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시학 2호-지역 문학예술지】 고성 근대 첫 어린이문학인 김재홍 - 차수민
【장소시학 2호-지역 문학예술지】 고성 근대 첫 어린이문학인 김재홍 - 차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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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4.24 10:20
  • 업데이트 2023.04.2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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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문학예술지

 

고성 근대 첫 어린이문학인 김재홍

차 수 민

 

1. 들머리

고성 지역 근대 어린이문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은 지금껏 체계적으로 파악되지 않았다. 게다가 개별 작품과 작가 연구 또한 초기 단계에 머문 실정이다. 글쓴이는 김형두의 기행수필 연구1)를 처음으로 그의 초기 어린이문학에 관한 글을 더하여 『장소시학』 창간호2)에 실었다. 그 일의 둘레길에서 만난 이가 김재홍이다.

김재홍金在洪은 나라잃은시대 경남 고성을 무대로 활동한 아동문학인이자 시인이었으며 지역의 청년 활동가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전반적인 삶은 물론 출생과 생몰 연대도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아동잡지에 투고한 사실과 일간지에 이름이 오른 경우를 살펴 그의 삶을 단편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김재홍은 고성 문학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작품과 이름이 1924년 『신소년』 4월호에 올랐다. 그 시기 고성에서 『신소년』에 가장 많은 작품이 활자화된, 근대 고성문학의 앞자리에 놓이는 문인이다.

이 글은 김재홍에 대한 개별연구 첫 자리다. 다만 경남‧부산 지역문학을 다룬 논문에서 가끔 그의 이름과 문학작품 제목이 오르내렸다.3) 김재홍이 문학 활동을 선보인 주 갈래는 동요와 시, 작문이다. 그즈음 다른 문학인들이 『어린이』를 시작으로 『신소년』, 『별나라』, 『아이생활』 등의 아동 잡지는 물론 여러 갈래를 걸쳐 투고 활동을 한 경우와 달리 그는 주로 『신소년』에 많은 작품을 올렸다. 드물게 일간지와 문단 매체도 활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김재홍의 문학 활동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으로 첫째, 그의 삶의 자취를 따라 문학 배경을 밝혀 활동 무대와 활동 시기를 짚어보고자 한다. 둘째, 지금까지 밝혀낸 그의 투고 작품을 소개하여 갈무리하고자 한다. 더불어 김재홍이 설립한 고성 창명학원의 형성과 그가 가르친, 소년문사들의 활약상을 살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밝혀진 김재홍의 초기 문학 활동과 창명학원, 곧 1920년 초반부터 1930년대까지 언론 매체에 발표한 작품이나 보도기사가 모두 연구 대상이 된다. 이 글로 고성 지역 문학 둘레길이 차츰 풍요롭게 가꾸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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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수민, 「김형두의 기행수필 연구」, 경남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5.
2)차수민, 고성 문인 김형두의 초기어린이문학, 장소시학창간호, 꼬꼬야, 2021, 140-180
3)박태일, 「나라잃은시기 아동잡지를 통해서 본 경남‧부산지역 아동문학」, 『한국문학논총』 제37집, 한국문학회, 2004, 165-168쪽.

 

2. 김재홍의 삶을 찾아서

청년 시인 김재홍은 문학 안에서만 머문 사람이 아니다. 왕성한 청년 계몽가, 실천적 활동가로서 모습이 뚜렷하다.4) 문학 활동을 선보였던 시기 이전부터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청년 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그런 기록은 그 무렵 일간 매체를 통해서 확인된다. 먼저 창명학원 교사 활동이다. 1929년 1월 5일 『동아일보』에서는 각 군의 교육기관, 경제단체와 사회단체 등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해당 기사에는 경남의 작은 군 고성의 여러 교육기관을 소개하는 자리도 있었다. 그 자리에 창명강습소 기사가 올랐다.5) 창명강습소가 그 무렵 고성 지역을 대표하는 사설 배움터라는 확신을 뒷받침하는 기사다.

그 자료에 따르면 창명강습소는 1920년 2월 3일 김재홍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생도 수는 25명, 현재 생도는 56명이며 교원은 2명임을 밝혔다.6) 그리고 현재 소장은 김재홍으로 강습소의 구체적인 소재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재홍은 적어도 1920년부터 1929년 동안 아홉 해나 고성 지역에서 강습소를 운영한 것이다. 그 사이 1925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경남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 창명강습소의 선생으로 김재홍을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그의 청년활동의 보도 자료를 살피면, 1926년 11월 18일 『조선일보』에 김재홍 관련 기사가 보인다. “1923년 7월에 삼산청년회가 창립되어 사업으로 청년운동을 주로 하며 연령 제한이 앞으로 있을 예정이라는 안내와 함께 현 간부로는 김재홍, 임생호 이외 다른 사람이 있다.”고 적었다.

