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특집 : 의령 회향기】 내 존재의 비망록 갑을 - 정복수
【장소시학 2호-특집 : 의령 회향기】 내 존재의 비망록 갑을 - 정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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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3.15 09:20
  • 업데이트 2023.03.1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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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기

 

내 존재의 비망록 갑을

정 복 수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246번지이다. 마을 뒷산은 의령에서도 유명한 자굴산이 있고 그 옆으로 한우산이 펼쳐져 있으며 서쪽 아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가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해발 897m의 홑 산이지만 부드러운 산세와 기암괴석이 많은 그야말로 올곧은 기질과 늠름한 기상에 넉넉한 심성을 느끼게 하며 봄에는 진달래, 철쭉으로 아름다움을 더한다.

마을 풍경은 산기슭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갑을, 봉림, 양성, 개승 마을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갑을리 초입엔 갑을교회가 있고 동네 한가운데 창원 정丁씨 추원문 재실이 자리하고 있다. 옥호는 영향제로 되어 있어 길게 오래오래 향기를 널리 퍼뜨리기를 바라는 곳으로 후손의 안녕을 바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70년대 초반까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다. 예전엔 이 길을(9km 넘는 비포장길) 걸어 어른들은 장에 다녀오곤 하였다. 어쩌다 차를 타고 가는 날이면 길이 패여 돌이 드러난 길을 덜커덩 덜커덩거리며 차 안에서 춤을 추듯 흔들리며 갔다. 버스에서 내리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걸어 들어오는 그 길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한여름과 한겨울 무지하게 덥고 혹독한 찬바람을 맞고 걸어 다녔다.

80년대 중반 공무원 연수원이 들어오면서 도로가 포장된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가례면에서 8km 들어오는 도로에는 소나무 가로수가 있고 아름다운 길에 서암지 저수지가 깊은 호수처럼 드리워져 있다. 한우산 정상에 발전용 풍차가 설치되어 있어서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상들이 피난해 자리 잡았다고 한다. 외길 깊은 곳을 한없이 걸어 들어오면 더는 길이 없고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이 분지형 지형에 안착하게 된 것은 숨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요새같이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기운을 받았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갑을 마을은 창원 정씨가 400년이 넘게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나의 고향 갑을에서 6살까지 살아 온 지금껏 잊어버린 내 유년의 기억을 회상해 보려고 한다. 어느덧 6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가 버렸지만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난 내가 태어난 이곳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했다. 산 너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태초의 지상이라 상상했다. 여름밤 평상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면 우주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왕자라 생각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무한의 능력자는 바로 ‘나’다 라고 느꼈다.

내 위로 형이 있었는데 3살 때 별것 아닌 것으로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인데) 저세상으로 간 것을 안 것은 한참 나이 먹은 이후다.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갔다. 주위의 아재, 형들이 다 입학할 나이여서 혼자 남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부탁하여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침에는 모두가 모여서 학교로 출발하였다. 1.5km 정도 걸어가는 거리이다. 학교 가기 전 동네 아이들은 재실 앞에 모두 모여서 함께 갔다. 모두가 모이길 기다리는 추운 겨울에는 추위로 떨며 기다렸고 지금도 귀가 시린 느낌이다. 저학년은 오전수업이니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저학년끼리 모여서 귀가했다.

학교생활은 친구들과 놀다 싸움을 많이 해서 나의 얼굴에는 흉터가 훈장처럼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싸워서 선생님께 혼이 나고 학교가 끝날 때까지 혼자 벌을 선 기억이 있다. 어느 날 큰집에 ○○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엄마한테 내가 학교에서 싸워 벌섰다는 것을 고해 바친 것은 지금도 각인되어 있다. 고해 바친 아이보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서 더 기억이 나는 것 같다.

