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내가 인생을 통째로 낭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념에 움찔했다. 요즘 들어 잠의 주기가 바뀌었다.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남들이 일어날 때 자리에 든다. 오전이 자는 시간이다. 해 지면 휴식에 들고, 해 뜨면 활동을 하는 게 정상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어쩌다 숙제에 쫓겨 밤샘을 한 번 한 것으로 거꾸로 된 일상이 정착돼 버렸다.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니 해가 머리 위에 있다. 몸이 찌뿌드드하다. 마음도 개운치가 못하다. 왤까? 어제 일을 되짚어보고, 내일 일을 미루어 짐작해 봐도 딱히 켕길 거리는 없다. 마당 한 녘 수돗가로 가 비누 없이 세수를 하는데, 택배가 왔다. 주문한 책이다.
돈은 나의 희소 자원이기에, 어찌저찌 마련해 책을 주문할 때 기쁘고 받을 때는 더 기쁘다. 개운치 못한 마음도 일신할 겸 곧바로 책 꾸러미를 책상 위로 가져다가 풀었다. 새로 입수한 책은 우선 대충 훑는다. 머리말이나 서론, 목차, 결론이나 역자 후기 등으로 개관하여 그 책에 대한 ‘감’만 잡아두고 일단 책장에 둔다. 손에 넣은 즉시 통독하는 경우는 드물다.
제국의 충돌/문화와 사회를 읽는 키워드/눈 떠보니 선진국/한국에서 박사하기,를 훑고 속표지의 저자 밑에 내 이름과 사인 그리고 연월일을 기재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인 『일본관찰 30년』을 펼쳤다. 부제가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18가지 이유’이다. 이 부제는 모모세 타다시가 1997년에 쓴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의 패러디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었고, 책장에 아직 보관 중이다.

우리는 ‘나무와 숲’(부분과 전체)이라는 영원한 숙명에서 헤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개별 나무를 깊이 파면 팔수록, 전체 숲에 대한 이해는 멀어진다. 숲 전체를 이해하려 큰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부분인 개별 나무에 대한 이해는 얕아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지력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 다를 동시에 달성할 능력과 시간은 없다.
따라서 한 분야의 전문가는 다른 분야에서는 ‘전문가 바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둑 고수를 정치의 무대로 올리기도 한다. 바둑에 고수가 되려면 그만큼 바둑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 투자해야 한다.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다. 하여 정치에 대해서는 일반인보다 더 무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를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이 있다. 대중의 지지를 넓히려는 의도일 것이다.
국회의원이 된 바둑 고수, 정치에서는 ‘전문가 바보’일 뿐이다. 정치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소모품이고, 차라리 정치 발전에 민폐 노릇만 하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바둑 고수 자신일까, 끌어들인 정치세력일까, 용인하는 대중일까?
일상생활에서나 사회에서나 역사에서 자주 목격되는 전문가 바보는 근본적으로 대중의 무지에 연유한다. 그러나 세상사나 인간사의 큰 그림, 곧 숲은 인간 자체의 이해력을 넘어선다. 그럴듯하게 그린 숲은 인간의 이해력 범위 안에서 그럴듯할 뿐이다. 인간 이해력을 벗어난 실체는 그려낼 수도 없고, 어떤 신적(神的) 인물이 그려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으니, 헛소리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적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환원론(reductionism)과 전일론(holism)이다.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만, 단순·무식하게 최대한 요약해서 말해본다. 환원론은 부분의 합이 전체라는 입장이다. 전일론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입장이다.
환원론은 복잡한 것을 더 단순한 것들의 조합으로 생각한다. 곧 전체는 작은 부분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들을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전일론은 부분과 부분은 상호의존성과 상호작용을 통해 단순히 1+1=2가 아니라 3이상의 결과를 창출한다는 데 주목한다. 따라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분들에 대한 이해를 다 합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사람을 이해하는 데 전일적 관점을 취한다.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환원론적 관점을 취한다 한들 결과는 같다. 개인이 한두 부분 이해할 수 있을 뿐, 전체 부분의 이해는 난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 서건,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꼭 세상사에 대한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 두 번은 꼭 맞는, 멈춘 시계보다 하루에 한 번도 안 맞지만 가는 시계가 훨씬 더 유용하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informed’이다. 우리는 정보화시대에 산다. 그러나 우리말의 정보는 지식이나 앎과는 직결되지 않는 것 같다. 차라리 정보라는 단어에는 음습한 조작 냄새가 난다. 과거 독재정치의 유물 때문일까?
영어로 정보를 읽으면 지식이나 ‘옳음’이 바로 연상된다. 예를 들어 ‘informed decisions’은 ‘정보에 입각한 결정’이다. 곧 편견 없이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결정으로 옳은 결정이란 뜻이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 위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