또한 1925년 11월 16일 『동아일보』에는 고성 거류면 공보설립 기성회를 조직한다는 기사와 함께 여러 임원을 소개했다. 그중 김재홍 이름이 서기 자리에 놓였다. 그리하여 거류면 각동 유지의 다수 화합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결의를 진행하였다는 기사를 덧붙였다. 말하자면 김재홍은 일찍부터 고성 지역에 터를 두고 사립 교육기관을 운영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비록 식민 교육기관이긴 하나 정식 제도 교육기관인 ‘공립보통학교’ 설립까지 목표를 세워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재홍은 창명학원의 소재지 삼산면 인근 마을을 넘어 고성군 단위 연합 활동으로 청년 활동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1926년 7월 8일 『조선일보』 1면에는 “고성군맹, 즉 경남 고성군 군연맹에서는 청년회관에서 제2회 정기대회를 열고 예산 편성과 농민조합 구성, 소년회 조직과 함께 민중운동자대회 대표자 선거에 관한 건을 토의했다.”고 전했다. 그 위원으로 총무부 김상욱 이하 조직부에 김재홍, 교양부에 임생호의 이름을 올렸다.7)

또한 고청연맹(경남고성청년회 고성군청년연맹)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김재홍의 열성적인 지역 활동을 찾아볼 수 있다. 1925년 11월 24일에는 당월 11일 고성청년회관에서 고청연맹을 개최하였는데, 집행위원에 김재홍, 임생호의 이름이 나란했다. 그 자리에는 전갑봉, 황웅도와 같은 지역 애국지사8)들도 이름을 함께 했다.

상세하게 보도된 위 기사는 1920년대 중후반 무렵 고성군 청년연맹이 만들어진 배경을 살필 수 있게 한다. 기사에 따르면 고성군청년연맹은 1925년 12월에 고성청년회, 삼산청년회, 거동청년회9), 3개 단체로 창립되어 세포단체 5개 단체로 발전했다. 청년운동 단체의 연합기관으로 현 간부는 전갑봉, 공용석, 김재홍, 박정숙, 이영순 들이었다.10) 이를 미루어보아 1920년 초중반기에 김재홍이 중심이었던 삼산청년회의 활동 반경은 고성읍까지 닿았으며 중후반에는 그 구체적인 성과가 고성 지역 전반에 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간지 기사를 통해 살핀 김재홍 관련 기사를 아우르면 그는 삼산 지역을 텃밭으로 삼산을 넘어 고성군 연합활동, 청년운동, 교육 활동과 더불어 여러 고성 지역 발전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수가 거의 없었을 사립 강습소를 이끄는 교사로서 청년 활동가로서 고충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김재홍의 행정 기록을 삼산면이나 고성 안쪽에서는 얻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의 출생과 성장, 사망에 얽힌 기초 조사가 어렵다. 다만 확연한 사실은 한 소지역에서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강습소를 운영하면서 그 활동과 조직 범위를 고성군 전체로 아우를 수 있었던 이가 김재홍이다, 정확한 출생지는 알 수 없으나 고성 삼산면 출생과 확실한 고성 연고는 변하지 않을 사실임을 알 수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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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글쓴이의 조사에 의하면, 진주에서도 김재홍의 이름으로 열성적 청년 활동을 한 이가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진주 김재홍(金在泓)은 김재홍(金在洪)과 한자 이름이 달랐다. 또한 진주 김재홍의 이름으로는 『신소년』을 포함한 문학 매체나 일간지에 작품이 오른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고성 김재홍의 청년 활동 시기인 나라잃은시대에 진주의 김재홍 또한 청년으로서 지역 활동은 물론 사상단체, 다양한 조합 활동 등을 선두에서 관여하였다. 그러므로 나라잃은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관한 사항은 이 글에서 논외로 삼았다. 뒷날 김재홍의 청년 활동의 배경을 더 넓고 깊게 살피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
5)「현저히 발달된 찬연한 지방문화 기 5-각 군별의 상세조사, 고성군,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9. 1. 5.
6)「현저히 발달된 찬연한 지방문화 기 5-각 군별의 상세조사, 고성군, 동아일보, 동아일보사, 1929. 1. 5.
7)「고성군맹, 조선일보, 조선일보사, 1926. 7. 8.
8)전갑봉은 1927년 6월 30일 고성청년대회에서 집행부 일원으로 임시 의장을 맡았으며, 1926년 10월 26일 농민조합 발기하여 창립준비위원으로서 집행위원회 겸 교육출판부를 담당했다. 그리고 1929년 8월 19일 고성신간지회 서기장을 일임하였다. 황웅도는 1926년 10월 26일 농민조합 발기 집행위원회 겸 총무부를 담당했다. 그는 1920년 고성농민야학회의 회장을 기점으로 고성농민조합을 1926년 10월 5일 창립하여 조합장으로서 농민생활의 개선과 경제적 평등에 앞장섰다.
9)거동청년회는 1925년 현재 고성군 거류면과 동해면을 합한 말이다.
10)고성지국 일기자, 「지방만필-사회단체, 고성종횡관 2」, 『조선일보』, 조선일보사, 1926. 11. 18.
11)글쓴이의 여러 번 두포리 방문에도 김재홍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조사해 본 결과 고성 삼산면에는 그의 호적이 없음을 확인한 상태이다.

 

3. 김재홍의 초기 어린이문학

김재홍은 1924년 4월 자신의 주소지를 경남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로 올렸다. 『신소년』 ‘작문 상’ 면, 「우리 신소년 형님들에게」12) 자리다. 아동잡지에 김재홍의 작품과 이름이 실린 처음이다. 물론 그 몇 달 앞 고성 문사로서 김정기라는 이름이 보인다. 『신소년』 1924년 1월호(제2권 1호) ‘애독자명부’ 란이다. 고성군 서외리가 주소였다. 김정기는 그 뒤 3월호 ‘동화부’에 이름이 보이지만, 아쉽게도 투고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글쓴이가 앞서 다룬 김형두(1909-1977)의 경우는 1925년부터 입선 작품이 보인다.13) 작품으로 선뵈는 고성 첫 근대문학인이자 어린이문학인이 바로 김재홍이다.