61년도 갑을초등학교는 교실이 부족하여 초가집으로 따로 교실을 만들었는데 저학년은 이 초가집에서 수업을 받았다. 수업 중에 교실 천장에서 뱀이 기어 다니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뱀을 발견한 것은 낙서만 하다가 우연히 뱀이 눈에 뜨인 것이다. “뱀이다!”라고 했을 때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날은 제대로 수업할 수 없었다. 책상은 2명 앉을 수 있는 책상에 3명이 앉았고 옆 친구들과 바짝 붙어 앉아 제대로 집중하고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난 주로 낙서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찌는 듯 더운 어느 날이었다. (7월 아니면 9월이 아닐까?) 수업이 끝났는데 선생님께서 남으라고 하셨다. 또 뭘 잘못해서 남으라고 하시는가?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군청에서 미술대회가 있는데 참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6살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미술대회를 나간다고 하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미술대회가 무언지도 모르고 있을 때였다. 당시 같은 반에는 13살 먹은 여학생도 있었다. 얼마를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군청까지 걸어갔다 오기 힘들다고(군청까지는 9km다) 그냥 집에 가라고 하셨다. 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함께 다니는 친구들은 다들 집에 가고 없는데 혼자 가야 하는 걱정이 앞섰다. 집 가는 길 중간에 17세쯤 된 지적 장애 청년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통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혼자된 나는 잡혀서 죽는 게 아닌가 공포가 몰려왔다. 다행히 그런 날은 없었지만 혼자서 뚜벅뚜벅 집으로 가는 길은 배가 고팠고 사막 위에 놓인 벌레가 되어 집으로 갔다.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아무도 안 계시고 혼자 밥을 챙겨 먹을 때가 자주 있었다. 간장만 가지고 밥을 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목에 걸려 죽을 것만 같았던 생각이 난다. 물을 마시면 괜찮았을 텐데 그 당시에는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나의 증조할머니 친정은 의령 궁류면이다. 90년대 초반이었나 산을 넘어 궁류로 가는데 작은아버지께서 손으로 저기가 할머니 고향인데 어렸을 때 걸어서 가보았다고 하셨다. 증조부께서는 내가 태어난 해에 돌아가셨으니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체구가 자그마하시고 입을 다무신 모습이 강단 있으신 경주 최씨 성을 가진 나의 할머니, 할머니의 친정은 바로 옆 동네 봉림마을이었다. 74, 5년도 인가 아버지와 사촌과 함께 할머니 친정에 가서 할머니의 오빠를 뵌 적이 있다. 그전에 나는 할머니에게 오빠가 계시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봉림마을에 갔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잔칫날 큰 병의 소주를 보자기에 싸서 가기도 했다. 할머니의 친정에서 심부름으로 왔다 갔다 한 사람들도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86년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가족들을 위해 많은 사랑과 희생으로 오늘 우리가 있게 하셨다.

어머니의 친정은 의령 읍내에서 가까운 무전리 무하마을이다. 어렸을 때 외가에 간 기억은 또렷이 있다.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시고 조용한 분이셨다. 늦은 밤까지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하시는 일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이 헤진 버선이나 바지저고리를 가지고 오면 어머니는 말끔하게 꿰매어 새것처럼 만들어 놓으셨다. 어머니가 손수 지으신 저고리를 보면 손바느질이 재봉틀로 박은 것 같았다. 삼베도 틈틈이 짜셨는데 결이 고운 명주처럼 섬세했다. 낮에는 들일과 밭일, 온 가족을 위해 입성 먹성을 채우려 하루가 분주하고 고달프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게 저려온다. 어머니가 짜신 삼베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이 삼베가 삭아 부서질 때까지 세상에 남겨 놓고 싶다.

61년도에 동생이 태어났는데 6살에 학교에 들어간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보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흉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흉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 엄마가 없어졌다. 나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불편한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도 콧물 눈물범벅이 되었다. 내 젖을 떼기 위해 친정에 가셨다고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네다섯 살 때에도 엄마는 젖꼭지에 소태를 발라서 내 입이 닿지 못하게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나는 엄마의 작전에 져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란 엄마의 젖을 찾는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1972년 1월 2일 새벽 멀리멀리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내 나이 17세였다.

어린 시절 하루는 길고 길었다. 따분함으로 보채고 또 보채는 나날이었다. 놀고 놀아도 해는 중천에 있었고 놀거리 없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집 앞 추수 끝난 논을 삽으로 파는 놀이를 동네 집안 아이들과 하였다. 금을 캔다고 했다.(당시 큰집에는 금광을 하고 있었다) 삽질 괭이질을 할수록 보드랍고 고운 흙이 신비롭게 나왔다. 금방 금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감잎이 너무 예뻐서 차곡차곡 모아 돈이라고 했다. 마음은 자랑하고 싶은 부자가 되어 있었다.

