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면서 둑 위의 천형씨를 바라보았다. 맺힌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예. 다음 주에 또 오기로 하고 인자 나갑시더. 형님 기다립니더.”
“그라지요.”
열찬씨는 다릿발 뒤에서 남숙씨는 자동차 안에서 물에 젖은 옷을 대충 갈아입자
“보자아, 어데로 가보꼬? 당신, 취사준비는 단디 해왔제?”
“걱정 마소. 내가 어데 어로장부인 일이 년잉교? 매운탕이면 매운탕, 추어탕이면 추어탕, 중태기 튀김이면 튀김, 그저 재료만 잡아준다면서야.”
명촌과 장촌에 시누이가 살고 언양남부에 사촌동서 상찬씨네가 살지만 남의 신세를 지거나 남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영순씨가 트렁크에 아예 한 살림을 차려온 모양이었다.
“그래 기왕이면 산청경개 좋은 곳에서 신선노름을 하면 좋겠네. 좋기야 작천정이 최고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고 옳다구나! 쌍수정으로 가자, 쌍수정!”
차를 운전교습소 옆으로 몰아 경부고속철청사부지로 통하는 새로 놓은 다리를 건너 말썽 많은 암면공장 <금강>의 뒤를 돌아 들판을 가로지르게 했다. 도리라고 불리는 도호리 앞의 넓고 푸른 들판을 가로 질러 또 한참을 달리자 마침내 영취산금강골에서 발원해 지내와 강당, 상천과 신복마을을 거쳐 내려오는 축시도랑과 간월산에서 발원한 꽃내, 작괘천이 화천마을을 지나 작천정과 호박소를 맴돌아 수남마을과 회나무진 벌장과 뒷벌을 거쳐 마침내 두 물이 만나는 지점인 쌍수정(雙水亭)마을 앞의 작은 언덕 앞에 도착한 것이었다.
옛날의 선비들이 꽃과 나비, 달과 별을 보고 시를 읊었다는 정자는 어느 태풍 땐가 날아가고 없었지만 아직도 그 정자가 없어지고 달을 보았다는 바위언덕은 그래도 남아 마을의 당제를 모시는 커다란 당수나무가 널따란 치마폭을 펼치고 있었다.
“기왕이면 경치 좋은 데로 자리 잡자.”
열찬씨가 정자가 세워졌던 바위 밑 모래밭에 자리를 깔게 하고 자동차에서 자리와 취사도구, 식수를 써내 두 여인이 부지런히 매운탕을 끓이고 밥을 하는데
“보소!”
도랑건너 골목 앞에서 웬 노인하나가 소리치는 지라 급한 데로 참외를 깎아 종이컵에 부은 소주를 마시던 두 사람이
“와요?”
하고 무심히 바라보는데
“웬 경우 없는 사람들이 남의 동네 당수나무아래서 불을 피우고 난링교? 무슨 동티라도 나면 우짤라고 그라능교?”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오는데
“이거 골치 아프네. 당신하고 처형은 가만 있어보소.”
열찬씨가 주춤주춤 자갈밭을 건너며 아무래도 몸매나 목소리가 눈과 귀에 익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이구, 이기 누고? 니 버든에 열찬이 맞제?”
뒤 따라 오던 초로의 여인이 소리치는 순간
“아이구, 작은님이누부야!”
열찬씨가 저도 모르게 소리치자
“야야, 니는 수십 년 만에 봐도 하나도 안변하고 어릴 때 그 얼굴이네.”
“아, 그라고 보니 명촌아재집 작은 처남이네. 우리 결혼했을 때 코를 물고 댕기디 마는 인자 같이 늙네.”
돌아가며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조일아재집 둘째 딸 작은님이누님이었다. 복님이, 작은님이, 이노, 인선, 끝선이, 을식이, 철구, 김구. 어느 새 3남 5녀의 6촌들의 이름과 특히 연산동 2공구에서 만났던 복님이누님과 허서방자형과 오롱조롱하던 조무래기조카들과 고생만 실컷 하고 죽은 을식이형을 떠올리는데
“그런데 여게 올 줄은 우째 알았노? 지 동네 사람들도 잘 범접을 안 하는 자리에.”
“예. 오늘 모처럼 옛날에 고기 잡던 생각이 나서 뜬 고기 좀 잡아서 매운탕 끓일라고 안 왔능교?”
“그래 고기는 좀 잡았나? 요새는 촌사람들도 좀 채로 안 잡는다 아이가?”
“예. 그륵반은 될 낍니더. 미거지도 한 마리 잡고.”
“처남 니 옛날 솜씨가 아직 안 죽었는가베. 웬 미거지를 다 잡고.”
