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475)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6장 언양어장 열찬씨⑤
대하소설 「신불산」(475) 제5부 열찬씨의 전성시대 - 제26장 언양어장 열찬씨⑤
  • 이득수 이득수
  • 승인 2023.05.22 10:52
  • 업데이트 2023.05.22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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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언양어장 열찬씨⑤

그의 부모역시 6.25가 터져 가지산과 문복산과 고헌산이 첩첩이 둘러싸인 산돼지하고 발맞추는 산골이라 밤이면 인민공화국 빨치산소굴로 변해 산봉우리마다 횃불이 타오르고 적기가가 울려 퍼지고 낮이면 대한민국이 되어 순경이 빨치산부역자를 색출하는 아수라장을 견디지 못 해 소호의 처가가 부산 양정으로 이주할 때 같이 솔가해온 사람들이었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쇠동꼴 일대에서 가장 인물이 훤하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훤한 얼굴에 주먹만큼 커다란 코를 달고 있는 그의 아버지와 인물도 참하고 손끝도 야물고 성격도 쾌활하고 창가까지 잘 해 역시 일등신붓감으로 꼽히던 그의 부모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어찌 된 셈인지 신혼시절부터 뭔가 버성기기 시작했다. 나이 든 신랑은 어린 신부를 불면 날아갈까 손에 쥐면 부서질까 애지중지했지만 아직 열일곱의 어린신부는 신랑 쳐다보기를 뱀을 보기보다도 더 끔찍이 생각했다. 도무지 자신의 옆에 범접하는 것조차 꺼려해 밥을 먹을 때도 따로 상을 차려주고 자신은 한참이나 떨어진 자리에 앉아 바가지에 밥을 비벼 후딱 먹어치우고는 혹시 신랑이 다가올까 봐 종일 부엌이나 채전 밭, 아니면 축담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저녁마다 신혼 방에서는 이리 오라, 못 간다하는 시비와 함께 개잡는 듯 비명소리와 가끔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으로 이듬해의 맏딸을 필두로 잇따라 남매가 태어났다. 그렇게 남이면 남 보듯이, 밤이면 님 보듯이 한다는 말과도 달리 신랑은 밤낮으로 너무 좋아 목이 메고 각시는 밤낮으로 원수처럼 치를 떠는 세월이 흘러 6.25가 나던 그 해 무려 10년도 더 지나 태어난 남숙씨를 업고 부산으로 나온 것이었다.
 

전쟁이란 흉흉한 분위기에 엄청난 피난민이 몰려와 아수라장을 이룬 부산바닥 게딱지만한 판잣집에 세를 들어 살면서 그 이상한 부부가 딱 한번 의논이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내막이 참말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이미 다들 너덧 명의 식솔을 거느린 큰처남 노복씨가 판잣집을 짓는 건축현장에, 둘째처남 노만씨는 쌀과 국수를 파는 가게의 잔심부름을 하고 총각인 셋째처남 노경씨는 아이스케키를 떼다 자갈치부두에서 양정까지 하루 종일을 걸어 다녀도 다들 목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판에 동곡에서 부터 농사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 소 닭 쳐다보듯 해 늘 양식이 달막거리게 하던 금란씨의 남편 이서방은 도무지 무슨 일을 해볼 염을 않고 그 좁은 판잣집에 종일을 드러누워 빈둥거리다 가끔씩 점점 행경산꼭대기로 올라가는 판잣집위로 얼어 죽고 굶어죽은 아이들과 피난민을 대충 묻어 엉성하게 덮어놓은 공동묘지나 어슬렁거리는 판이었다. 갓난애 남숙씨까지 여섯 식구가 곱다시 굶을 판이라 벌써 양정시장에서 생선장사를 시작한 생활력이 강한 큰 올케 태자엄마 옆에 어찌어찌 반티 하나를 겨우 놓을 자리를 내어 금란씨가 채소장사를 벌였지만 밥은커녕 하루하루를 국수로 때우기도 힘든 판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코만 커다란 게을러빠진 남편이

“나도 부산역이나 한번 나가볼까?”