현재로서 김재홍의 어린이문학 글은 『신소년』에서만 보이지만, 청년 문학인으로서 여러 작품을 다양한 매체에 투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결과로 보면 활동 무렵 다른 어린이 잡지 매체에서는 김재홍을 볼 수 없다. 이렇듯 『신소년』을 중심 발표 매체로 선택하고 있는 모습은, 김재홍과 『신소년』 사이에 남다른 연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김재홍의 초기 어린이문학 작품이나 투고 사실을 다 살피면 아래와 같다.

「우리 신소년 형님들에게」(작문 상), 『신소년』 4월호(제2권 4호), 1924.
「독자명부」(고성군 삼산면 두포리 김재홍), 『신소년』 4월호(제2권 4호), 1924.
「초생달」(동요 상)(독자문예), 『신소년』 5월호(제2권 5호), 1924.
「여러 선생님들」(독자통신), 『신소년』 5월호(제2권 5호), 1924.
「자유화 발표」(가작), 『신소년』 5월호(제2권 5호), 1924.
‘작문’(선외 가작), 『신소년』 5월호(제2권 5호), 1924.14)
‘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7월호(제2권 7호), 1924.
「우리의 전정(前程)」(작문 상), 『신소년』 7월호(제2권 7호), 1924.
‘동화’(게재 외 가작), 『신소년』 8월호(제2권 8호), 1924.
‘작문 선후에 늣김’, 『신소년』 1월호(제3권 1호), 1925.
「첫눈」(동요)(독자문예), 『신소년』 1월호(제3권 1호), 1925.
「고흔 꼿」(동요)(독자문예), 『신소년』 4월호(제3권 4호), 1925.
‘작문’(선외 가작), 『신소년』 4월호(제3권 4호), 1925.
「일기 중에서」(작문 선후감), 『신소년』 7월호(제3권 7호), 1925.
「기도(祈禱)」(당선시), 『조선문단』 7월 특대호, 조선문단사, 1925.
「씨누와 올키」(동요)(독자문단)15), 『신소년』 8월호(제3권 8호), 1925.
「왕거미줄」(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8월호(제3권 8호), 1925.
「고대하던 감우(甘雨)」(작문)(독자문단), 『신소년』 8월호(제3권 8호), 1925.
「족기 자랑」(동요)(독자문단)16), 『신소년』 9월호(제3권 9호), 1925.
「귀성하신 벗들에게」(작문)(독자문단), 『신소년』 9월호(제3권 9호), 1925.
「등화(燈火)를 가친(可親)할 가을이 왓다」(작문)(독자문단), 『신소년』 11월호(제3권 11호), 1925.
‘동요’(선외가작)(독자문단), 『신소년』 11월호(제3권 11호), 1925.
「동량 왓소」(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12월호(제3권 12호), 1925.
「사랑하는 종산(鍾山) 형의게」(작문)(선외가작), 『신소년』 12월호(제3권 12호), 1925.
「김재홍 형님」(담화실)(평양 윤산곡), 『신소년』 12월호(제3권 12호), 1925.
「촛불」(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2월호(제4권 2호), 1926.
‘작문’(가작), 『신소년』 2월호(제4권 2호), 1926.
「김재홍 형님에게」(담화실)(송완순), 『신소년, 4월호(제4권 4호), 1926.
「은구슬」(소년시)(독자문단), 『신소년』 6월호(제4권 6호), 1926.
「제갈대로」(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6월호(제4권 6호), 1926.
「벅국새」(동요), 『신소년』 7월호(제4권 7호), 1926.
「반듸불」(동요), 『신소년』 8월호(제4권 8호), 1926.
「가을은 왓도다」(소년시), 『신소년』 1월호(제5권 1호), 1927.
「부음」(동요)(소년문단), 『매일신보』, 1927. 6. 26.
「김재홍 강중규」(담화실)(진주 장갑수), 『신소년』 7월호(제6권 5호), 1928.
「추야독음」(동요), 『청년시인백인집』(『조선시단』 제5호 특대호), 조선시단사, 1929.
「겨울 밤비」(동요), 『신소년』 2월호, (제8권 2호), 1930.
「녹쓰른 바눌」(동요), 『신소년』 2월호, (제8권 2호), 1930.
「폐학」(동요 5월), 『신소년』 5월호, (제8권 5호), 1930.

위 목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재홍은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신소년』을 중심으로 일간지와 문단 매체에 작품을 투고하여 모두 39차례 작품 또는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작품이 오른 것은 21회, ‘선외 가작’ 또는 ‘담화실’에 이름만 오른 경우는 18회였다. 시기로 보면 1924년 상반기, 1925년 상하반기, 1926년 상반기, 1930년 상반기에 가장 활달한 투고와 작품 활동을 벌였다. 그중에서도 한 해 동안 빠지지 않고 매월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시기는 1925년이다. 해당 월에 두 작품이 활자화되어 오른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신소년』 8월호에 실린 「씨누와 올키」 작품과 「고대하던 감우」, 9월호의 「족기 자랑」와 「귀성하신 벗들에게」가 그것이다.

