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 용불용설(用不用說)에 관한 소고(小考)
【조송원 칼럼】 용불용설(用不用說)에 관한 소고(小考)
  • 조송원 기자 조송원 기자
  • 승인 2023.05.18 07:10
  • 업데이트 2023.05.2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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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나물 비닐하우스[사진 = 조송원]

#1. 궤생이라는 사람이 제나라의 재상에게 말했다. “저의 동네에 남편이 죽으면 사흘 만에 시집을 가겠다는 여자와 종신토록 수절하겠다는 여자가 있습니다. 만약 이 두 여자 중에 아내를 맞이해야 한다면 어느 여자를 택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재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 같으면 종신토록 개가하지 않겠다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그러자 궤생이 말했다. “이 제나라에 동곽선생과 양석군이라는 두 은사(隱士)가 있는데 당대의 현사(賢士)입니다. 그들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굳이 뜻을 굽혀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지요. 재상께서는 수절하겠다는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신하를 취하는 일에 있어서는 유독 벼슬하지 아니하겠다는 신하를 뽑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시외전/두 사람의 은사-

#2. 레클람(Reclam) 출판사가 내 책을 …… 받아들이지 않을 …… 것임은 이제 아주 확실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나에게는 불가침적으로 여겨지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말입니다. 말하자면 내 책이 최고의 작품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나 역시 이 책이 출판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라면 20년 후든, 100년 후든 언제 출판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순수이성비판이 17xx년에 쓰였는지, 17yy년에 쓰였는지를 문제 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확실히 이 책 역시 굳이 출판되지 않아도 될 책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에게 보내는 비트겐슈타인의 편지. 1920년 5월 6일, 《편지》, 111쪽-

난데없이 ‘원기소’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1960년 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60명이 넘는 급우들 중에 서너 명은 원기소를 가지고 다니며 먹었다. 우리는 그 정체를 몰랐다. 약도 아니고 과자도 아니다. 그러면? ‘아프지 않는 사람도 먹는 약’쯤으로 정리했다. ‘약’이니 부러워할 것도 먹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기소는 종합영양제 혹은 일상 식생활에서 결핍되기 쉬운 영양소를 보충해주는 건강보조식품이었다.

어떤 생각이 불쑥 돌출한 것 같아도, 실마리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분명 ‘난’ 데가 나온다. 봄을 탄 것일까? 며칠 평소와 달리 심하게 피곤했다. 낮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수돗가로 가서 몇 번이나 찬물을 뒤집어써야 겨우 책상 앞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세월 따라 자연히 기력이 쇠했나? 원기를 회복할 비타민제라도 먹어야 하나? 불쑥 이런 우려에 ‘원기소’가 떠오른 것 같았다.

때마침 취나물을 수확할 때가 되었다고 친구가 알려왔다. 비닐하우스 취나물은 베어 내고 한 달 정도면 다시 자라 또 수확한다.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5~6 차례 수확하는 것이다. 기력을 확인할 기회로 삼았다. 일하는 데 힘이 부칠 정도로 기력이 쇠잔해졌는지 직접 몸을 쓰며 진단을 하고자 한 것이다.

1809년 라마르크는 『동물철학』에서 “동물들은 일생동안 자신의 필요에 의해 특정 형질을 발달시키며, 이를 자손에게 물려준다”고 주장했다. 그 유명한 ‘용불용설’(用不用說)이다. 생물에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있어, 자주 사용하는 기관은 발달하고 그렇지 않은 기관은 퇴화한다는 학설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기린의 목이 늘어나는 과정이다. 기린은 일생동안 높은 가지에 있는 잎을 따먹기 위해서 목을 늘이는 동작을 되풀이해 왔다. 이런 과정을 오랜 기간 지속한 결과, 기린의 목은 점점 늘어나게 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어떤 기관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그 기관은 점차 약화되고 기능도 쇠퇴하여 결국 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펭귄의 날개는 날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지 않으면서 점차 퇴화되었고 그 크기도 작아졌다. 동물에서 퇴화기관으로 알려진 흔적기관은 역시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 즉, 어떤 기관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형질이 약화되고 축소되었다는 것이 라마르크의 입장이다.

그러나 용불용설은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고, DNA 및 유전자가 발견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더구나 이후 멘델이 유전의 분자적 특성을 밝힘으로써 ‘획득된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나아가 20세기에 들어 급속히 발전한 유전학에 의해 유전자의 역할이 밝혀지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은 오류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태동하면서 라마르크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후성유전학은 한 세대에 특정하게 나타난 형질이 대를 거쳐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곧, DNA 염기서열이 변하지 않아도 특정 형질이 발현하거나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2~3세대 정도 대를 이어 유전될 가능성도 있다. 다음 세대에 전해지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용불용설과 비슷한 맥락이다.

라마르크가 말한 ‘유전’은 행위에 의해 얻어진 형질이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후성유전학에서 말하는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진실 여부를 떠나 후성유전학 연구가 시작되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다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라마르크는 생명체 자신의 행동을 매우 중요한 ‘진화적 요인’으로 생각했다. 생물의 삶이 ‘자유의지’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과학적 진실 여부는 일단 접어두자. 우리가 취할 것은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지닌 인문학적 교훈이다.

‘선한 의지’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것은 강화된다.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고매한 윤리의식을 생활에 적용하면 할수록 윤리의식은 높아진다. 윤리의식 없는 막가는 삶에는 윤리의식 자체가 퇴화되어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춘 자가 더욱 지식을 추구하고, 실용지식에만 관심하는 사람은 지적 능력은 퇴화한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한 논고』를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했다. 러셀은 자신의 지인을 끌어들여 두 군데에서 출판을 성사시켰다. 개가하지 않겠다는 여자는 개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윤리의식을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두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새삼 출사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사흘 연거푸 일했는데도 표 나게 체력이 달리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피곤했다. 일 마치고 씻고 나서 자기 전까지 네댓 시간, 정신적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엔 집중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자고 일어난 새벽, 어제의 피곤이 말끔히 가시진 않았다.

확실히 기력의 총량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원기소를 먹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원기(元氣, 본디 타고난 기운)를 지니고 있다는 게 행운임을 깨닫는다. 삶을 구성하는 모든 일에는 에너지가 든다. 기력이 넘쳐날 때는 아무 일에나 에너지를 막 써댔다. 그래도 부족함을 못 느꼈다.

나이 듦에 따라 기력은 확실히 줄어든다. 나이 듦에 따라 현명함은 분명히 늘어난다. 그러므로 기력의 총량은 줄어도 ‘일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게 할 수 있다. 에너지를 관리하고 적정 배분할 능력을 발휘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우선 교제(만남)와 술자리를 확 줄여야겠지. 한정된 에너지를 굳이 ‘찜찜한 즐거움’(guilty pleasure)에 쓸 필요야 있겠는가.

어쩜 우리의 삶은 씀(用)과 쓰지 않음(不用), 그 사이의 고민인 것 같기도 하다.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