에 정장이 아닌 점퍼차림으로 나와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리고 미래의 시인과 화가가 될 자녀의 꿈과 예술혼이 무럭무럭 자라는 현장을 보기 위해 이곳 청정지역 구덕야영장을 찾아주신 여러 부모님들, 특히 서구가 아닌 먼 곳에서 방문해주신 시민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열찬씨가 미리 써준 인사말씀을 읽어나가다

“여러분, 지금은 제가 하루 종일 딱딱한 공문서를 읽는 공무원이지만 저도 사실 여러분처럼 어릴 적에는 시인이나 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김소월시집을 읽고 사생대회에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요. 여기 함께 오신 학부모님들도 다들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학부모들의 박수까지 받으며 인사말을 마치고 김종문 위원장을 비롯한 심사위원을 겸한 서구문화회의 화가와 서예가들과 악수를 나누고는 

“오늘 행사는 이과장이 알아서 진행하시게. 회장님, 그럼 수고하십시오.”

모처럼 느긋하게 관내순찰사마 엄광산에서 구덕산을 거쳐 시약산에 이르는 관내 등산로를 점검할 모양인지 뒤에 지역경제과장과 녹지계장이 등산복차림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어 분야별로 심사위원장들이 심사기준발표가 있었는데 서예 분야의 김종문 심사위원장이 붓글씨자체도 중요하지만 정말 진지하게 먹을 갈아 글씨를 썼는지, 병에든 먹물을 사와서 쓰는지 참고를 하겠다고 하자 우우, 항의의 함성이 일어나기도 했고 사생대회의 심사기준도 이 좋은 숲속에서 모처럼 창작에 몰두하는 만큼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주변의 숲과 호수를 잘 묘사해 이 좋은 가을날의 기운이 느껴지면 좋겠다고 했다.

열찬씨의 중재로 이번 대회까지는 먹물에 대한 점수 차를 두지 않겠다는 수정발표와 함께 서예부와 사생부는 주변의 스탠드와 숲속으로 흩어지고 두둥둥 징소리를 울려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고는 미리 준비한 글제의 두루마리를 펴자 “야아!” 경악과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며 백일장참석자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숲>, <오솔길>, <바다>, <노을>같은 글제가 어느 정도 자신의 예상에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리움>, <우리 마을>같은 좀 난해하거나 생소한 글제가 부담스럽기도 한 모양이었다. 
 
백일장과 시낭송, 동화구연은 서구에 활동적인 시인이 그리 많지 않아 열찬씨와 가까운 중앙동에 출입하는 문인들로 심사위원을 위촉해 이상개 시인과 유명선 시인이 백일장을 맡고 교장선생 출신 강기홍 수필가가 동화구연과 시낭송의 심사를 맡고 열찬씨가 보조하기로 했는데 그건 시낭송과 동화구연이 나중에 추가되어 심사위원 수당이 부족해서였다.

무려 20명이 넘게 참석한 동화구연에서는 앙증맞은 어린이집 어린이를 비롯해 초등학생과 어린이집교사들이 어울려 열찬씨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는 좀 생소하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주 높거나 낮거나 길거나 짧은 억양의 목소리와 몸동작으로 너무나 진진하게 구연에 열중하고 관중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동화구연의 수상여부, 그러니까 동화구연대회에서 상을 받은 어린이나 선생님이 많은 어린이집이 좋은 어린이집으로 평가되고 수상경력이 있는 보육교사일수록 대우가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시낭송대회가 열렸는데 참가자 명단을 보던 열찬 씨가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다. 열두 명의 참가자 중 한 명이 열찬 씨가 아직 이름도 모르던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젊은 여직원이었는데 낭송할 시 제목이 바로 열찬씨의 제 4시집 <비오는 날의 연강>에 수록된 <초겨울의 상념>이라는 시였기 때문이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윌리엄 워드워즈의 <무지개>등 주로 국내외의 명시가 낭송되다 마침내 지방의 한 무명시인에 불과한 열찬씨의 시가 낭송되자

“과장님, 한 턱 내소. 이런 영광이 어디 있소?”