달아 달아 초생달아/어듸 갓다 인제 왓나/새각씨의 눈썹 갓고/늙은 니의 허리 갓다/어서 어서 잘아나서/거울 가튼 네 얼골노/왼 세계를 빗치 주게

- 「초생달」

「초생달」은 1925년 『신소년』 5월호에 올라 동요 갈래로 첫선을 보이는 작품이다.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 창명학회 김재홍 이름으로 올랐다. 그믐날 지나 밤하늘에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반가움과 애정을 드러냈다. 말할이는 초승달을 보며 어디 갔다 왔는지 물으며 그 모습을 새각시의 눈썹 같고 늙은이의 굽혀진 허리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초승달이 어서어서 자라서 온 세상을 비추길 바라는 희망을 담았다. 초승달을 의인화하여 적절한 머그림을 그려내어 시인의 의식이나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한 셈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어지럽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초승달이 자라 밝히듯 본인도 굳건하고 강하기를 바라는 맘을 적절히 드러냈다.

나는 기도함니다/고적과 번민의 장중에서/낙원을 찻고저 부르지지든/외로운 나의 몸을/건저 줄 벗님들/지시하여 주신 하느님에게/나는 기도함니다/암흑과 타락의 굴 속에서/대로를 찻고저 밤낫으로 헤매든/어린 나의 영혼을/인도하여 줄 벗님을/엇게 하여 주신 하느님께

- 「기도」

위 작품은 1925년 『조선문단』 7월 특대호에 ‘당선’되어 실렸다. 어린이문학인 김재홍이 아니라 드물게 시 갈래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말할이는 낙원을 찾기 위해, 암흑과 타락의 굴에서 외로운 자신의 몸과 영혼을 건져주고 인도할 벗님을 얻게 된 일에 대한 감사를 바치고 있다. 곧 기도시다. 말할이가 밤낮을 부르짖고 헤맨 이유는 낙원樂苑과 대로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개인의 안락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일을 헤쳐나갈 벗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다.

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미력한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께 간구하는 담담한 기도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시를 통해 세 가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김재홍의 정신 바탕과 활동 영역에 기독교라는 종교적 연관 고리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둘째,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의 존재와 그들을 향한 연대감 표현이다. 이는 김재홍이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창명학원을 이해하는 한 실마리가 된다. 셋째, 김재홍이 단순히 어린이문학인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사로서 어린이 훈육이나 교육 활동을 위해 어린이시나 동요를 창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김재홍은 일반 문예지 『조선문단』에 ‘당선’ 형식으로 시를 발표했다. 어린이문학 김재홍으로서보다 시인 김재홍으로서 활동을 점치게 한다. 비록 일반시가 많지는 않지만, 김재홍이 전문 문학인으로서 자기 성장을 계속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당금 땅에 솔을 심어/거무 비단 꼿이 피여/씨누 올키 꼿꺽다가/쏘닷닷녜 소닷닷녜/대동강에 쏘닷닷녜/서당 갓든 우로 압시/책갑을랑 엽헤 끼고/장척을랑 손에 들고/헌배 헌배 오시더니/요내 손목 던져 놋코/처군 손목 잡는고나/처군 하나 죽어저도/잇고 잇고 또 잇는대/동생 하나 죽어지면/움이 날가 싹이 날가/갓도 업는 한 바다에/링어밥이 되어 가녜/나도 죽어 황텬 가서/낭군 부탐 셍길 나녜

- 「씨누와 올키」

산이 타고 강이 마르든 무서운 작년 대한에 놀낸 가삼이 아직까지 진정도 되기 전에 금년에도 이 개월 동안이나 한 번도 흡족한 비가 오지 아니하고 감음만 연속하니 야색은 염분에 저진 드시 백화가 되고 만지라. 농부들은 얼빠진 사람처럼 아모 갈피를 못 잡고 대소란을 이르키고 잇더니 불행 중 다행으로 금강석으로도 박구지 아니할 한 줄기 감우가 오기 시작하야 끈일 새 없이 이(二) 주야나 연속하니 누가 일적 천금이라 아니하리오. 고대하든 농부들은 깁븜을 익이지 못하야 수무와 족도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이제는 걱정 업스니 한 잔 톡톡히 마시고 취해 보자”하는 농유로운 소라17)가 부패하여 가는 농촌의 묵은 공기를 새로히 환기하는 듯하다. 이때를 놋치면 일년의 활계가 속절업시 수포화하리라 하야 농부들은 괴로운 줄도 모르고 도로여 흥을 내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내기에 매우 분주하다. 아아 이번 비야 참으로 고갈병에 신음하든 민심을 소생케 하는 생명수이다.

- 「고대하던 감우(甘雨)」

김재홍이 가장 열성적인 투고 활동을 보였던 1925년은 모두 14차례 『신소년』 지면에 이름이 올랐다. 위 두 작품은 같은 해 8월호에 함께 실린 작품으로 동요와 작문이다. 「씨누와 올키」는 ‘전래’라고 붙인 것과 같이 전래 민요를 활용한 짜깁기 작품이다. 오라버니를 두고 시누이와 오라버니댁 사이 관계를 재미있게 풀어낸 노래다. 「고대하던 감우」는 갯가 마을 두포리의 농사 풍경을 그려 담은 글이다. 모내기철을 맞아 두 주야나 비를 보았으니 올해는 지난해와 같은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즐거운 마음을 담았다. 바다를 끼었으나 논밭에 기대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바다 농사를 버릴 수도 없었을 지역 민심이 잘 담긴 글이다.

