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통장잔고와 행복잔고
【조송원 칼럼】 통장잔고와 행복잔고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5.09 13:44
  • 업데이트 2023.05.13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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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나물 재배 비닐하우스

일(근력노동)을 하여, 일(두뇌노동)의 밑천을 마련하는 생활은 가성비(價性比) 혹은 가격경쟁력이 있는 삶일까? 삶은 과정이다. 결과는 삶의 끝이다. 행복 또한 그러하리라.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단독자가 두뇌노동으로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나이 먹은 근력이라도 팔아야 통장에 새로운 숫자가 찍힌다. 시골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여 한 달에 서너 번 오 리 길의 친구 비닐하우스로 자전거를 타고 간다. 취나물 수확을 도와 밑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시골에 인구가 줄어드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만큼 일손이 귀하다. 폭 10m, 길이 100m 비닐하우스 한 동의 취나물을 하루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예닐곱 명의 놉이 필요하다. 친구는 자동차로 여러 동네를 돌며 놉들을 모셔(?) 온다. 그중 한 일손인 나는 다른 놉들과는 사는 데가 너무 떨어져 있어, 혼자 친구의 비닐하우스로 자전거로 직행하는 것이다.

처음엔 올해부터 지하철 무임승차 나이인 나도 놀랐다. 일손 중 한 명만 내 또래이고 나머지는 모두 열 살 이상 윗길의 할머니들이었다. 팔십 대 후반도 있었다. 물론 취나물 수확에 큰 힘이 드는 건 아니다. 할머니들은 앉을깨에 앉아 낫이나 칼로 취나물 밑동을 베어 바구니에 담으면 된다. 나는 그 바구니의 취나물을 비닐 포대에 옮겨 담고, 바구니를 할머니들 곁에 다시 놓아두는 일을 한다.

큰 근력을 쓰지 않더라도 하루 종일 손놀림을 반복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내 일 또한 대수로운 힘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수월한 일은 아니다. 수천 번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해야 하고, 10kg 남짓 비닐 포대 100여 개를 들어 옮겨야 한다. 힘이 세더라도 배가 나왔거나 평소 허리가 경직되어 있었으면 뻑적지근한 요통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

할머니들은 조근조근 이야기도 하고,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별로 힘들어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나 또한 위장에서 양성 종양도 떼어내고 왼쪽 무릎 관절도 인공으로 바꿨지만, 마음이 장골일 뿐 아니라, ‘이 까짓’ 일쯤은 견뎌낼 기력은 아직 있다. 땀을 많이 흘렸다.

일 안 하던 사람이 일을 해서 되냐(힘드냐)고 할머니들이 되레 걱정을 해 준다. ‘돈 들여 일부러 땀을 빼기도 합니다’며, 오히려 즐겁다고 말해줬다. 사실이다. 나는 땀을 흘리면 진이 빠지는 게 아니라, 생기가 돌아오는 체질이다. 평소 종일 책상 앞에만 앉아 있으니 땀 흘리는 일을 애써 찾아서 해야 한다. 비닐하우스 안은 겨울이라도 햇볕만 나면 덥다. 하여 조금만 몸을 써도 땀이 난다. 그래서 비닐하우스 안에서 노동 강도가 비교적 약한 수확물 채취 돕는 일 정도는 즐거운 운동이다.

푸른 취나물이 줄어드는 만큼 시커먼 얼굴을 드러낸 농토 위의 비닐포대를 옮기면서 생각해 본다. 이 할머니들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가성비가 높을까? 단연 할머니 쪽일 것이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서 들어간 투입액(input)은 ‘현재의 할머니들’의 투입액보다 몇 십 배 많을 것이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우리(할머니들과 나)’를 유지하기 위해 드는 밥값은 같다. 할머니들뿐 아니라, 나 역시 ‘자발적 위리안치(圍籬安置)’ 생활을 하니 친교에 드는 비용도 엇비슷하다. 휴대폰 비용도 어금버금하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취나물을 수확하고 나면 일이 끝난 것이나, 나는 끝남과 동시에 본격 내 일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 차이가 난다. 할머니들은 텔레비전이 필요하고, 나는 컴퓨터가 필요하다. 시청료보다 인터넷 사용료가 두세 배 비싸다.

할머니들은 놉으로 일하는 날수가 내 두세 배이다. 그런 만큼 할머니들의 통장잔고는 불어난다. ‘현재의 할머니들’을 유지하기 위해 별반 비용이 들지 않는다. 하여 적게는 일곱 자리, 많게는 여덟 자리이다. 내 통장은 이삼 일 여섯 자리에 머물다 보통은 다섯 자리 혹은 네 자리로 내려앉는다. ‘현재의 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화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정보(책)와 관련된 비용이다.