삽질은 할수록 흙이 비밀의 모습을 보였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와- 와- 하며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군용 야전삽 뾰족한 부분이 나의 정수리를 찍었다. 숨골 2cm 위쪽이었다. 바로 즉사할 수 있는 곳 옆이었다. 그 순간 삽을 던지고 도망가는 뒷모습이 지금도 보인다. 그 후로 나의 머리는 주먹만 한 혹을 달고 있었다. 혹이 내 머리보다 더 커질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사람도 있었고 심심한 마을에 놀림감이 되어 있었다. 그런 어느 날 큰집 아재가 대나무 칼로 머리에 혹을 찢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엄마, 숙모, 당숙모들이 나의 사지를 누르고 있었다. 겁에 질려 있고 울고 있는 나에게는 사탕 한 알이 주어졌다. 결국 나의 광산에서는 혹과 함께 사탕 하나가 수확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마당과 골목을 돌며 장닭과 온종일 놀았다. 저녁쯤이 되자 닭이 죽어 버렸다. 겁이 덜컥 났다. 묻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 옆에 돌무더기로 가서 돌로 닭을 엉성하게 덮었다. 저녁이 되자 할머니가 닭을 찾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한참 후 돌무더기 속에 있는 닭을 할머니가 찾았는데 닭은 살아 있었다. 온종일 닭을 못살게 괴롭혀서 기절한 것인지 닭이 살아 있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다행한 마음과 함께 그동안 닭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겨울 어느 날 양성 마을에 극단이 들어온다고 동네가 시끄러워졌다. 언제나 밋밋한 동네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전기도 없이 어떻게 공연을 하였는지 아마 카바이트 불 몇 개 켜놓은 천막 속이었을 것이다. 시끄럽고 재미있는 공연이었는데 남자가 계란을 낳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공연이 끝나고 벼 짚단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칠흑 같은 밤길을 밝힐 횃불이었다. 그 당시 길이 험해 개승 마을 쪽으로 돌아서 왔는데 반도 오기 전에 짚단의 불이 다 탓 던 기억이 난다. 이후 나도 연극을 한다고 몰래 아버지가 바르시던 포마드 기름을 바르고 먹을 가지고 얼굴에 안경 수염을 그리고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 난리 아닌 난리를 피운 기억이 난다.

어릴 때 고기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가재도 잡아 삶아 먹고 메뚜기도 잡아먹었다. 참새를 잡는 날에는 눈이 뒤집히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미꾸라지로 국을 끓였는데 미꾸라지가 사라졌다. 미꾸라지가 어디에 갔느냐고 엄마한테 난리 난리를 부렸다. 미꾸라지는 삶으면 살이 없어진다고 한다. 나는 말도 안 된다고 미꾸라지를 내놓으라고 통곡을 했다. 지금도 추어탕을 먹을 때는 그때의 내가 보인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그런 때가 가슴에 있다는 것이 행복 아닌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이 되고 무슨 이유인지는 알지 못한 채 우리 가족은 트럭에 짐을 싣고 갑을 마을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작별 인사를 하고 온종일 걸려 해가 져서야 부산에 도착하였다. 휘황찬란한 몇 개의 백열전등을 보는 순간 충격에 빠져들었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부산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같은 경상도이었는데도 말이다. 혼돈과 번민의 도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시 생활인 부산 생활은 가족 모두가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고 어머니가 몹쓸 병마저 얻게 되었다. 아버지도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인간세상의 충격 속에 빠져 있었다. 가족들은 다시 귀향하기로 하고 고향 갑을 마을로 돌아갔다. 나는 그림 그리는데 정신을 쏟고 있을 때다. 혼자 부산에 남아 동가식서가숙 했지만 고향에 가서 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년기의 내 고향을 잊고 싶지 않아 다신 고향으로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나에게 그림은 어쩌면 유년의 향수를 생각하며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간은 모든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나의 지독한 사춘기를 보내는데 더없는 시간이었다. 식구들이 부산을 떠나 다시 갑을에서 살고 있을 때 가끔 고향을 찾고 동생들과 할머니, 아버지를 뵙고 올 때가 있었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거웠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그림 속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는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엄마의 살냄새와 젖 내음,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 봄 벚꽃이 찬란했던 묏등, 한가롭게 풀을 먹고 있는 누런 소, 따가운 뙤약볕, 마루 끝에서 바라본 마을 길, 하얀 저고리 검정 치마 동네 아지매, 회오리치던 돌 바람, 돌담 곁에 키 큰 감나무, 높은 기와집 재실, 하얀 두루마기 갓 쓴 어른들의 제사, 명절이면 온종일 집안을 돌며 차례 드리기, 외딴곳에 홀로 묻히신 어머니 산소, 복수야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러대던 할머니 목소리……. 지금도 내 고향 갑을엔 나의 윗대 조상들과 나와 함께했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묻혀 계시는 땅이다.

지금도 난 가끔 유년의 시간을 꿈꾼다. 내가 태어난 이 마을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했고 산 너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태초의 지상으로 생각했으며, 여름밤 평상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며 우주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왕자,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부여되는 곳이 나의 고향이라 생각했다.

내 어린 순수의 영혼이 묻어있는 땅이다. 지형이 변경되는 개발과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처럼 둥그렇게 둘러싼 아름다운 분지의 땅 갑을마을, 봉림마을, 개승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낮은 집들이 오래오래 유지 되었으면 싶다. 앞으로 몇 번 더 고향을 방문할지 알 수는 없으나 그때 고향에 대한 풍경과 마음을 고이고이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고 있다.

 

정복수

◇ 정복수

의령 갑을 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1986년부터 2021년까지 개인전 31회, 단체전 20회, 해외 기획전 7회. 제13회 송혜수미술상(2017), 제31회 이중섭미술상(2019)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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