김재홍의 두 편이 실린 『신소년』 8월호에는 그 뒤를 잇는 김형두의 ‘담화’ 글이 ‘통신’ 란에 실렸다, 이어 9월호에도 김재홍의 동요, 작문과 함께 비록 제목만 실렸지만 김형두의 선외가작으로 뽑힌 동요 작품 「비」가 보인다. 이 무렵 고성읍 고성학원 강습생 김형두와 창명학원의 교사 김재홍이 전국 소년문사들의 활동 무대였던 『신소년』에 함께 이름을 올려 고성 문학의 열기가 만만치 않았음을 잘 보여 준다.

그이를 이별하고/음황한 가을밤 길/홀로 오노라니/풀 끝테 맷친 이슬/님 뿌린 눈물인가/옷자락 다 저스네/저 건너 저 벌판에/누르케 익은 곡식/나와 님 여름 동안/손수로 매여 가꾼/피땀의 결과라네.

- 「추야독음」

위 글은 황석우가 편집한 『청년시인백인집』(1929)에 실렸다. 「기도」에 이어 두 번째로 보이는 일반시다. 이미 시의 주제나 표현에 있어 동요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다. 가을밤 이별한 ‘님’을 홀로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함께 노력해 키웠던 벌판 누렇게 익은 곡식이 이음매다. 따라서 이 시에서 ‘그이’ 또는 ‘임’으로 표현된 대상은 단순히 남녀 사이 연정의 대상으로서 여자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름 동안” ‘피땀’을 같이했을 그이는 바로 앞서 「기도」에서 보았던 ‘벗님’을 다르게 표현한 일컬음임을 알 수 있다. 청년 문학인이자 지역 교육 현장의 실천 지식인으로서 열심히 두리 사람들과 뜻을 모아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 제도 바깥에 놓여 있었던 소년들에게 배움길을 열어 주고 있었던 김재홍의 심정이 담긴 작품이다.

들창 밧게 보슬보슬 나리는 비는/눈바람이 솔솔 부는 겨울밤 찬비/방울방울 첨아 끗헤 맷치는 쪽쪽/조랑조랑 은구슬이 얼어서 붓네/첨아 끗헤 은구슬은 하로 밤 구슬/내일 아침 돗는 볏헤 눈물질 구슬

- 「겨울 밤비」

실패에 기피 꼬친/녹쓰른 바눌/누나가 각꼬 놀든/눈물의 바눌/그 바눌 주인이든/우리 누나는/지금은 어듸에서/무엇 하실가/누나가 도라간 지/한 해가 세 번/녹쓰른 그 바눌을/뉘가 딱글고.

- 「녹쓰른 바눌」

위 두 동요는 1930년 『신소년』 2월호에 함께 실린 작품이다. 「겨울 밤비」는 13쪽, 「녹쓰른 바눌」은 54쪽에 실렸다. 이 해 『신소년』 2월호 목차에는 향파 이주홍의 표지를 시작으로 일곱째 줄에 ‘동요’ 갈래로 김재홍이 소개되었고 바로 뒤이어 ‘아동극’에 향파의 글이 다시 올랐다. 안평원, 이성홍, 신명균, 이병화, 송완순과 같은 문학인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1930년 현재 김재홍은 시인으로서 자신이 선 자리를 당당히 보여 주고 있다.

거기다 김재홍의 동요와 함께 경남 진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정상규의 「눈 오는 날」과 손길상의 「일본 가신 옵바」의 글까지 목차에 올라 있다. 1930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경남 지역 중요 어린이문학인들이 한자리에서 자신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동요 「겨울 밤비」는 송완순(宋完淳)의 「뎐긔등」과 위아래로 나뉘어 실렸다. 3음보 정형율을 지킨 이 작품은 눈바람 부는 겨울밤 찬비가 처마 끝에 은구슬로 맺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더불어 조롱조롱 열린 그 은구슬이 하룻밤 지나 아침 해가 돋으면 녹아 사라지게 될 것을 아쉬워하는 애잔한 맘까지 담겼다. 그러한 작은 찬비의 변화에 담긴 시인 김재홍의 마음은 고성 갯가 가난한 마을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어려움 속에서도 ‘기도’하듯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있었던 교사 김재홍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녹쓰른 바눌」 또한 3음보 정형율에 맞추어 돌아가신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말할이에게는 실패에 꽂힌 바늘이 추억의 매개체다. 노랫말을 전제로 한 동요답게 정형적인 가락 안에 청년 김재홍의 정서가 잘 녹아 있는 작품들이다.