주고받다
“자영하고 누님도 같이 갑시다. 오랜만에 소주도 한 잔 하고 매운탕도 묵고.”
하며 손을 이끌어 한창 지지고 볶는다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자영요, 우리 처이종 동서하고 처형임더. 언양에 상찬이형님 큰 아들 홍근이가 부산에 장개갔다 안 카덩교? 바로 그 사돈으로 우리가 중신했지요.”
하고 처형내외와 인사를 시키자
“안녕하세요?”
어리둥절한 영순씨도 고개를 까딱하는데
“얄궂어라! 하나도 안 변했네. 자네 시집오던 날 보니 하도 새첩어서 버든마실 몽초 열찬이가 어데서 각시하나는 기가 찬 미인을 구했구나 싶었는데 세상에 그 얼굴이 그대로네. 그래 올케 니는 올해 몇 살이나 되노?”
“쉰둘이지요.”
“아이구, 한창 좋은 나이네!”
조일아지매를 닮아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걸걸한 작은님이 누님이
“국 끓어도 퍼지 말고 잠깐 기다리라. 내 정구지 좀 가 오꾸마.”
하고 급히 집에 갔다 오는 동안
“처남댁, 그마 지금 국물쪼깨만 퍼주소. 세상에 천하일미를 놔두고 깡소주를 마실 수 있나?”
벌써 소주 두 병을 거덜 낸 세 사내들이 부지런히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러고 보니 당시 점잖고 야무치고 부지런하다고 소문난 쌍수정 김서방도 일단 술판이 벌어지면 종찬씨, 금춘씨, 구시골 김 서방, 조일댁 허 서방 같은 동네제일의 술꾼들에게 절대로 빠지지 않는 축이었다.
“내까지 여기 퍼질러 앉아 술을 먹으면 마실사람들이 보고 뭐라 칼 낀데...”
6촌 매형 우현씨가 마을 쪽으로 눈길을 보내는데 마침 중늙은이 둘이 지나가는지라
“봐라. 부산에 우리 처남이 오늘 놀러왔다 아이가? 너거도 한 잔 하고 갈래?”
우현씨가 커다랗게 소리치자
“마 됐심더. 놀러오는 처남 있는 사람은 좋겠다. 형님이나 많이 잡수소.”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처남 니 간도 크제? 내가 없었으면 우짤라꼬 요다 전을 폈노?”
작은님이 누님까지 여섯이 둘러 앉아 매운탕에 밥을 말아 거룩하게 점심을 마치고 사내들은 술을, 여자들은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는데
“자영요! 제가 나중에 정년퇴직하면 언양쪽으로 돌아오고 싶은데 버든동네는 인자 없어진다카이 아무래도 여게 쌍수정처럼 한 십리 안에 자리잡고 싶다 아잉교? 그래서 이참 저참 고기도 잡을 겸해서.”
“아이구, 그랬구나. 여게 쌍수정도 아직은 물도 좋고 간혹 뜬고기도 잡히지만 저게 다릿발 놓는 것 좀 봐라. 경부고속철인가가 놓이면 역이 들어선다고 저 앞에 도리들이 다 없어져 고속철단지가 되고 도리마실이 다 없어진다카이 여기도 아무래도 많이 오염되겠지. 처남 니가 여게 온다카면 우리야 좋지만 그 때까지 이 마실이나 이 개울이 이렇게 깨끗하게 남아있겠나 말이다.”
이렇게 술과 이야기로 하루를 잘 보내고 돌아왔는데 저녁에 영순씨에게 남숙씨의 전화가 왔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 만큼 재미있고 속이 뻥 뚫리는 날은 없었다고 가서방 보고 언제 또 가는지 다음 주에는 가면 안 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옳다구나! 그 귀한 어로 팀 졸병을 하나 구하기는 구했다 싶은 열찬씨가 이튿날 전화로
“처형!”
“와요?”
“이번 주에 또 고기 잡으러 가까요?”
“예. 내사 좋지요. 가서방만 시간이 되면.”
너무나 좋아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요일쯤에 또
“사돈, 아니 사부인!”
“예, 사돈어른.”
“일요일 날 또 언양에 갈까요?”
“가고말고요!”
너무나 좋아해서 이미 매운탕 감 튀김재료까지 다 준비해놓은 금요일 저녁에 또 전화를 해서
“메기부인!”
“와요?‘
“내일 또 쌍수정 갈까요?”
“그라면 인지 와서 안 간단 말잉교?”
“내가 내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혹시 배가 아플지도 모르고...”
“보소. 제부고 사돈이고 나발이고 그런 말 하지 마소. 사람 허폐에 잔뜩 바람만 집어넣고 어로장이 빠지면 우짠단 말잉교? 어떤 사람 복장 터져 죽는 꼴을 볼라카능교?”