강기홍 선생이 옆구리를 툭 치며 웃는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열찬씨는 

 

초겨울의 상념
                  이득수

 

 노오란 은행잎
 그 많은 작은 부채 오소소
 내 살점마다 바람 스미어
 세포마다 그리움 되살아났다.

 아직 젊은 연인들은 겨울 앞에서
 코트 깃 세워주며 눈을 빛내고
 심술쟁이 바람은 고집스럽게
 이승사랑, 영화 모두 부질없다며
 단풍잎과 별 한 줌씩 쓸어 가는데...

 

짧은 커트 머리가 상큼한 곱상한 여직원이 열찬씨의 시집을 펼쳐 읽어나가는데

“야, 목소리 좋은데. 그 보다 시도 좋고. 우리 평리선생 시가 이렇게 가을 숲에 잘 녹아들 수가...”

실실 웃는 강기홍 선생이 진짜 탄복을 하는지 놀리는 지도 판단이 안 될 정도로 긴장한 열찬씨를 보며

“글쎄,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꼭 발가벗고 벌 서는 느낌입니다.”

눈을 질끈 감는데

 플라터너스 널찍한 
 잎 떨어진 맨홀우의 캐나다 국기
 가장자리 빼곡한 어둠속으로 
 순아, 나는 너를 찾아 길을 떠난다.

 황야라도 좋겠다. 눈에 덮인
 침엽수림 눈보라 속 늑대가 울고
 비버가 살아가는 록키산맥 골짜기 
 바람이 울부짖는 통나무집서
 언 달을 보며 밤을 새워도
 너를 생각한다면, 생각한다면.

 

마침내 상당한 호응을 얻은 제법 큰 박수소리와 함께 시낭송이 끝나자 열찬씨처럼 얼굴이 발개진 낭송 자가 단상에서 내려오며 심사석의 열찬씨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잘했는데. 1등 줘야 되는 것 아닌가?”

또 빙긋 웃는 강기홍 선생에게

“아직도 안 한 낭송자도 많은데요, 뭘.”

비로소 열찬씨가 침착함을 되찾고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 시낭송이 모두 끝나자

“우잘랍니까? 1등을 줘도 손색이 없겠습니다만.”

또 물어오는 강기홍선생의 내심을 몰라
 “어떻더노? 그 여직원 시낭송한 거 말이야?”
고명석 계장과 정병진씨를 불러 물어보자

“잘 하던데요.”

고 계장이 웃으며 한마디를 던지자 정병진씨도 빙그레 웃었다.

“한 3등쯤 주면 될까?”
“그리 하시든지.”

고계장의 말을 듣고

“3등으로 합시다.”

하자

“아니 심사위원이 쓴 시를 낭송했다고 등수를 깎는 법이 어딨나? 적어도 2등은 줘야지. 사실 1등을 주어도 무난하고 2등을 주기엔 아깝기도 하고.”

뜻밖에 진지한 강기홍 선생을 보며

“그만 3등으로 하지요. 만약 1, 2등으로 해서 주최 측 농간이라는 말이 나오면 제가 어찌 고개를 들겠습니까?”
“이런? 그 무슨 시골마을 콩쿨대회 같은 말씀을 다 하시오?”

하면서 결국 3등으로 결정해 상장을 쓰고 심사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생대회, 서예와 백일장은 나중에 심사결과를 학교나 가정으로 통지한다는 안내방송으로 참석자들이 거의 빠져나간 뒤 시낭송과 동화구연의 시상식을 준비하는데
 
“이 과장, 인자 대충 마무리 되어가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 김모구청장이 마침맞게 나타나 김종문 회장, 김일랑 부회장 등과 나누어 시상을 하고난 뒤

“자, 갑시다. 수고 많았는데 목은 축이고 가셔야지.”

 

구청장을 선두로 심사위원들이 미리 준비한 오리구이집으로 가서 연방 폭탄주를 돌리며 <서구발전>, <서구문화회 발전>, <김형호서구청장의 건강과 재선>을 위하여 건배를 하고서야 그렇게 바짝 긴장했던 <구덕골문화예술제>가 끝났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