지금껏 선보인 작품으로 볼 때 김재홍은 농촌의 가난한 일상과 그로부터 얻은 애잔한 감회, 또는 암담한 현실과 그런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겨낼 힘을 향한 기도, 자기가 선 자리에 대한 굳건한 성찰과 같은 내용들을 작품에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소박하나 자연스럽게 자연물이나 대상에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형상화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나 1930년대 뚜렷하게 드러나기도 했던 사회주의 이념 도식과 같은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점은 김재홍이 비교적 온건했던 『신소년』 작품 발표에 머물었고, 보다 적극적으로 색깔을 드러냈던 카프계 소년지 『별나라』에 작품을 보내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게 만든다. 청년 시인이자 열렬한 교육자였던 김재홍이 선 자리가 그곳이 아니었으며,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소양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과도 맞물려 있다. 어떠한 이념 틀에 김재홍이 놓여 있었든, 확실한 점은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가려는 의지를 작품 곳곳에 담아 놓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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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김재홍(경남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 「우리 신소년 형님들에게」(작문 상), 『신소년』 4월호, 신소년사, 1924, 48쪽.
13)김형두는 1925년 6월부터 첫 입선 글이 『어린이』에서 확인된다. 이후 『신소년』, 『별나라』, 『아이생활』, 『학생』,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지면에도 그의 동시와 소년시 작품이 실렸다. 김형두는 1930년 4월 『중외일보』 투고에 이르기까지 ‘동요’, ‘작문’, ‘소년시’를 비롯해 ‘애독자 사진’, ‘각호 현상공모’ 등 여러 자리에 관심을 가지고 열성적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차수민, 「고성 문인 김형두의 초기 어린이문학」, 『장소시학』 창간호, 꼬꼬야, 2021, 163-164쪽
14)‘경북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 김재홍’으로 주소가 오기됨. 『신소년』 5월호, 신소년사, 1924, 61쪽.
15)‘재래(在來)’라는 말을 덧붙였다. 전래동요나 구전동요로 ‘이미 전해져 내려오던 또는 쭉 있어 왔던’ 작품을 김재홍이 재구성했다는 뜻이다.
16)‘재래’라 붙여 순연한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
17)‘소리’를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4. 김재홍 두리의 어린이문학

이제까지 고성 삼산의 시인이자 실천적 교육자 김재홍의 문학과 삶이 드러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의 활동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가 어렵게 꾸려나갔을 창명학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보다 창명학원 구성원들의 활동은 김재홍의 노력과 고심의 안쪽을 엿보게 하는 좋은 증거물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창명학원 구성원들의 문학작품 활동이다.

창명학원은 나라잃은시대 경남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에 있었던 배움터다. 1920년에 김재홍이 열었다는 기록은 앞에서도 말한 바다. 그럼에도 아직 고성 지역 안쪽에서는 창명학원에 관한 이해가 없다. 그렇다 보니 김재홍은 물론, 그가 이끌었던 창명학원 구성원들의 문학작품에 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비록 어린이, 소년 문사의 작품이지만 고성 지역문학의 중요한 자산임에는 틀림없다.

글쓴이는 앞서 김형두의 초기 어린이문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쓴 고성 지역 관련 기사에서 삼산 창명학원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1925년 4월 4일 『조선일보』가 그 자리다. 삼산 두포는 “총 호수가 팔십 호나 되”는 마을이지만 “교육기관이 일개소도 없어서 유감으로 생각하던” 중 “임문연 씨의 발기로 창명강습소를 신설”했다, “임생호, 김재홍 양씨의 무보수로 현재 학생이 사십여 명이며, 노동야학생이 이십 명이며 성적이 매우 양호하다”라 적었다.18) 이어 같은 달 14일에는 「창명강습 발전」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기사를 내었다.

무엇보다 이례적인 일은 창명학회, 또는 창명학원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1920년 초기 여러 소년문사들이 소년잡지 『신소년』에 작품을 투고했다는 사실이다. 창명학원에서 문사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교사 김재홍이 먼저 아동 매체에 작품을 선보였고, 그를 바탕으로 소년 문사들에게 문학 투고 활동을 독려해 이루어진 일이라 짐작할 수 있다.

1924년 4월 『신소년』에 김재홍의 첫 작문이 실린 후인 7월에 고성 창명학원의 학생 강응수의 동요 또한 선외가작으로 뽑혀 김재홍과 같은 지면에 올랐다. 그리고 뒷날 독자명부 란에는 창명학회昌明學會 이름으로 강응수, 구두천, 민봉의, 강남윤, 정부일이 나란히 등록되기도 했다. 그들을 다 살피면 아래와 같다.

강응수, ‘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7월호(제2권 7호), 1924.
「독자명부」(강응수, 구두천, 민봉의, 강남윤), 『신소년』 7월호(제2권 7호), 1924.
「독자명부」(정부일), 『신소년』 1월호(제3권 1호), 1925.
강응수, 「봄이 왓네」(동요)(독자문예), 『신소년』 4월호(제3권 4호), 1925.
강응수19), 「초하소감(初夏所感)」(작문)(독자문단), 『신소년』 8월호(제3권 8호), 1925.
강응수, ‘동요’(선외 가작), 『신소년』 10월호(제3권 10호), 1925.
강응수, 「실버들」(동요), 『신소년』 7월호(제4권 7호), 1926.
김계환, ‘작문’(제2차 신춘현상당선발표 3등), 『동아일보』, 1927. 01. 04.
김계환, 「새해」(작문 3등)(제2차 신춘현상당선발표), 『동아일보』, 1927. 01. 14.
김계환, 「갈닙배」(동요 가작)(현상당선아동작품), 『동아일보』, 1927. 02. 24.
김성홍, 「별」(동요 가작)(현상당선아동작품), 『동아일보』, 1927. 02. 24.
강응수, 「흰 돗단배」(동요 가작)(현상당선아동작품), 『동아일보』, 1927. 02. 24.
강응수, 「흰 돗단배」(동요), 『신소년』 5월호(제5권 5호), 1927.
강응수, 「별」(동요), 『신소년』 5월호(제5권 5호), 1927.
김계환, 「어머님 생각」(동요)(선외 가작), 『조선일보』, 1928. 02. 05.
김계환, 「여름 달밤」(동요), 『시대상』 (통권1호 부록), 1931.
김계환, 「새해」(동요), 『별나라』 1월호(통권56호 신년임시호), 1932.
김계환, ‘2월호 현상발표 2등’, 『별나라』 4월호(통권76호), 1934.