“그라면 할 수 없제. 나는 물고기 잡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 우리 사부인 때문에...”
“에라이, 심청궂은 사돈어른!”
이렇게 매주 언양으로 드나들며 자동차가 고속도로톨게이트를 지나 부산경남경계 작장마을을 지나 외송으로 접어들면
“지금쯤 언양바닥 미꾸라지하고 중태기, 미거지랑 빠꾸마치동네에 경계경보가 떨어졌을 기다. 부산에서 대가리 허연 어로장이 올라온다고.”
열찬씨가 농담을 하면
“지금은 공습경보겠제? 부산에서 짜리몽땅 다부진 아지매 하나가 궁디까지 오는 스타킹 신고 덕천고개 다 넘었다고.”
하며 매주 언양을 찾았고 어떤 날은 토, 일요일 이틀 연속 나서기도 했다. 그래도 신통한 것은 다리가 불편해 아무것도 않고 손바닥만 한 그늘이라도 하나 찾으면 두 시간이든 네 시간이든 꼼짝 않고 꾸벅거리며 기다리던 천형씨가 매운탕과 소주를 너무나 즐겨서 조금도 지루하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이 영순씨의 기름 값, 도로 비를 수월찮게 내어주며 잘도 따라다닌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 세월이 가고 어느 듯 하기휴가철이 지나고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무과야 늘 무사태평했지만 구덕수목원의 진상조사가 마무리되어 구팔칠씨는 절사정산이라는 방법으로 투자비만 회수해 물러나고 일부기초공사는 철거하고 너무 크게 자리 잡은 기초위엔 차라리 커다란 건물을 지어 해방 후의 모든 교과서와 교복을 수집해 교육사료관을 짓기로 했는데 대구에 사는 양모라는 수집가가 부지런히 구청장실을 드나든 결말이었다.
정석이는 또 다시 유럽여행비조로 무려 600만 원의 돈을 송금케 했다. 가족들은 정작 외아들이 빠진 허전한 추석을 보내게 하고.
추석을 쐬자 유럽여행을 마친 정식이게서 어학연수마무리를 위하여 또 800만원을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잘 하면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전에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돌아온다면 당연히 집이지 왜 그렇게 막연하게 우리나라라고 하느냐니까 아직도 모자라는 학점이 있어 다시 원주캠퍼스에서 계절 학기를 수강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속 모르고 공부 잘하는 아들 두어 좋겠다더니 이렇게 속속들이 골병들 줄을 몰랐다는 영순씨에게
“뭐, 은근히 즐기는 것 같구먼. 모임 같은데서 우리아이는 어학연수에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가 공부 못 하는 아이들 부모들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되고 그 남의 불행이 결코 그냥 괴로운 것이 아니라는 걸 내 모를 줄 알고.”
“아이구, 사람이 배배 꼬여도 우째 저리 못 되게 꼬였을까?”
“사돈 남 말하네.”
사실 돈이 많이 든다고 비명을 지르는 열찬씨 자신이 그걸 괴롭지만 어쩐지 즐겁기도 한 은근한 재미로 즐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어쩌면 올 겨울에 터질지도 모르는 슬비의 결혼식 전에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주말마다 언양에 천렵이나 다니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손님, 마치 점쟁이가 동방에서 귀인이 나타난다 하듯이 저 넓은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귀인이 나타났다. 바로 남숙씨의 남동생인 사촌처남 항해사 남근씨가 하선한 것이었다.
남근씨는 영순씨보다 겨우 한 달 먼저 태어난 이종사촌처남이었다. 어릴 적 같이 양정에서 자라며 양정국민학교의 동급생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넉넉한 집안에 곱게 자란 영순씨와 달리 하루하루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에도 급급한 집안에서 참으로 애 터지게 자라난 사람이었다.
울산군 두서면 소호리에서 태어난 그의 어미니 금란씨가 열일곱 어린 나이로 역시 입 하나를 줄인다고 시집간 곳이 경주 산내면 동곡이라는 첩첩산골이었다. 하 많은 마을을 다 두고 하필이면 언양장바닥에서 쇠동꼴이라고 불리는 소호에서 태어나 동골로 시집을 갔으니 팔자 치고도 참으로 기구한 팔자이기도 했다.
그의 부모역시 6.25가 터져 가지산과 문복산과 고헌산이 첩첩이 둘러싸인 산돼지하고 발맞추는 산골이라 밤이면 인민공화국 빨치산소굴로 변해 산봉우리마다 횃불이 타오르고 적기가가 울려 퍼지고 낮이면 대한민국이 되어 순경이 빨치산부역자를 색출하는 아수라장을 견디지 못 해 소호의 처가가 부산양정으로 이주할 때 같이 솔가해온 사람들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