어디서 낡은 지게하나를 구해 메고 나서는 것이었다. 

“보소. 이 핀이 농사를 지을 때도 나락 한 짐을 지거나 갈비 한 바지게를 안 해오던 사람이 지게꾼은 무슨 지게꾼잉교?”

금란씨가 반신반의 했지만 

“지게 아이면 바지게 아이가? 안 되면 그 유명한 영도다리나 자갈치구경이나 하고 오면 되지.”

근 20리가 된다는 길을 걸어서 나선 것이었다. 미운 정도 정인지 그래도 평소 안하던 지게질에 골병이 들거나 복잡하고 낯선 곳에 가서 길은 안 잃었는지 종일 걱정을 하던 금란씨가 일찍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쉬이...!”

문 앞에 섰던 남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엄마 오나?”

젖먹이 남숙이를 안은 열여덟이 된 맏딸 큰숙이와 열일곱의 아들 대근이, 열다섯의 금숙이가 빙 둘러앉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종이상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보소, 이기 웬 보루박숭교?”
“영도다리 밑에서 주웠다 아이가?”
“아니, 이렇게 큰 보루박수를 누가 내삐맀을까?”
“글쎄. 누가 말하기를 뭐 미군군수물자나 밀수품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카더라. 경찰이나 세관의 단속 때문에 급하게 도망가다가 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에이, 그렇게 귀한 기 우째 당신 손에 돌아오겠노?”
“젠장, 밑져야 본전이지. 군수물자나 밀수품 뭐 금붙이나 귀금속이 들어도 괜찮지만 다문 양담배나 그 커피나 우유가루가 들어도 어데고? 옷이나 신발이 들어도 야매시장에 가서 팔면 되고.”

남편이 신을 내자 아내도 덩달아 눈이 빛나는데

“아부지, 나는 차라리 닭괘기나 들었으면 좋겠다. 닭괘기 묵어본지가 얼마나 새까만지.”

열다섯의 금숙이가 끼어들자

“에라이! 빌어먹을.”

남편이 혀를 차며

“자, 연다이!”

하며 겹겹이 조여 맨 끈을 풀고

“자, 봐라!”

자신만만하게 뚜껑을 여는 순간

“아니 이기 뭐꼬? 피 아이가? 피!”

금란씨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아이구 비렁내야!”

아이 셋도 코를 움켜쥐었다.

다시 확인해보니 갓난아이를 낳고난 뒤의 태반이었다.

“이런 아는 내삐리고 태뭉티기만 키운다커디마는...”

윤란씨가 중얼거리며 침을 퉤 밭는데

“누가 태를 버리러 영도다리에 왔다가 사람들이 봐서 그냥 살짝 놔두고 간 건 갑다. 괜히 고생만 했네.”

머쓱해진 남편이 뒷산의 공동묘지로 태를 묻으러갔다.
 

그러고는 다시 일할 염도 않고 가장이 들어 누워버린 판잣집에는 연달아 심상찮은 일들이 일어났다. 역시 제 아비처럼 코가 덩실한 맏딸 큰숙이는 자그마한 체격에 역시 어미를 닮아 손이 여물고 몸이 빨라 꽤 괜찮은 처녀라는 소문이 났는데 서울이 수복된 이듬해 대구출신의 의용경찰에게 시집을 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음까지가 문제였다. 역시 아비를 닮아 빈둥거리며 놀기만 좋아하지 고생하는 돈벌이에는 손끝도 얄랑하지 않던 아들 대근이가 그래도 물러 받은 커다란 코 하나로 처녀들을 호리는 데는 소질이 있었는지 대신동에서 제법 밥술이나 뜨는 집의 처녀와 연애를 해 이미 볼 짱을 다 본 모양이었다. 처녀 집에 찾아가 딸을 달라고 하니 총각집의 형편을 알아본 처녀 집에서 단번에 거절해버렸다. 