할머니들이 나보다 가성비 높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따져보면 할머니들은 인생살이의 우등생인지도 모른다. 그 나이에도 부를 획득할 수 있는 건강한 육체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증명이 된다.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요양원 신세를 지거나 인지장애에 시달리거나 혹은 아예 하직을 했다. 내 자신 10년 후 혹은 20년 후 저처럼 정신과 육체가 온전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차이는 뭘까? 비닐하우스 취나물을 채취하다 보면 연필 굵기와 길이의 지렁이 천지다. 징그럽다. 할머니들은 취나물 밭은 으레 그러려니 한다. 나는 공식 교육에 더 많은 비용을 들인 만큼 지렁이를 통해 땅이 건강함을 읽어낸다.

할머니들은 죽기 전에 망령이 나서 자식들에게 폐를 끼칠까봐 걱정한다. 나는 치매를 노망이나 망령으로 치부하진 않는다. 육신과 함께 뇌세포도 늙어가 인지장애를 일으키는 ‘인지증(認知症)’임을 안다. 그리고 뇌세포가 늙지 않고 건강하게 활동하도록 하는 일상을 산다. ‘무당’이나 ‘도사’ 등 비합리적인 미신을 믿는 작자들이나 그들이 활개 치는 기이한 사회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해석해 낼 수 있다.

할머니들이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한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건 얼렁뚱땅 추측할 일이 아니다. 행복이란 용어의 정체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생활하는 데 오로지하는 할머니들이, 세상사 인간사에 대한 의념을 해소하는 데 오로지한 나보다 마음이 더 평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할머니들보다 내가 훨씬 더 즐거움이 많고, 주체적 삶을 살며, 인생사 세상사에서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다. 평생 통장잔고보다 행복잔고를 관리해 왔다는 게 그 근거이다.

나는 매일 석학들, 전문가들 간혹은 평범함을 글자화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갖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외국 사람도 있다. 현대인는 물론 2~3천 년 전 고대인도 있다. 생겨먹기로 단독자이다. 싫든 좋든 타고난 본성에 충실히 살았고 살고 있다. ‘외로운 늑대’일망정 좋게 말하면 주체적 삶이다.

뇌는 몸무게의 2%에 불과하다. 그러나 에너지는 20%를 쓴다. 보고서라도 써본 사람은 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지를. 생각 정리는 에너지가 많이 먹히는 고통이나, 또한 희열(즐거움)을 잉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고통은 육체의 힘과 의지의 힘 둘 다를 구비하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된다.

감당하고 난 결과물이 세상사 인간사에 대한 자유로움이다. 세상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성공과 실패를 뒤바꿀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세상사, 성공, 실패의 정체에 대해 그림을 명확히 그릴 수 있는 통찰이다. 다른 말로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일 것이다. 어쨌건 고통과 즐거움의 이유를 아니까, 마음은 자유롭고 평안하다.

한 손에 두 개를 동시에 움켜쥘 수는 없다. 큰 즐거움은 남기고 작은 즐거움은 버린다. 통장잔고를 불리는 일도 즐겁다. 대화 거리(책 등)를 사서 희열 거리(생각 정리)를 마련하는 일이 더 즐겁다. 하여 통장잔고는 낮춰 행복잔고를 높인다. 언젠가 육신은 물론 두뇌의 근력까지 흐물흐물해지겠지. 그러면 행복잔고는 바닥이 나고, 오로지 통장잔고만이 육신을 지탱하리라. 그 삶은 의미가 없다. 퇴장할 때이다. ‘그 때’를 알아채고 의지대로 퇴장할 수 있다고 말하면, 믿겠는가?

‘그 때’가 기력의 쇠약보다 먼저 올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아마 앞으로도 통장잔고는 네댓 자리인데, 일고여덟 자리가 필요한 질병이 생기거나 사고가 발생하면? 평생 몇 줄 읽고 세상사 인간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온 사람이다. 내 능력을 넘어선, 운명을 바꾸려는 허망한 짓은 하지 않는다. 허망한 짓을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아모르 파티!

석과불식(碩果不食), 너무 무겁다.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그 종자를 베고 죽는다’(農夫餓死枕厥種子·농부아사침궐종자)가 적격이다. 예스24에 하루 일당 치 책값을 입금했다. 신간이라 내일 바로 도착한단다. 기다림 또한 즐겁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