창명강습은 그 이름이 창명학회로 바뀌었다가 창명학원으로 유지되었다. 그것은 창명학원의 소년문사와 김재홍이 『신소년』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배움터 장소를 밝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창명학원 생도들의 투고 배경과 작품에 드러난 시적 소재들을 살펴 단순하나마 창명학원의 전개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들 창명학원의 문사들 또한 아동잡지 중에서도 『신소년』에 주로 작품을 보내어 김재홍과 더불어 투고하는 특성을 지닌다.

먼저 창명학원의 이름으로 『신소년』에 이름이 오른 이는 김재홍을 포함하여 모두 6명이다. 김재홍, 강응수, 구두천, 민봉의, 강남윤, 정부일이 그들이다. 이와는 달리 『동아일보』에 이름이 오른 창명학원의 문사는 김계환20), 김성홍이다. 김재홍은 『매일신보』, 강응수는 『동아일보』에서도 그들의 작품과 이름을 올렸다. 이들 중 1927년 현재 12살이었던 김계환은 가장 나중까지 문학 매체에 투고하여 본인의 문학작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창명학원 소년문사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 두포리 포교마을과 미룡리 용호마을 중심으로 생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행방 또는 자녀가 생존하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21)

김재홍과 더불어 창명학원 문사들 중에서 강응수, 김계환, 김성홍은 매체에서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문사들의 경우에는 그들 이름을 애독자명부 지면에서만 볼 수 있었다. 강응수는 1925년 4월호에 동요 「봄이 왓네」 작품이 활자화되어 실렸다. 짧은 동요이지만, 처음 지면에서 보는 자신의 글이 얼마나 놀라웠을까.

봄이 오네 봄이 오네/기다리는 봄이 오네/뒷동산 꼿밧흐로/아장아장 거러 오네//봄이 오네 봄이 오네/따뜻한 봄이 오네/앞내들 풀밧흐로/살금살금 거러 오네

- 「봄이 왓네」

이를 계기로 강응수는 꾸준하게 투고하여 1925년 『신소년』 7월호에 「실버들」 작품이 당선되었고, 1927년 5월호에는 해당 매체에 동요 두 편이 연이어 실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후 강응수와 창명학원의 소년문사들의 작품은 『신소년』에서 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김형두의 『동아일보』(1927년 10월 22일) 기사처럼, 산에 산이 중첩한 해안 삼산면에서 한 강습소의 생도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며 열정적인 투고로 문학열을 불태웠다는 사실은 새롭고도 눈여겨볼 일이다.

1
뜰 앞헤 가득 싸인/갈닙을 주어다가/노란 놈 배 맨들고/빨간 놈 돗을 달아/잔잔한 가을 강에/두둥실 띄워 노면/잘도요 떠감니다

2
끗 업시 떠난 그 배/어듸로 가슬가요/풍파도 안 맛내고/목뎍한 그곳까지/평안히 대엿슬가/갈닙배 소식 몰나/내 마음 답답하네.

- 김계환, 「갈닙배」

1
먼 바다에 흰 돗단 고기배 하나/거츨고도 우렁찬 푸른 물 우로/뎡처 업시 쫏기여 떠나가도다

2
동무 배는 다 가고 하나도 업고/모진 바람 힘차게 부러 오는데/돗단배는 어듸로 떠나 가느냐

3
해는 지고 물결은 험악하여도/섬나라인 녯 고향 다시 그리워/멀니 멀니 차저서 떠나 간다네

-강응수, 「흰 돗단배」

바다 속에 진주 가치/샛파란 저 별/어둔 밤에 보석 가치/빗나는 저 별/만약 딸 수 잇다면은/한 개 따다가/우리 아기 설치레로/채워주련만.

- 김성홍, 「별」

위 동요들은 1927년 2월 24일 『동아일보』 지면에 현상당선아동작품 가작에 뽑힌 작품이다. 고성 창명학원의 이름으로 세 작품이 나란히 실렸다. 전국 일간지인 『동아일보』에 바다와 산이 에워싼 외딴 마을 두포리에서 같은 학원의 세 생도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함께 꾸준히 글을 쓰며 실력을 연마하고 지도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927년 2월 현재 김계환은 12세로 창명학원 3년, 김성홍과 강응수는 14세로 창명학원 4년 생도였다.

김계환의 「갈닙배」는 각 연 7행으로 2연 14행으로 이루어진 동요이다. 처음 행부터 끝 행까지 한 자의 이탈도 없이 3‧4조의 율격으로 단단히 메꾸었다. 노랗고 빨간 가랑잎을 주워 가랑잎 배를 곱게 만들어 가을 강가에 띄우며 무사히 목적지까지 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망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랑잎 배가 잘 도착하였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을 내비치는 모습은 독자를 순수한 동심으로 이끈다. 이는 본인이 갈고 닦아 투고한 동요가 신문사에 잘 도착하여 당선되기를 희망하는 목소리로서도 잘 담겼다.

