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장하준의 생각 -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조송원 칼럼】장하준의 생각 -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4.30 11:16
  • 업데이트 2023.05.0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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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1912~2006)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1976년)다. 노벨상은 학문적 권위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프리드먼의 노벨상 수상 이후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은 그의 경제정책을 받아들여 현실에 적용했다. 그리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프리드먼의 흑역사는 ‘경제학이 과연 믿을 수 있는 학문인가?’에 대한 의념을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 프리드먼은 1973년에 쿠데타로 3000여 명을 학살하며 아옌데 당시 대통령의 진보 정권을 몰아내고, 칠레 정권을 불법 찬탈한 군부 독재자 피노체트를 지지했다. 프리드먼의 제자들이 피노체트 정권의 경제부처와 중앙은행을 이끌었고, 프리드먼도 두 차례나 칠레에 다녀왔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했고, 가격과 임금 그리고 수출입 규제를 철폐했다. 처음엔 인플레가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등 효과가 있는 듯했으나, 생산이 급감하고 임금은 크게 하락했으며, 실업률이 급증했다. 경기침체가 지속하고 대외부채가 급증하는 등 파탄 상태가 됐다.

밀턴 프리드먼

프리드먼은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고, 자유시장에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를 대단히 강조하여 스스로를 자유지상주의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 특히 자산가들이 재산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자유에 국한됐다. 이런 자유가 과연 우리가 통상적으로 갖고 있는 자유의 개념이며, 우리가 원하는 자유일까?

프리드먼의 자유지상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는 어떤 의미인가? 자유주의의 원래 의미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사용된 자유주의이다. 개인자유를 유일한 궁극적 가치로 인정하고, 개인의 권리와 책임을 중시하여 개인의 사회활동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간섭을 반대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자유주의는 복지와 균등배분을 자유주의의 전제조건으로 보고 이를 위한 정부 개입의 부활을 옹호하고 나섰다. 진보적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프리드먼은 19세기적 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를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20세기적 자유주의(진보주의)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주의를 자유지상주의라 부른 것이다. 곧, 국가가 어떤 개입도 하지 않을 때 경제는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가며, 각종 규제·노동자 보호·사회보장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고 모두를 가난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었다. 프리드먼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그가 죽고 불과 2년 뒤(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대한 위기감이 팽배했다. 부의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의 원인 중 하나도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이다. 이 모든 경제위기 사태의 근본 원인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 경제정책에 연유한다는 비판이 이미 나와 있다.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는 프리드먼이 아내 로즈 프리드먼과 함께 1980년에 쓴 책으로 공영 방송에 방영된 자유시장경제를 논하는 10회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가 경제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줄이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늘리는 것이며, 시장 자체의 선순환을 통해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미 그 유용성이 제한적임이 증명된 이론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책을 학창 시절에 애독했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35번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외치는 ‘자유’가 프리드먼이 주창하는 자유인 듯하다. 일체의 규제를 반대하는 기업의 자유, 노동자를 해고할 자유(노동유연성), 심지어 환경을 마음대로 파괴할 그런 자유 말이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대통령의 학습지체 현상은 국가경제에, 아니 국민 개개인의 삶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40여 년 전의 철 지난 우파 극단주의 책을 붙들고 철 지난 자유 타령을 하고 있는 반지성적 대통령을 보고 있노라면, 경제학이란 학문에 대해 다시금 생각게 된다.

장하준 교수(런던대 경제학과)의 여러 저작과 주장은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시장은 ‘1원 1표’이다. 돈을 가진 만큼 영향력을 갖는다. 시장을 통해서는 돈이 없는 일반 국민이 사회적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누구나 받아야 하는 수돗물이나 우편 등 공공 서비스를 시장에 맡겨 놓으면, 적자가 발생하는 지역의 많은 국민은 이 필수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여러 지역의 철도 노선이나 시골의 버스 노선은 폐쇄될 것이다.

이래서는 균형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하여 ‘1원 1표’의 시장논리를 ‘1인 1표’의 정치 논리로 제약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시장은 중요하고, 사회에 대한 공헌도 지대하다. 그러나 사회의 필수 공공서비스 등 사회의 대강은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서 정해야 하는 것이다. ‘먹는 물, 의료 등을 민영화할 것인가?’ 등은 시장 원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민영화가 반드시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교통 요금이 우리보다 훨씬 비싼 것은 민영화 탓이다. 미국의 의료는 완전히 민영화되어 있다. 미국 GDP의 17퍼센트가 의료비이다. 선진국 중 국민소득 대비 의료비 지출이 가장 높다. 그러나 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 하위권이다.

장하준 교수는 최근(2023.3.30.)에 신간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경제학이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를 바꾼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제학 이론이 세금, 복지지출, 이자율, 노동 시장 규제 등의 정부 정책에 영향을 주고, 이런 정책은 우리 일자리와 노동 환경, 임금,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를 바꾼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각 경제학 이론은 서로 다른 특징을 인간의 본질로 추정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현 주류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 존재’라고 추정한다. 이 경제학이 지난 몇 십 년 동안 세계를 주름잡으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루저’라고 조롱당하거나, 이기적인 저의를 품고 있다고 의심 받는다.

반면 행동주의나 제도주의 경제학 이론은 인간이 더 복합적인 동기를 지닌 존재이고, 이기적 동기는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이런 학파들의 시각에 따른다면 사회를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라 여러 동기 중에 특정한 것을 장려할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기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사람들이 무엇을 정상으로 보는지, 서로를 어떤 식으로 보는지, 그런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우리 삶에 엄청나게 크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제문제를 전문가들 손에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경제학은 95퍼센트가 상식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에서는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와 그의 책 표지

이 비판적 시각을 갖추는 한 방법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2014년)에 나오는 이 명제로 족하지 않을까?

누가 이득을 보는가? :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학에는 다양한 이론이 있고, 각 이론은 복잡한 현실의 서로 다른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서로 다른 도덕적·정치적 가치 판단을 적용해 결국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린다. 화학에서 다루는 분자나 물리학에서 다루는 물체와는 달리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낙수효과 이론은 총생산량에서 더 큰 부분을 부자들에게 주면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실현되지 않은 가정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특정 그룹 곧 부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유리한 논리에 기반을 둔 것이다.

사회구성원 어느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누군가의 이익을 보는 형태의 사회적 향상만을 변화로 규정해, 단 한 명의 구성원도 사회로부터 짓밟힘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파레토 기준은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유리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준은 한 사람에게라도 피해를 주는 변화는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득권층에게 유리하다.

시장에 어떤 것을 포함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강도 높은 정치적인 행위이다. 무엇인가(가령 물)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민영화),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1원 1표’ 원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되고, 부자들이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가 쉬워진다.

물론 경제학이 정치적 논쟁이라 해서 어떤 주장이든 다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치 판단을 배제한 ‘과학적’ 분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