하기야 달랑 처녀를 주어도 양정에서는 어떻게 감당할 방법이 없어 모른 척 했는데 어느 날 신부 집 대문 앞에서 결혼을 안 시켜주면 약을 먹고 죽는다며 둘이 음독자살시늉을 했는데 뭣이 잘못 되었는지 대근이만 숨이 딸깍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화불단행이라고 처녀꼴이 나자말자 여기 저기 쏘다니며 가끔 늦기도 하고 새벽에도 들어오기도 하던 차녀 금숙이도 어느 날 어디 뭔 항구에서 시신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와서 배가 퉁퉁 부어오른 송장을 제자리에서 화장하고 돌아온 금란씨가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모진 세월이 흐르면서 6년 후에 태어난 막내아들이 바로 남근씨였다.

 

남근씨가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커서 마도로스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자신이 항구도시 부산에 살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둘째매형 천형씨 때문이었다. 남근씨가 열한 살, 남숙씨가 열일곱이 되던 해 양정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어느 할머니가 제법 처녀티가 나는 남숙씨를 보고 중매를 넣었다. 

다리를 약간 절기는 해도 배를 타서 돈을 잘 버는 스무 살짜리 총각이 있는데 거기에 시집만 가면 늙고 병든 장인과 가난한 처가를 거두고 어린 처남 남근이의 공부도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고향 통영에 부모가 있긴 하지만 부산에 올 사람들도 아니라 따로 시집살이를 할 것도 없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혼처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밥걱정을 없게 해준다는 말에 처음에는 안 간다고 울며 불고 야단이던 남숙씨도 마침내 승낙을 해서 방이 둘인 셋집을 얻어 바로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배를 탄다는 새신랑 천형씨는 먼 바닷가를 떠돌아 외국을 드나드는 외항선원도 아니고 고기 잡는 어선도 아닌 통선(通船)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배를 탄다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통선이란 말도 들어본 일이 없는 남숙씨가 알아보니 통선은 외항에 정박한 배에서 내항으로 승객을 태우기도 하지만 주로 배에서 나오는 캐비지란 이름의 쓰레기와 소소한 짐을 실어 나르는 용달차 비슷한 용도의 목선이었다. 

그래도 돈은 꽤나 잘 버는지 다달이 방세를 내고 쌀을 팔고 연탄을 넣을 돈을 빠짐없이 잘 내어놓았다. 그래도 일찍 집을 나와 거친 선원들 틈에서 기름 밥을 먹고 살아서 그런지 말투나 행동거지가 좀 투박하다든지 자잘한 돈거래나 사람만나는 일에 눈치를 보거나 의심을 하는 일이 많아 늙은 부모와 어린 동생을 안은 남숙씨의 마음이 하루라도 산뜻하거나 편안하지를 못 했다. 

그런 가운데 남숙씨의 아들딸이 잇달아 태어나 무려 일곱 식구나 되면서 점점 눈치를 보거나 마음을 상하는 일이 늘어났다. 밤늦게 들어오는 천형씨의 손에 과일이나 통닭봉투가 들린 날도 있었지만 펼쳐놓으면 옆방의 세 식구까지 일곱 명이 먹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가끔 사오더라도 일곱 식구 모두가 먹을 만큼 사오라고 시키면 그러마고 대답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 했다. 어려서 부터 고생을 해서 인정이 많은 천형씨가 술이라도 한 잔 하면 가족들 고생이 나서 무언가 먹을 것을 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하도 어렵게 돈을 벌고 굶기도 예사로 하던 그 오그라든 손이 좀체 무언가 넉넉하고 선선하게 사지를 못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가뜩이나 한 쪽 다리를 끄는 걸음걸이가 술이라도 들어가면 더 어둔한 판에 한쪽 손에 무언가를 들고 힘들게 들어오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고...

그렇게 눈치로 삼십 년이 넘게 부부생활을 지탱한 남숙씨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려 천형씨가 말을 걸 때가 아니면 좀체 말을 걸지 않았고 생활비를 달라고 모처럼 말을 섞고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같은 식탁에 앉아도 외면한 채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모전여전 어머니를 닮은 팔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 글은 故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