강응수는 본인의 희망과 꿈을 「흰 돗단배」에 얹었다. 거친 푸른 바다에 동무 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모진 바람 험악한 물결에 해는 지는데 정처 없이 쫓기는 배는 시인 자신이다. 나라잃은시대 어떠한 수모와 고난 속에서도 옛 고향 묻어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 떠나는 흰 돛단배에 자신의 굳건한 의지를 실었다. 「흰 돗단배」 또한 정형적인 율격을 안고 각각 연마다 대구법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었다.

김성홍의 「별」은 지금껏 조사한 자료를 종합하였을 때 언론 매체에 실린 그의 첫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1927년 삼산 두포리 가로등 없는 한데는 적막하다. 밤하늘에 뜬 별이 두포 바다에도 수없이 뜬 모습을 김성홍은 새파랗게 빛나는 진주로 표현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는 않지만, 밤하늘의 별을 딸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딸에게 설 치레로 선물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이 오롯이 전달된다.

창명학원의 세 소년, 각자의 당선작품이 실린 동아일보 지면을 손에 쥐었을 때 그들 밀실의 꿈과 희망이 바다에서 들판에서 빛났을 것이다. 나라잃은시대 짓밟힌 자유, 나라 잃고 고유의 말글도 잃고 동무도 잃은 젊은이들. 나름의 꿈들을 김계환은 가랑잎배에, 강응수는 흰 돛단배에, 김성홍은 별에 간절히 담아 두포 바다 푸른 물결 위에 띄웠다. 그들의 동요에 누군가 음표를 달아준다면 그들 꿈은 노래가 되어 삼산 팥섬, 나비섬, 문래섬까지 닿아 고성의 새로운 문화 물결로 이바지하기에 충분하다.

 

4. 고성 삼산의 어린이문학 둘레길

이 글에서 글쓴이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김재홍의 초기 어린이문학을 소개하고, 고성 삼산면 두포리 창명학원의 형성과 소년문사들의 활약상을 알렸다. 김재홍金在洪은 아직 온전한 생애가 밝혀지지 않은 이다. 1920년 초반부터 청년의 몸으로 그는 경남 고성에서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신소년』에 여러 작품을 선뵌 첫 고성 근대 어린이문학인이다. 그는 또한 문학 활동에 앞서 1920년부터 삼산청년회, 고성청년연합동맹 등에 몸담아 10년 가까이 열성적 청년 활동가로서 강습학원 설립과 지도, 다양한 방면의 지역 발전에 힘썼다.

창명학원은 나라잃은시대 경남 고성군 삼산면 두포리에 있었던 배움터이다. 임문연 씨의 발기로 신설된 창명강습소는 임생호, 김재홍이 무보수 교수로 일했던 곳이다. 이름을 창명학회를 거쳐 창명학원으로 바꿔가면서 1920년대 고성 지역을 대표하는 사립 배움터로서 발전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눈여겨 볼 점은 창명학원을 빌려 여러 소년 문사들이 『신소년』을 비롯한 잡지와 일간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문학을 활발하게 선뵀다는 사실이다. 1924년 4월 『신소년』에 김재홍의 첫 작문이 실린 이후 이어졌던, 고성 창명학원의 학생 강응수, 구두천, 민봉의, 정부일, 강남윤, 김계환, 김성홍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의 특별하고도 활발한 무리 활동은 바로 교사이자 청년 문학인 김재홍의 노력과 지도가 빛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전기적 사실과 활동 전반에 걸쳐 충분하게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김재홍 문학이 지니는 의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김재홍의 문학은 근대 초기 고성 문학의 첫 자리를 이루는 빛나는 전통이다. 고성 문학인으로서 1920년대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기성 시인으로서 어린이문학인으로서 활동한 첫 본보기를 그의 문학이 이루는 셈이다. 그 뒤를 이은 이가 김형두다. 둘째, 고성 삼산의 창명학원이라는 배움터를 발판으로 고성 지역 전반으로 넓혀나갔던 김재홍의 활발한 어린이 교육 활동과 청년 사회 활동은 1920년대 고성 근대 지역사의 빈 자리를 채울 중요한 고리를 이룬다. 앞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경남ㆍ부산 지역 문학인이나 청년 활동가들과 비교, 대조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길 바란다. 김재홍에 대한 온당한 평가는 그러한 노력을 통해 더욱 섬세해질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서 김재홍은 고성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십 여 년에 걸친 활동 끝의 잠적이다. 그것은 어떤 뜻을 지니는 것일까? 1920년대 고성 지역지는 물론 앞으로 글쓴이를 비롯해 고성 향토지나 지역문학에 책임을 진 이들이 더욱 깊이 파고 들어야 할 일거리가 적지 않게 남았다. 그런 일들이 제대로 결실을 맺어 김재홍의 삶과 문학이 고성 지역의 중요 문화 자본으로 올라서기를 기대한다. 그럴 경우 무엇보다 김재홍의 어린이문학과 창명학원 활동부터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재홍과 창명학원 소년 문사들의 삶과 배움터였던 고성 삼산면 두포길, 보리섬에 그들의 시비가 우뚝 서 있는 날을 기대한다.

 

도움글

『신소년』, 『별나라』, 『아이생활』, 『조선문단』, 『시대일보』, 『중외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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