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당시 포항공대 초대 총장이었던 김호길(1933~1994) 박사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부산 고등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과학적 사고’에 대한 강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가속기 물리학자였으며, 세계적인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사회자는 소개했다.

지금까지 그의 강의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과학적 사고’가 아니다. ‘이치에 맞지 않다’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주장 때문이다. 박사의 소싯적에 노랑머리 선교사들이 안동에 기독교를 전도하려 왔던 모양이다. 그때 안동의 어르신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는 선교사들의 믿음을 불신하며,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치에 맞는 추론’이 곧 과학적 사고이다. 유교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근본적 믿음으로 한다. 하여 속칭 ‘예수쟁이’의 하나님은 아니더라도, 하늘 혹은 천제(天帝·하느님)는 인정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느님’(하늘+님=‘ㄹ’ 탈락)은 서로 배척관계는 아니다. 종교에 따라 달리 이름할 뿐 같은 지시대상인지도 모른다. 한데 왜 안동의 양반 어르신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을까? 숙문(宿問)을 품었다.
여담이지만, 김호길 박사의 동생 김영길(1939~2019)은 재료공학 박사이다. KAIST 교수를 거쳐 개신교계 대학인 한동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김영길은 형과는 달리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모양이다. 그는 한국창조과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창조과학회는 창조설에 과학의 용어를 사용하여 재구성한 창조과학 중에서 지적 설계를 홍보하는 단체이다. 형제이고 같은 과학자인데, 세상을 보는 눈은 이처럼 다르다.
왜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을까’의 숙문은 사서삼경을 통독해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15년여 전 낙향을 하고, 인근 도시인 진주의 서점에 한 번씩 들렀다. <진주문고>에서 묵점 기세춘 선생의 『동양고전산책1,2』, 『성리학개론상,하』 등을 발견하고, 밤 새워 내리 읽고서야 비로소 숙문을 풀었다.
공맹의 ‘유학’과 동중서의 ‘유교’와 정주(정이와 주희)의 ‘성리학’은 다르다. 물론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은 같다. 유학과 유교와 성리학의 변천과정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다만, 현재의 논의 중심은 아니므로, 간략히 소개하고 다음으로 미룬다.
공자의 학문(유학)은 군왕의 좋은 신하가 되기 위한 ‘군자학’이다. 유가들 스스로 유학을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 또는 군자학이라고 말했다. 공자가 말한 군자는 ‘대부(大夫) 이상의 관장(官長)’을 존칭한 것이다. 따라서 『논어』는 일반 백성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는 책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천(天)을 제(帝)로 표기한 적이 없다. ‘천명(天命)’으로 쓸 뿐이다.
또 공자는 지혜에 대해 “민의 뜻을 이루고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敬鬼神而遠之), 가히 지혜롭다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논어/옹이). 곧, 경신도 지인(知人·사람을 아는 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게 공자의 종교정책이었다.

동중서(BC176?~BC104)는 한 무제에게 독존유술(獨尊儒術·제자백가 사상 중 유학만 정통적 학문으로 존중)을 건의하여 유학을 유교로 만들었다. 그 방법은 추연(BC 305~BC240. 제자백가 중 음양가의 대표적인 인물)의 음양오행설과 공맹의 오덕을 결합한 것이다.
동중서는 천(天)과 인(人)은 하나라고 생각했으므로, 자연도 사람과 똑같이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천인은 서로 감응(天人感應)하므로 왕권은 하늘의 명령(天命)이며, 왕도의 모든 제도와 도덕과 법은 하늘(天)의 재가를 받은 천도(天道)로 절대화했다.
그러므로 유교는 공자 사후 300년이 되어 유학을 기초로 창립한 종교이지만, 유학과 다르다. 유교의 천(天)은 공자의 천명설과 맹자의 “천명은 곧 천성(天性)”이라는 성명론(性命論“을 계승하지만, 그 골격을 이루는 것은 고래(古來)의 민간신앙인 천인감응설이다. 이러한 참위학(讖緯學)이 공자 본래의 경학(經學)을 누른 결과 유교는 미신화의 경향으로 흐른다.
하늘은 왕의 덕이 족히 민을 안락하게 하면 왕권을 내려주고,
그 악함이 족히 민을 해치면 그것을 다시 빼앗는다. -동중서/춘추번로-
한(漢) 말 농민 반란인 이른바 황건(黃巾)의 난을 주도한 것은 도교 세력이었다. 도교 세력의 흥성은 유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학은 본래부터 경세학(經世學)이었으므로 형이상학은 아니었다. 더구나 민간의 도참설을 끌어들여 종교화했으나,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한나라가 무너지자 그 효력은 쇠퇴했다.
이후 당나라 때의 유학도 극도로 쇠미해져 도교의 보조 역할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당이 망하고 송(宋)이 일어나자, 유교는 활력을 되찾고 나아가 불교와 도교를 흡수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유학을 세우려 했다. 이때 주희가 나타나 주돈이(1017~1073), 정이(1033~1107) 등의 도학과 장재(1020~1077)의 기학(氣學) 등 신유학운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체계화한 것이다.
우리가 자주 쓰는 이성(理性·reason)은 성리학에서 유래했다. 성리학은 그 이성에 대한 학문인 ‘이성학’이다. 승려들의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것을 우리는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작 마음과 본성에 대한 공부가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은 너무도 먼 것으로 느낀다. 대체로 성리학은 너무도 도덕적이고 현학적이며 당파적이고 고루하다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마음을 정신(精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기(精氣)의 신’이라는 뜻이다. 성리학에서는 이 마음(정신)이 천리(天理)와 같으며, 태어날 때 하늘에서 품부 받은 본성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을 이성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치는 곧 본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성’ 또는 ‘성리’란 우리의 본마음이 곧 천리(天理)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천신(天神)이 우리 마음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의 이치(理)이고 기운(氣)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리학을 ‘이기론(理氣論)’이라고도 한다.
하여 성리학에서는 창조주로서의 신을 부정하고, 대신 이(理)를 세계의 창조주로 보고, 그 이가 인성(人性)과 동일하다고 본다. 나아가 천과 인을 하나로 보며 천인합일(天人合一)이야말로 인간의 도덕적 목표라고 봤다.
김호길 박사와 안동 어르신들은 분명 성리학자거나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창조주 하나님의 선교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판단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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